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 횟수 줄여 피고인 편하게 하고 수사 부실은 인력·시간 탓, 삼성 ‘경제 기여’ 생각해주는 구형까지
▣ 박현철 기자 한겨레 사회부 fkcool@hani.co.kr
“준비기일을 여러 번 해서 공판은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했으면 한다. 변호인들도 동의할 듯한데….”
그때 ‘비극’을 예감해야 했다.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66) 전 삼성 회장 등 삼성그룹 전·현직 임원 8명에 대한 첫 공판 준비기일이 잡힌 5월15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 삼성특검팀의 대변인이기도 했던 윤정석(50) 특검보의 이 한마디는 ‘비극적’ 결말의 예고탄이었다.
준비기일 내용도 잘 몰라
6월4일 네 번째 공판 준비기일. 이날은 공판에 나올 증인을 신청하고 채택하는 날이었다. 특검 쪽은 김용철 변호사, 홍석현 회장, 이재용 전무 등 거물급 증인을 포함해 공소사실 3가지에 대해 20명이 넘는 증인을 신청했다. 변호인들은 “이미 특검에 불려가 수사를 받았다”며 증인 채택에 반대했지만, 재판부는 “조사를 받았다는 게 법정에 안 나올 이유가 되진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증인이 많아서 일주일에 세 번 재판을 열어야겠다”고 재판부가 말하자 특검 쪽의 태도가 달라졌다. 30분의 휴정이 끝난 뒤 윤 특검보가 먼저 “공판 횟수를 줄여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면 증인 수를 줄여야 한다”는 재판부와 삼성 쪽 의사도 모두 받아들였다. 홍 회장, 김 변호사, 허태학 전 삼성에버랜드 대표이사 등의 증인 채택이 모두 보류됐고 이들은 결국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재벌 총수인 이건희 전 회장에겐 ‘공개된 재판에 나오는 것 자체가 실질적인 징벌’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이 전 회장 등을 불구속 기소한 특검으로선 잦은 재판을 압박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반면 삼성 쪽 변호인단으로선 이 전 회장의 법정 출석을 최소화하는 게 변론만큼 중요한 지상과제였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특검 쪽이 변호인들의 과제를 먼저 덜어주고 나선 것이다.
조준웅(68) 특검이 보인 태도도 의아스러웠다. 준비기일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는 6월12일 열린 첫 공판부터 법정에 나왔다. 변호인들은 “사적 경제활동 영역에 검찰이 개입했다.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있다”며 당당했다. 변호인들의 주장은 “이건희 회장 등 그룹 비서실의 조직적인 지시·감독이 있었다”는 특검 수사결과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자 조 특검은 공판 도중 “수사 당시엔 ‘지시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진술했다가 지금에서야 ‘내용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진의가 뭐냐”고 재판부와 변호인들에게 물었다. ‘왜 말을 바꾸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시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진술을 받아들이는 특검과 삼성 변호인들의 해석은 애초부터 달랐다. 삼성은 ‘헐값으로 사채를 발행하도록 지시하진 않았고, 발행 계획 수립 이후엔 비서실과 충분한 협의를 거쳤다’는 것만 인정하고 있었다. 이를 특검은 쉽게 말해 ‘내 죄를 인정한다’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앞서 열린 공판 준비기일에서 특검보들과 변호인, 재판부 사이에 어느 정도 상호 이해가 된 상태였다. 재판부가 “‘공모를 인정한다, 안 한다’는 양쪽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 증거조사를 통해 입증하면 되는 것”이라고 정리했던 것이다.

준비기일에서 이미 다뤘던 쟁점인데 특검만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준비기일에서 오고 간 내용들이 특검에게 보고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증인으로 나선 전·현직 삼성 임직원들은 특검의 질문엔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을 ‘모범답안’으로 들고 나왔다. 반면 변호인들의 질문엔 마치 엊그제 일인 양 고심할 것도 없다는 듯 “그렇다”는 대답을 쏟아냈다. 허태학·박노빈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의 재판을 통해 이미 예상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특검은 변호인과 삼성 쪽 증인들에게 무기력하기만 했다. ‘비서실의 지시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 채택된 증인들에게 특검과 특검보들은 다짜고짜 “비서실, 구조본의 지시로 사채를 발행하고 실권한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증인들이 “아닙니다”라고만 하면 유죄 입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오히려 특검 쪽은 “삼성 쪽의 비협조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못했다”는 말을 너무 자주, 별 문제 없다는 듯 했다.
피고인들의 형량을 판단하기 위해 양형증인을 신청하라는 재판부의 권유에도 특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판부가 직권으로 특검의 공소사실을 보강해줄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는데, 특검은 김 소장과 법리를 다투기도 했다. 또 ‘차명주식을 거래하는 데 내부자 정보를 이용했을지도 모르니 한번 입증해보지 않겠냐’ ‘양형자료로 삼지 않겠냐’는 재판부의 제안에 조대환(52) 특검보는 “특검팀의 인력과 시간이 부족해 밝혀내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만 말했다. 재판부는 물론이고 처음 의혹을 제기한 김용철 변호사나 시민단체들도 차명 재산의 출처 의혹을 제기했지만 특검은 이를 수사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 수사를 못했다”는 특검은 지난 4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검찰에 추가 수사도 의뢰하지 않았다.
7월10일. 피고인들에 대해 조준웅 특검이 구형 의견을 읽었다. “그동안 삼성은 성역처럼 인식됐다. 총수 일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조직적 불법 행위를 저질렀고 이제 어떤 조직도 불법은 용납될 수 없다. …‘경영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에 일부 수긍하는 점이 있고,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을 참작해….”
재판 중에도 다른 사건 변론
‘국가경제에 기여한 점을 참작해’ 조 특검은 이건희 전 회장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공판을 최소화해 피고인들의 짐을 덜어준 특검은 결국 피고인들의 양형에 유리한 사유를 구형의견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공판을 마쳤다. 구형량이 적다는 비판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이 전 회장을 불구속 기소한 이상 7년을 넘어서는 중형을 구형한다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말했다. “변호인들이 해야 할 ‘경제에 기여했다’는 변론을 특검이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도 했다.
특검과 특검보들은 7월16일 선고공판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같은 시각 다른 수임 사건을 변론하고 있었다. 특검보들은 삼성 재판 중에도 쉬지 않고 자신들의 본업인 변호사 업무를 병행했다. 이건희 전 회장 등에게 대부분의 혐의를 무죄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민병훈)는 무죄 판단의 결정적인 대목마다 “특검의 입증이 부족했다”는 말을 끼워넣었다.
김상조 교수는 판결 직후 “특검은 수사기간 동안 삼성 쪽 변호인들의 알량한 항변조차 물리치지 못할 정도로 부실한 수사를 했고, 공판에서 재판부를 설득하지 못했다”며 “이번 판결은 재판부의 무지와 특검의 책무 방기가 겹쳐진 참극”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시각 조준웅 특검은 “법원의 판단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며 “공소장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항소해 사실관계 판단, 법리적 판단을 모두 철저히 다투겠다”고 발끈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 공언대로 항소장을 제출했다. 특검과 3명의 특검보들은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삼성 변호인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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