9월18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한 민유성 산업은행 총재가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문제에 대해 쏟아지는 여야 의원들의 비판성 질의에 답하다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고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그 다음날 “우리가 먼저 자체 점검을 한 뒤 문제가 있다면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강재훈 기자
“국민들은 다 망해서 파산하려는 회사를 왜 인수하려 했는지 의혹을 보내고 있습니다.”
9월18일 오전 국회 정무위원회 회의실, 이사철 한나라당 의원은 민유성 산업은행 총재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민 총재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이 의원은 “민 총재는 리먼 서울지사에서 2008년까지 3년간 근무하다가 지금의 자리로 갔다”며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염두에 두고, 정부나 청와대로부터 언질이나 지시를 받고 간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민유성 총재는 “(총재 내정) 당시에는 리먼이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민유성 총재는 억울하다는 듯 리먼브러더스 인수 협상 과정을 상세히 공개했다. 민 총재의 말을 종합하면, 리먼브러더스는 산업은행에 두 차례 인수 제의를 한다. 첫 번째는 6월 초였다. 하나은행과 산업은행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를 타진했다고 한다. 산업은행은 지분 20%를 차지하는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하는 조건이었다. 이때는 민 총재가 취임(6월11일)하기 전이었다. 산업은행은 거부한다. 리먼브러더스는 민 총재가 공식 취임한 이후인 7월18일 두 번째로 산업은행에 인수 의사를 물었다. 공식적인 인수 협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는 설명이다. 리먼으로서도 리먼브러더스증권 서울지사장 출신인 민 총재가 가장 믿을 만한 협상 대상자였을 것이다.
의문은 남는다. 먼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가 산업은행 총재에 내정된 6월2일에 리먼은 위기의 정점에 있었다. 리먼브러더스는 지난 3월 파산설에 시달리다, 다음달 40억달러의 자본조달에 간신히 성공했다. 미국 경제지 은 6월4일(한국시각) 리먼브러더스가 기존 주주로부터는 자금조달이 어려워져 한국의 산업은행과 우리금융 등을 대상으로 자본유치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 총재의 취임 당일인 6월11일에는 영국 경제지 의 보도가 이어졌다. 리먼이 산업은행뿐만 아니라 국민은행, SC제일은행 등과도 투자 협상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은 한 시중은행 고위급 인사로부터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고위급 인사는 리먼브러더스 인수전에도 일부 개입했다. 그는 “평상시의 리먼브러더스라면 전세계 대형 기관투자가들이나 국부펀드(國富fund·노르웨이 정부 연기금이나 싱가포르 투자청, 쿠웨이트 투자청 등과 같이 정부 자산을 운용하는 정부 조성 펀드)로부터 투자를 받았겠지만, 상황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중동을 거쳐 한국과 중국까지 투자자들을 구하러 왔었다”며 “국책은행인 산업은행뿐만 아니라 하나은행지주와 국민은행 등 상업은행도 잇따라 접촉했다”고 말했다. 한국형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도 교섭 대상이었다. 그는 “왜 하필 리먼을 인수하려고 했느냐고 하는데, 그건 리먼이 매각시장에 나왔기 때문”이라며 “유동성 위기까지 맞아 본래 가치보다 언더밸류(저평가)된 상황이니, 리스크는 크지만 인수할 만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투자은행은 직접 투자자들을 모아 사업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그 수익을 나누는 ‘고위험 고수익’ 금융이라 산업을 촉진하는 효과가 크다”며 “장기적으로 투자은행업을 육성해야 한다면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통해 단기간에 이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8월27일치 칼럼 ‘조선데스크’.
누리꾼들로부터 ‘리먼 인수를 부추겼다’며 집중적인 난타를 맞고 있는 8월27일치 칼럼을 보자. 칼럼에서는 “만년 금융 후진국인 우리가 요즘과 같은 가격에 세계 일류를 인수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리먼의 위험만큼 기회가 커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라고 썼다. 같은 논리의 연장선이다.
이런 논리 흐름은 참여정부 시절부터 시작됐다. 이른바 ‘동북아 금융허브론’이다. ‘노무현 정부의 것은 모두 부정한다’던 이명박 정부도 ‘동북아 서비스·금융 중심지론’으로 이를 이어받았다. ‘동북아 금융허브론’의 저작권은 사실 삼성경제연구소였다. 삼성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윤순봉 부사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이광재 의원의 라인을 통해 한국의 발전 모델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동북아 금융허브도 그 일환이었다.
한 시중은행의 사장급 인사는 “한국이 아시아의 금융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시기는 지금이 딱 적기”라는 논리를 폈다. 그는 “일본은 제조업에서는 중심이 됐지만 금융에서는 실패했다”며 “이를 알고 있는 중국이 금융업 육성에 집중하고 있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상황이라 한국이 동북아의 금융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틈새 시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한국이 가장 금융 개방이 잘돼 있는 만큼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허브는 자유구역을 만들고, 높은 빌딩을 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뉴욕·런던·싱가포르와 같은 주요 금융허브와 겹치지 않도록 시간대가 달라야 한다. 영어 환경도 완벽해야 한다. 자본의 국적을 따지지 않는 ‘규제 없는 환경’도 대전제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금융허브가 되려면 단적으로 ‘돈세탁 외에는 모두 허용하겠다’ ‘범죄로 벌어들인 돈 외에는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완벽한 개방성을 전제로 한다”며 “그러나 한국은 이에 대해 엇갈리는 신호를 보내왔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참여정부에서 변양호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외환은행을 매각해야 한다고 하다가, 퇴직 이후에는 ‘토종 펀드 육성론’을 외치며 ‘보고펀드’를 만들었다”며 “이는 이른바 외국 자본과 국내 자본을 나누는 이율배반의 극치”라고 지적했다.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도 “이명박 정부도 자본 자유를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재벌 중심,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모델 사이에서 엇박자를 계속 보여왔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대표적인 것이 포이즌 필(적대적 인수 시도가 있을 경우 기존 주주들이 손쉽게 주식을 늘려 적대적 인수 포기를 유도하는 것) 등 차등의결권제 도입으로, 국내 기업의 경영권 안정을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라고 주장했다. 이는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아 국내 기업, 특히 재벌의 경영권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주겠다는 제도다. 외국 자본으로서는 차별을 당하는 셈이다.
이런 모순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동북아 금융·서비스 중심론’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 산업은행이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시도한 것도, 살펴보면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747’ 경제전략과 맞물려 시작된 일이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산업은행을 투자은행화하자’는 아이디어는 지난해 MB(이명박) 대선 캠프에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곽승준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등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것으로 안다”며 “산업은행을 수동적인 정부 대출기관이 아닌 국내외 시장에 대한 공격적 투자자로 만들어 경제 살리기의 선봉에 둔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이 동북아의 금융·서비스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공기업을 민영화해야 하고, 공공 부문에도 상업성을 대대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종태 연구위원은 “투자은행 설립 등을 통해 금융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증권시장에서 거래 가능한 주식 물량을 대폭 늘려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의료·교육뿐만 아니라 물과 전기 등 공공 부문에도 상업성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투자은행이 투자자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투자 대상이 다양해야 한다. 주식시장에 ‘블루칩’(우량주)이 많아야 한다. 주식시장도 커져야 한다. 당장 블루칩을 주식시장에 공급하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이 재무구조와 수익성이 좋은 공기업을 상장시키는 것이다. 수익성이 높은 병원과 대학교, 상수도 등을 영리법인화(주식회사화)해서 상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은행·보험사·대기업 종합금융 전략
촛불집회가 정점에 달해 있던 6월 중순 이후 청와대와 여당 일부에서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공기업 민영화론의 선두 주자는 곽승준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이었다.
야당에서는 ‘리먼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며 정부의 금융자유화 속도에 제동을 걸겠다는 태도다. 국회 정무위의 민주당 간사인 신학용 의원은 “대형 투자은행을 만들기 위한 자본시장통합법 자체에 대해서는 지지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한꺼번에 규제를 풀어주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며 “현 정부의 금융정책 전반을 재검토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여당에서는 일단 산업은행의 민영화 목적과 시점에 대해서만 재검토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이한구 국회 예결특위 위원장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통과시켰던 자본시장통합법에 대해 지금 와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금융과 관련한 규제 완화를 정식으로 발표한 것은 아직 하나도 없다”며 “산업은행을 투자은행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것이 유일한데, 이를 어떻게 추진할지에 대해서 정부와 계속 논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투자은행의 고향’ 미국에서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투자은행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조처를 준비 중이다. 채지윤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미국에서도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글로벌 투자은행의 경우 모회사뿐만 아니라 자회사와 해외에 설립한 자회사까지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고, 미 중앙은행(Fed)이 투자은행에 대한 직접적인 감독과 규제 권한을 가지는 방향으로 정책 방향이 수립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이 자본시장통합법과 투자은행 도입에 대해 “참여정부 때 만들어진 것”이라며 수수방관할 수 없는 이유다. 참여정부 때 만들어진 제도라면 다 손을 대던 이명박 정부가 아니던가.
한국에선 재벌에 대한 금융 규제 완화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박영선 민주당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일단 자본시장통합법이 발효되면 금융기관 간의 벽이 완화되면서 금융시장이 큰 소용돌이에 빠질게 될 것”이라며 “여기에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을 막아온 ‘금산분리 방침’이 완화되면 그 위험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 의원은 “금산분리 완화의 궁극적인 방향은 재벌 등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라며 “대기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 소유의 은행에서 계열사에 대한 보증이나 대출을 남발하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당시 동북아 금융허브를 표방하면서 추진한 인천경제자유구역 조감도. 금융허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고층 빌딩이 아니라 국경없는 자본의 이동에 필요한 탈규제와 영어 등 기초 인프라라고 경제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이 금융허브가 될 가능성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말이 엇갈린다.
자본시장통합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내년 2월부터는 은행-증권-보험의 장벽이 본격적으로 무너진다. 이에 대비해 시중은행과 대형 보험사들은 ‘종합금융그룹’을 향한 금융지주회사 체제를 만들기 위해 질주를 시작했다. 재벌들도 금융권에 대한 규제가 풀릴 때를 대비해 활발히 보험사와 증권사를 인수하고 있다(표참조). 지난 2월 신흥증권을 인수한 뒤 HMC증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대적인 영업 확대를 추진 중인 현대자동차그룹이 대표적이다. 현재 계열사에서 증권사가 없는 재벌그룹은 LG그룹이 유일하다.
대다수 국민들이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한꺼번에 없앤 금융규제들이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몰고 왔다고 믿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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