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와 유머 vs 논리와 토론… 보수언론의 ‘대립’ 보도와 달리 사이버 광장은 진화 중
▣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아고라와 디시가 동지에서 적으로 바뀌었다고?’
6월12일, 다음 아고라(agora.daum.net) 베스트에 오른 글이다. 글쓴이는 자신을 디시인사이드(dcinside.com)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이디 ‘네이트폐인’이라고 소개했다. 5300여 명이 추천한 장문의 글은 ‘의 괴상한 기사에 휘둘려 흥분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문제가 된 기사는 6월11일치 ‘촛불집회 인터넷 토론방끼리 설전’이다. 기사는 “한때 인터넷 토론문화를 이끌었던 디시인사이드와 현재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 사이에 심각한 대립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디시에선 아고라 이용자들에게 ‘좀비’란 별명을 붙이고, 아고라에선 디시 유저들을 ‘알바’라 부른다”고 보도했다.
“휘말려 싸우지 맙시다” 성숙한 분위기
이에 ‘디시폐인’과 ‘아고리언’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서로를 비난하고 흥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디시폐인이 아고라에 허심탄회한 장문의 글을 올렸고 아고리언들은 추천으로 화답했다. 아이디 ‘검객’ 등 여러 명이 “6월10일 대규모 집회 이후 보수언론이 적극적인 반론보다 서로 갈등을 유발하고 틈새를 노리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같은 날, 디시인사이드에도 ‘아고라인’이라는 이름으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란 글이 올라왔다. 물론 아고리언과 디시폐인을 자극하는 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런 글은 쏟아지는 게시물에 밀려 ‘곧 지나가고’ 말 뿐이다.
이 모습은 자정작용을 지니게 된 사이버 토론광장의 성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정적 집단’으로 매도돼온 네티즌들이 신뢰할 수 있는 토론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이버 광장 문화가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디시폐인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주제별로 개설돼 있는 1천여 개의 ‘갤러리’다. 이곳에 주제와 관련된 사진을 올리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기본 방식이다. 특유의 과감한 패러디와 사진 합성 등의 기술에 나름대로 역사성 있게 발전시켜온 디시폐인만의 언어와 대화 방식이 합쳐져 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왔다. 갤러리는 개인이 직접 개설할 수는 없고 네티즌들이 신청을 하면 김유식 대표 등 회사 쪽의 판단에 따라 개설된다. ‘촛불문화제 갤러리’가 6월4일에서야 생긴 것도 이런 구조 때문이다.
다음 아고라의 메뉴 구성은 좀더 정치적이다. 정치·경제부터 종교·제품까지 토론하는 ‘토론’, 유머부터 고민까지 나누는 ‘이야기 즐보드’, 이슈청원·모금청원·추모서명 등 ‘청원’이 대표적이다. 메뉴 마지막엔 문화방송 도 똬리를 틀고 있다. 각 코너에 들어가면 ‘베스트’ 글이 가장 전면에 배치된다. 댓글로 울고 웃기는 디시폐인과 달리 아고리언들에게는 진지한 ‘추천/반대’가 더 중요하다.
1999년 문을 연 디시인사이드는 2002년 월드컵, 2004년 탄핵 정국을 거치며 주목받았다. 2004년 대통령 탄핵 발의 이후 촛불집회에는 디시폐인들이 자신들의 상징인 ‘개죽이’ 깃발을 들고 나왔다. 이후 “탄핵을 심판하자”는 구호로 총선 투표를 독려하며 기존의 ‘솔로부대’ 패러디를 다시 패러디한 ‘투표부대’를 내놨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각국의 참전 독려 포스터에 ‘우리는 무적의 투표부대이다. 총선일에 놀러가는 짓은 우리에게 사치일 뿐이다’등의 문구를 합성했다.
디시폐인들은 2008년 촛불문화제에는 ‘우리는 무적의 김밥부대다’란 구호를 들고 나왔다. ‘김밥부대’를 최초로 제안한 아이디 ‘독신녀’는 현재 방송작가로 활동 중인 김진경(30)씨다. 그는 “디시에 몇 안 되는 ‘청정·개념갤’이라 자평할 만한 ‘음식-기타 갤러리’를 믿고 제안을 올렸다”고 말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5월26일부터 닷새 만에 318만원이 모였다. 6월1일 새벽, 김밥 1700줄과 생수를 촛불문화제 현장에 공수한 뒤 2차 모금에 돌입했다. 이번엔 닷새간 5700만원이 모였다. 6월10일, 김밥 1만 줄·생수 9천 병·초코바 5천 개를 들고 현장에 나갈 때는 ‘라이더스 갤’ 사람들이 스쿠터로 배달을 도왔다. 현장에서 ‘진중권갤’과 ‘이명박갤’ 사람들도 만났다. 디시인들은 이렇게 각자의 갤러리 깃발 아래 모였다.
김진경씨는 “의사건 변호사건 디시에 들어오면 무조건 디시폐인이 돼버린다는 얘기가 있다. 2001년부터 디시폐인으로 지내다 보니 이제는 좀 훈훈한 갤을 찾게 된다”고 했다. ‘김밥부대’가 이슈가 되면서 ‘음식-기타 갤’에 악플러 등 불청객이 몰려들 수도 있지만 금세 다시 청정해질 거라 믿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무적의 김밥부대’ vs ‘명박퇴진’ 말머리
각기 다른 ‘갤러리’ 깃발을 들고 나온 디시인사이드와 달리 아고라의 깃발은 ‘아고라’ 하나다. 하지만 깃발마다 ‘아고라’라고 쓴 글자체나 깃발 모양, 따라붙는 글귀까지 천차만별이다. 아고리안들이 저마다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심 없는 자발적 네티즌 조직 아고라의 특징이다.
아고라에서는 6월8일부터 소리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게시판 내의 이른바 ‘알바’ 색출하기 전쟁이다. 아이디 ‘늘푸르름’이 “촛불문화제와 아고리언을 비난하는 글을 반복해서 올리는 ‘알바’를 잡기 위해 말머리로 ‘명박퇴진’을 달자”는 제안을 했고 아고리언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명박퇴진’을 붙이지 못하거나 변형해 붙이는 일부 ‘악성 게시자’들을 보며 아고리언들은 박수를 쳤다.
하지만 곧 “‘명박퇴진’을 글 앞에 붙이지 않으면 ‘프락치’로 간주하는 행동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란 비판에 부딪혔다. 아고라 토론방에서는 ‘명박퇴진’ 말머리와 관련한 토론이 며칠째 계속됐고, 아고리언들은 이 과정에서 분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아고리언 오승용(28)씨는 “최근 아고라의 자정작용은 놀랍도록 뛰어나다. 뉴스 업데이트는 한정돼 있고 신뢰할 수 없는 매체도 많다 보니, 실시간으로 의견과 정보가 오가는 아고라 공간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글은 거의 올리지 않지만 하루 6시간 이상 아고라에 접속한다. 문화방송 을 시청할 때도 아고라에 접속해 TV와 컴퓨터를 동시에 본다.
촛불문화제 전면에 나선 아고리언 배성용(29)씨는 “아고라는 나에게 학습의 장이었다”며 “특히 의견을 조율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한때 그는 아고라를 떠나겠다는 글도 올렸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대열을 이끌면서 생긴 이견을 조율하기 버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아고리언들의 권유로 다시 6월10일 대오에 결합했다. 그렇게 아고라는 그에게 세상을 만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세상에 냉소적이었다”는 임상훈(25)씨는 원래 ‘디시폐인’이었다. “예전엔 뭔가 정치적 발언을 하면 ‘너 잘났다’ 식의 반응이었는데 지금 아고라에서는 얘기를 하면 토론이 돼서” 지난 5월부터 아고리언이 됐다. 현재 분당에 거주하며 분당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서울 촛불집회장으로 퇴근하고 집회장에서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나중에 아들이 ‘그때 아빤 어디 있었냐’고 물으면 ‘나도 (미국산 쇠고기를) 막았다’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순위 놀이’와 진지한 댓글이 어우러져
촛불의 행렬이 길어질수록 디시폐인과 아고리언들의 토론도 깊어진다. 하지만 디시폐인들은 아무리 엄숙한 게시물 앞에서도 ‘순위 놀이’와 ‘성지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아고리언은 ‘스크롤 압박’인 장문의 글과 댓글에 지칠 법도 하건만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 그곳엔 토론에 갈증을 느껴 찾아온 시민들이 있고, ‘찍어내는’ 기사와 ‘정치적인’ 구호에 ‘쩐다’는 ‘센스쟁이’들이 있다. 인터넷 토론방은 서울의 광장보다 먼저 울고, 먼저 일어나고 있다. <hr>
◎ 아직 이런 용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1. 디시폐인: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네티즌
2. 아고리언: 다음 아고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네티즌
3. 갤: ‘갤러리’의 준말
4. 개죽이(사진)
5. 청정갤·개념갤: 갤러리의 취지와 목적에 맞는 글을 올리는 이가 많은 갤러리
6. 순위놀이: 댓글을 단 순서대로 순위를 정하는 행위
7. 성지순례: 사건의 진원지나 논란이 되는 게시물을 찾아 보고 간다는 의미
8. 쩐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단하다,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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