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등록 2008-02-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에 아노미 상태에 빠진 학생과 일선 교사와 학부모들

▣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여기는 한국이고, 미국도 아닌데 왜 다들 ‘영어’ ‘영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영어는 중간이고, 다른 과목은 잘하는데 영어 못하면 공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싫어요.”

“이러다 대학 못 갈 것 같아요. 자꾸 이러면 이민 가고 싶다고 이명박 대통령께 전해주세요.”

쾌재 부르는 사교육 시장

1월29일 오후 6시 서울 풍납동 영어마을 식당.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는 14살 아이들이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의 ‘영어 정책’에 대해 묻자 아이들이 와글와글 소리쳤다. ‘대학 가기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걱정부터 ‘점점 우리말이 사라지는 것 같다’는 두려움까지 ‘영어교육’의 당사자인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필수’가 돼버린 영어에 대고 ‘으악!’ 비명을 질렀다.

대한민국은 이미 영어공화국이다. 국내 영어 사교육 시장 규모는 영어학원·어학연수·유학을 포함해 15조원으로 평가된다(삼성경제연구소·2006년). 국내 조기 유학생 수는 해마다 늘어 2001년 7944명에서 2005년 2만400명으로 5년 사이에 2.6배로 늘었다(한국관광공사·2006년).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는 “정부는 영어 조기교육 도입을 주도하고 지자체마다 준비 없이 영어타운 만들기에 나서고 대학은 영어 전용 기숙사를 앞다투어 짓는” 등 사회 전체가 “영어에 과잉 몰두하고 있다”고 (당대 펴냄)에서 지적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을 내놓은 이유는 ‘사교육 감소’와 ‘전 국민의 영어 생활화’ 두 가지다. 그러나 이 정책이 나오자마자 사교육 시장은 ‘쾌재’를 부르는 모습이다. 서울·경기 12개 지역에 분원을 두고 있는 한 영어전문학원 해외마케팅 담당자는 “이명박 당선자의 ‘영어 과외 안 받아도 대학 가게 하겠다’는 발언이 있은 직후부터 학부모들의 문의 전화가 쏟아진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은 이미 방학 기간 어학연수 프로그램 신청이 끝난 상태여서 문의 전화가 올 시점이 아닌데도 하루 수십 통씩 어학연수 관련 문의가 온다”고 덧붙였다. 이 학원은 이런 수요에 맞춰 4월 중순에 3개월 코스로 떠나는 단기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긴급히 새로 편성했다. 발빠른 학원들은 아이들이 집에서도 ‘영어 대화’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학부모를 교육하는 ‘학부모반’을 신설했고, 토론 과정도 새로 만들어 ‘말하기’ 수요에 대비하고 있다.

서울 강남 대치동에는 서너 해 전부터 ‘미국 초등학교’가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연수를 대비한 수요 때문이기도 하고, 차별화된 사교육을 노린 학원의 기획 상품이기도 하다. 이들은 미국 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사회·과학·국어(문학) 교과서를 들여와 원어민 강사를 통해 100% 영어로 1년간 수업을 한다. 이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는 주부 이아무개(42)씨는 “우리 아이들은 미국 초등학교와 한국 초등학교, 두 개의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며 “우리 아이들이 겪는 문제는 학원에서 배우는 영어에 비해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수준이 너무 떨어져 아이 스스로 ‘영어 격차’를 느낀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어차피 우리 아이의 목표는 청심국제중, 민족사관고 같은 특목중·고이기 때문에 학교 교육과는 관계없이 계속해서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치원·초등학생 대상 영어전문학원인 ㅇ학원 이아무개 원장은 “학교에서 읽기·듣기만 요구했다면 이제 말하기·쓰기까지 요구하므로 필요한 영어 능력이 더 많아져서 사교육 시장은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공포를 느끼는 지방 학무모들

학원들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학부모들은 학원을 입맛에 따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들을 둔 주부 신아무개(38·서울 광장동)씨는 지난 1월31일 서울 대치동 ㅈ어학원을 찾았다. ‘영어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의 발표를 듣고서다. “아이가 지난해 1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어요. 한국에 와서 영어와 한국어를 반씩 쓰는 학원에 다니는데, 1년 동안 미국에 살았어도 그래머(문법)를 영어로 수업하는 것은 답답해하고 힘들어하더라고요. 나중에 학교 영어 수업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 안 되니까, 100% 영어 강의하는 학원으로 바꿔줘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좀 힘들어도 그게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신씨는 “영어는 ‘얼마나 노출되느냐’가 관건인데 영어가 이렇게 중요해지는 마당에 사교육을 더 시켜야지, 덜 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 학부모들이 ‘선택’을 고민할 때 지방 학부모들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경북 영주에서 중학생 대상 종합학원을 운영하는 박유락(45) 원장은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이기도 하다. 박 원장은 “지금 당장 영어로 수업하라고 하면 수업할 수 있는 선생님이 지방에는 거의 없다”며 “우리 아이들 가르칠 일도 그렇지만, 당장은 영어 강의를 할 선생님을 어떻게 조달할지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지방 영어교육도 서울처럼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탁상공론인데, 뚜렷한 실현 방안 없이 무조건 ‘한다’고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이를 둔 주부 김정순(경북 상주)씨는 “서울에는 학교든 학원이든 실력 좋은 선생님들이 많지만 지방은 그렇지 않다”며 “어릴 때야 문제가 안 되지만, 점차 아이들의 실력차가 커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자녀를 둔 이아무개(45·충북 예산)씨도 “영어가 중요해지고, 아이들이 모두 영어를 우리말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 부모로서 엄청난 부담”이라며 “가만히 있다가는 모두 이류 인생 되는 거 아니냐”며 조바심을 냈다.

이미 ‘영어 계층화’는 ‘부모의 부’를 바탕으로 뚜렷해지고 있다. 서울교육통계(2007년 4월1일 기준)를 보면 서울시 강남·서초구에서 1년간 이민·유학을 간 초등학생 수는 1108명인 데 견줘 동대문·중랑구에서는 178명의 아이들만 이민·유학을 갔다. 10배가량 차이가 난다. 방학을 이용한 단기 어학연수 학생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라, 그 수까지 합하면 격차는 더 커진다. 한 어학전문학원 해외마케팅 담당자는 “어학연수 프로그램 이용 학생의 80%가 강남·분당·목동에 사는 학생들”이라며 “부모의 소득 수준이 어학연수 기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떠난 아이들은 6개월 이상 장기간 ‘영어 환경’에 노출돼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그런 자신감을 안고 돌아와 다시 차별화된 고급 사교육을 받는다”고 말했다.

김봉천 서울시 영어마을사업본부장은 “영어마을은 매년 10억원의 지원을 받아 기초생활보호수급자 가정의 초등학생 5천여 명을 정규 프로그램에 무료로 초청하는데, 이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교 4~6학년인데도 알파벳이나 기본적인 인사법을 모르는 아이들이 있어 외국인을 보면 도망가기 바쁘다”며 “영어 실력이 가계 소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말했다. 하재근 ‘학벌 없는 사회’ 사무처장은 “당장 2년 뒤부터 내 아이가 학교에서 영어로 영어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데, 학원으로 달려가지 않을 학부모가 어디 있겠냐”며 “이번 정책은 이런 계층 격차를 공고히 해 국가가 가난한 집 아이들을 합법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영어 공교육까지 흔들어

일선 교사들은 “너무 급박하게 내놓은 ‘영어 공교육 완성안’이 기존 영어 공교육 체계까지 뒤흔든다”라는 비판도 내놓고 있다. 실제로 대통령직 인수위가 지난 1월30일 공청회에서 발표한 정책들은 참여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가 그간 ‘공교육에서 실용 영어교육 강화’를 기치로 내걸고 하나씩 진행해오던 것들이다. 차이점은 시행 시기뿐이다. 교육부는 2006년 11월17일 ‘국민 영어 역량 제고를 위한 영어교육 혁신방안’을 내놓으며 “2010년 이후부터 단계적으로 모든 영어 교사가 영어로 수업이 가능하도록 영어 교사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수위가 수능을 대체하겠다고 내놓은 ‘국가 영어능력 평가시험’도 교육부가 지난해 7월부터 추진해오던 것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7월 토익·텝스 등을 대신할 국가 영어시험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2009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범실시를 하고, 2011년에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시범실시한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던 이 시험이 갑자기 ‘수능 대체 시험’으로 포장만 달리해 등장했다. 결국 교육부가 2005년 2월 ‘영어능력평가팀’을 신설하고 ‘영어 실용 교육 강화’를 부처의 큰 목표로 세운 뒤 차근차근 진행해오던 것을 인수위원회가 한 달 만에 ‘가속 페달’을 밟아 시행 시기를 대폭 앞당긴 셈이다.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학년 자녀를 둔 주부 김아무개(40)씨는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영어로 할 말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말할 거리’, 즉 지식과 교양도 함께 쌓아주는 교육이 중요한데, 이번 이명박 정부의 영어 정책은 그런 성찰은 빠져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강북 지역의 한 영어 교사는 “주변 교사들이 영어교육 전문가가 배제된 인수위 영어정책팀은 ‘무식해서 용감한 것 같다’고들 얘기한다”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돈 있는 학부모들은 사교육 시장으로 내달리고, 돈 없는 학부모들은 걱정과 공포에 빠져 있다. 사교육 시장은 웃고, 아이들은 아우성이다. 이미 만들어진 영어 카스트는 더 단단해질 공산이 크다. 이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은 누구를 위한 정책일까. 웃는 자는 누구일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