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공공서비스를 흔드는 신호탄

등록 2008-02-22 00:00 수정 2020-05-03 04:25

국민의 생명을 시장에 맡기는 정부의 물산업지원법…다국적 물기업의 국내 진입 불가피

▣ 백명수 수돗물시민회의 사무국장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정부는 지난해 7월 ‘물산업 육성 5개년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물은 더 이상 공공재가 아닌 경제재이며, 먹는 물을 공급하는 ‘공공수도 사업’을 ‘물산업’으로 규정하겠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상수도 공급 주체를 지방자치단체에서 물 전문기업으로 바꾸고, 물산업 육성을 위한 여건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을 뼈대로 한 ‘물산업지원법’(가칭)을 만들어 올 상반기에 입법예고할 계획이다.

수도사업에 대한 사회적 합의 깨지나

물산업지원법은 국가 음용수의 상품화와 물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민간 전문기업 육성을 통해 ‘봉이 김선달’을 합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수도법’과 ‘먹는물관리법’으로 관리돼온 물이라는 공공재가 물산업지원법으로 국민의 통제를 벗어나 사기업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수도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먹는 물 양극화다. 대도시 지역은 수도 보급률이 거의 100%에 이르지만, 면 단위의 농어촌 지역은 37%대에 불과하다. 또 대도시 지역은 수도사업에 수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지만 중소 도시의 사정은 다르다. 수돗물의 수질관리에서 지역 간 격차가 발생하고 있으며, 수도요금의 격차도 매우 크다. 하루에 수돗물을 5만t 이상 생산하는 정수장은 바이러스 수준까지 점검받고 있지만 그 이하의 정수장들은 대체로 관리가 열악하다. 우리나라 650여 개의 정수장 가운데 70%가 넘는 480여 개가 하루 시설용량 5만t 이하다.

농어촌의 먹는 물 실정은 더 심각하다.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의 5%에 해당하는 약 250만 명의 농어촌 지역 주민들이 소독시설이나 여과시설이 미흡한 마을 상수도를 이용한다. 섬 지역 주민들은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미 설치된 해수 담수화 시설도 비싼 요금 때문에 이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정부는 우리나라 수도사업의 문제로 낮은 전문성으로 인한 비효율성을 꼽는다. 수도사업자인 지자체가 감시와 생산 기능을 모두 맡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부가 제시하는 것은 전문 수도사업자 양성이다. 전문 수도사업자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키워야 하고, 시장을 키우려면 민영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누구나 값싸고 믿을 수 있는 물을 마시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국민의 세금이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수도사업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라는 사회적 합의를 유지해왔다.

민간위탁, 사회적 갈등 유발

일부에서는 수돗물에는 이미 수도요금이 부과되고 있는데 물의 상품화에 대한 논의는 새삼스럽기까지 하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수도요금을 내고 있으니 수돗물이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몇 명이나 있을까? 국민들은 물과 같이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공공재는 국가가 무상으로 공급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 기본 비용 정도의 부담을 상수도 요금 형태로 지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수도요금은 공적 서비스에 대한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최소한의 약속인 셈이다. 수돗물 생산에 드는 원가가 수도요금보다 높은 지자체의 경우 다른 예산으로 이를 보조해 수도요금을 낮추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부의 수돗물 생산원가에 맞추어 수도요금을 인상해야 한다는 수도요금의 합리화 주장은 부분을 왜곡해 만든 결과다.

물산업지원법은 헌법 제34조와 제35조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사회 공공서비스를 흔드는 신호탄이다. 정부는 이 법을 만들어 민간이 물에 가격을 매기고 장사하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전문 수도사업자 육성을 지원하고, 수도요금 합리화로 전문 수도사업자에게 이윤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물산업지원법으로 물이 사회적 통제를 벗어나 국민의 생명을 파는 행위로 귀결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 정부는 이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고, 세계적인 다국적 물기업을 보유한 유럽연합(EU)과 FTA를 논의하고 있다. 국가가 물 공급을 독점하지 않고 민간에 맡겨 사적 공급을 허용할 경우 다국적 물기업의 국내 진출이 불가피해진다.

물산업지원법으로 ‘품질 높고 저렴한 수도 공급’을 기대하기 힘들다. 논산·정읍 등 11개 지자체는 20~30년간의 장기 위탁계약으로 상수도 관리 업무를 한국수자원공사 쪽에 넘겼다. 그동안의 무관심으로 열악해진 수도사업에 대한 책임을 시장에 떠넘긴 셈이다. 수도사업 개선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현 수도사업의 참담한 결과에 대한 분명한 평가가 선행돼야 한다.

정부는 자신의 실패를 떠넘기나

현재 진행되는 민간위탁은 우리나라 수도사업의 근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소외 지역의 수도 보급률 확대, 수돗물 불신 문제의 해결은 요전히 요원하다. 그런데도 물산업지원법은 민간위탁자의 폭을 크게 넓히는 구조개편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강제할 수단으로 지방교부세를 사용하려 하고 있다. 능력이 안 되면 민간에 넘기라는 주문이다.

정부는 왜 물산업지원법을 주장하는가. 정부는 자신의 실패를 외면하고, 수도사업을 민간에 떠넘기는 것으로 책임을 모면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환경부는 자신의 기능과 역할에 어울리지도 않는 부서를 만들고, 그 부서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법까지 만들려 하고 있으며, 세밀한 검토도 없이 물산업을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부풀려 왜곡하고 있다. 이로 인해 먹는 물 문제는 오히려 더욱 참담한 상황에 몰릴 수 있다.

물산업지원법 제정 계획은 지금이라도 즉시 폐기해야 한다. 대신 물산업지원법에서도 적시하고 있는 중앙수도위원회와 같이 전국의 수도사업을 단일하게 관장할 수 있는 부처의 신설이나 농어촌 지역에 상수도를 보급해줄 수 있는 특별법 제정, 모든 국민이 골고루 물을 공급받을 권리를 명시하는 물공급기본법 등의 제정으로 정책 방향을 돌려야 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