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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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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그러나 무서운 물결

등록 2008-06-06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현재 상황은 다중보다는 ‘흐름으로서의 대중’으로 봐야… 이들을 격발시킨다면 어떤 사태가 올 것인가</font>

▣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font color="#C12D84">[표지이야기 1부-타오르는 촛불] </font>

이명박 정부 출범 두 달 만에 시작된 촛불시위가 새로운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비판의 대상은 쇠고기 문제에서 모든 문제로 확대됐고, 시위 대중 또한 모든 세대로 확대됐다. 시위의 양상도 가두시위가 시작되며 크게 바뀌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점차 전통적인 시위 형태로 변해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시위대의 움직임은 이전의 양상과 많이 다르다. 집회는 시종일관 밝고 즐거운 분위기여서 전투적인 치열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결코 비장하지 않으며, 정권에 대한 비판은 가볍고 유쾌하다. 중고생부터 이른바 ‘386세대’, 직장인들, 심지어 그토록 무관심하던 대학생들까지 포함해 서로 섞이며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다중은 일상적 상태의 시민

가두시위의 양상조차 이전과 아주 다르다. 경찰과 전투적으로 대결하기보다는 경찰 앞에서 돌아서버리고, 경찰 없는 곳으로 우회하며 행진한다. 행진하는 사람 자신도 어디로 어떻게 갈지 예측할 수 없기에 전체 흐름은 전혀 예측 불가능한 흐름이 되었다. 나아가 카메라를 손에 든 대중들이 무선전화와 인터넷으로 연결돼 자신이 있는 상황을 다른 곳에 전달하고 다른 곳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움직이고 있다. 또 하나, 대중들이 경찰이나 체포에 대한 공포를 가볍게 넘어버렸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주동자를 조사하겠다고 하면, 경찰서 홈페이지로 달려가 “내가 주동했으니 나도 구속하라”고 대들고, 현장에서 연행하려 하면 자진해서 잡혀간다는 것이다.

공포를 ‘상실’한 채 신경망과 같은 네트워크로 연결돼 유연하게 움직이는 대중, 특정한 지도부가 없고 모두 ‘지도자’가 되어버린 대중,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그 이질성이 충돌하며 방해하는 게 아니라 서로 결합하며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창안하는 대중, 그리고 가볍고 즐겁게 싸우는 대중, 이 새로운 양상의 대중이, 박정희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그 시대의 감각으로 기업 운영하듯 작동하는 정부를 겨냥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양상의 대중을 서구의 진보학자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다중’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들이 말하는 ‘다중’은 모든 성분이 뒤섞여 회색의 무차별적 집단이 되는 대중과 대비되는 개념이면서도, 또한 다양한 생산의 주체를 포함하는 개방적 집단이란 점에서 계급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또 무수한 내적 차이로 구성돼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 민중과도 대비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이라고 불리는 주권 아래 생존하고 있는 ‘시민’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즉 일상적인 상태에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조직돼 살아가는 ‘제국의 주민’ 전체를 지칭하는 일반적 개념이다. 따라서 결코 일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지금의 시위 대중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대중이란 모든 차이가 지워진 무차별적 집합체라는 생각만 버린다면, 오히려 ‘흐름으로서의 대중’이란 개념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더욱 적절해 보인다. 대중이 무차별적으로 보이는 것은 주어진 일상적 지위나 소속, 신원이나 이름에서 이탈하며 만들어지는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머물 광장이 있으면 머물고, 길이 있으면 흘러가고, 벽(경찰!)이 있으면 우회하거나 흘러넘치고, 거스르며 덤비면 싸우며 돌파하는 흐름, 그것이 대중이다. 따라서 이는 지위와 소속에 의해 정의되는 계급이나 ‘신분’(학생, 직장인, 주부…)과 다르다.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지위나 소속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대중이 된다.

지위나 이름을 지우면서 이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것은 어떤 감응의 전염이다. 때로는 분노가 전염되기도 하고 때론 기쁨이, 때론 애도가, 때로는 격정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분자적으로 전염되면서 참여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나 지위나 소속이 지워지고 하나의 감응에 의해 하나로 묶인다고 해서, 그들이 갖는 차이가 지워져 ‘무차별한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이나 지위, 소속에 묶여 드러나지 못하던 개인들의 능력이 특정한 상황마다 새로이 솟아나며 대중의 움직임을 규정하고 인도한다. 그렇기에 지위나 명망과 상관없이 누구나 능력과 활동에 따라 지도자가 될 수 있고, 그렇기에 누구나 “내가 주동자다”라고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됐는가 하는 것이 대중 흐름의 양상을 크게 규정한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가에 따라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카오스이론의 어법을 빌려 말하면, 대중이란 ‘초기 조건에 민감한’ 흐름이다. 1980년의 광주항쟁처럼 폭력적 권력과의 전투적 충돌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면 대중은 격렬한 전투적 파도가 될 것이고, 지금처럼 중고생의 집회로 시작됐다면 유쾌하고 가벼운 물결이 될 것이다. 이른바 ‘386세대’가 끼어들었지만 돌을 들고 경찰과 충돌하는 예전의 시위 형태를 반복하지 않는 것은 이런 초기 조건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간의 흐름과 다른 이 이질적 요소의 새로운 참여는 그간의 흐름에 적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추가되는 요소들의 이질성이 흐름에 미세한, 혹은 작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어떤 사건, 가령 누군가 강경 진압으로 크게 다치거나 하는 사건이 하나 끼어들게 되면, 캘리포니아에 폭풍을 만들어낸다는 그 유명한 ‘베이징의 나비’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전변을 만들어낼 것이다.

두려움 없는 대중의 힘이란…

더욱이 경찰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대중, 정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경멸하고 웃음거리로 삼는 대중의 힘이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을 대중에서 분리시키는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 대중은 어떤 벽도 넘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네트워크와 분자적 미디어의 신경망으로 연결됐을 때, 대중은 집합적 지성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집합적 신체가 된다. 흐름을 대중 자신이 조절할 가능성이 생기고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아마도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라면 지금 혁명적 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할지도 모른다. 이미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적 위기가 한국 경제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고, 대중은 공포마저 잃은 채 복종을 거부하며 싸우고 있고, 여기에 지배계급의 동요가 더해진다면, 그가 제시한 세 가지 기준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현재의 상황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의 흐름이 전투적이라기보다는 가볍고 즐겁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정부로 하여금 대중을 격발하는 발언과 조처를 계속하게 하고 있다. 이는 이후 정말 예측하지 못한 사태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나는 얼마 전 “이젠 이명박 정부 이후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거 아닌가?”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이게 농담인 것은 내가 그런 문제를 고민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만, 누군가는 어쩌면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시작해야 할 때가 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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