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경제규모 200위 안에 든 국가 61개, 기업 139개… 미국은 관료와 기업인의 구분 무의미해져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코포크라시.’ 기업이 정부를 압도하는 건 일국적 현상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 그것은 분명 지구적 현상이다. 어제오늘 시작된 일도 아니다. 일찍이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와 기업(코포레이트)의 힘을 합병한 게 파시즘이다. 코포라티즘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말한 바 있다. 문제는 정부에 대한 기업의 지배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 GDP와 기업 매출액 지표로[%%IMAGE4%%]
지난 2000년 12월 미국 워싱턴의 진보적 연구단체 ‘정책연구소’(IPS)는 세계 각국의 국내총생산(GDP)과 거대 다국적 기업의 연간 매출액을 비교·분석한 ‘톱 200-기업의 세계적 지배력 확대’란 제목의 17쪽짜리 보고서를 펴냈다. 한 국가에서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시장가치를 합한 수치인 GDP는, 한 기업이 한 해 동안 생산해 판매한 재화와 용역의 시장가치를 합한 매출액에 견줄 만하다. 이 단체는 보고서에서 “세계 200대 기업의 전체 매출액을 합치면, GDP 규모 상위 10대 부국을 뺀 나머지 전세계 국가의 GDP를 합친 금액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이어 “200대 기업의 매출총액은 전세계 인구의 24%에 이르는 12억 빈곤층의 연수입의 18배에 이르는 규모”라고 덧붙였다. 기업이 가진 ‘힘’의 실체를 가늠하게 해준다.
7년여가 흐른 지금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은 지난해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두 가지 자료를 토대로 현황을 점검해봤다. 기업과 개별 국가를 하나의 ‘법인체’로 상정하고, 기업의 매출액과 국가의 GDP를 지표로 삼아 ‘세계 200대 국가/기업 경제규모’ 순위를 매겨봤다. 기업의 매출액 통계는 경제주간지 이 지난해 7월14일 펴낸 ‘세계 500대 기업’의 2006년 현황 자료를 토대로 했다. 또 국가의 경제규모는 같은 해 7월1일 세계은행이 펴낸 ‘세계개발지표 데이터베이스’에 제시된 2006년 세계 183개국의 GDP 순위를 기준치로 삼았다.
기업의 매출액 순위부터 살펴보자. 의 자료를 보면, 매출액 기준으로 2006년 세계 최대기업은 다국적 유통업체 월마트였다. 이 업체의 2006년 매출액은 모두 3511억달러에 달했다. 거대 정유업체 엑손모빌(3472억달러)과 로열더치셸(3188억달러), 브리티시페트롤리엄(2743억달러)이 각각 그 뒤를 이었다. 자동차업체 제너럴모터스(2073억달러)가 5위, 도요타자동차(2047억달러)가 6위를 차지했고, 셰브론(2005억달러)·다임러크라이슬러(1901억달러)·코노코필립스(1724억달러)·토탈(1683억달러)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계 10대 거대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다음은 국가별 GDP 순위다.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세계 최대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국가는 단연 미국(13조2018억달러)이었다. 뒤를 이어 큰 격차를 보이며 일본(4조3401억달러)·독일(2조9066억달러)·중국(2조6680억달러)·영국(2조3450억달러)이 상위 5위 안에 들었고, 프랑스(2조2307억달러)·이탈리아(1조8447억달러)·캐나다(1조2514억달러)·스페인(1조2239억달러)·브라질(1조679억달러)이 각각 그 뒤를 따라 10대 경제대국에 포함됐다.
이제 매출액/GDP를 기준으로 상위 200위까지 순위를 매겨볼 차례다. 먼저 상위 1~21위까지는 모두 국가 일색이었고, 상위 30위에 이름을 올린 기업은 월마트(22위)를 포함해 모두 4개에 그쳤다. 하지만 순위표 아래로 내려갈수록 국가보다 기업이 부쩍 많아졌다. 상위 100위까지 이름을 올린 국가는 53개, 기업은 47개에 이르렀다.
101~200위까지를 보면 ‘기업 우위’는 더욱 현저해진다. 순위표에 등장한 국가는 쿠웨이트·카자흐스탄·방글라데시·베트남·모로코·슬로바키아·리비아·앙골라 등 8개국에 그쳤고, 나머지 92개는 모두 기업의 차지였다. 전체적으로 매출액/GDP로 산출한 ‘세계 200대 경제’에 꼽힌 국가는 61개에 그친 반면, 기업은 그 2배를 훌쩍 뛰어넘는 139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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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영향력 과도’ 압도적 응답
‘기업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월마트다. 이 회사의 2006년 매출총액(3511억달러)은 같은 해 세계은행이 집계한 국가별 GDP 순위 100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112억9600만달러)~183위(키리바시·7100만달러)까지 하위 84개국의 GDP 합계(3394억달러)를 넘어선다. 84개국이 1년 동안 생산한 재화와 용역이 일개 기업체의 연간 매출액을 넘지 못한 게다.
이런 현실은 지난 1월2일 캐나다의 대표적 여론조사 전문기관 ‘입소스 레이드’가 내놓은 설문조사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이 업체가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한국 등 전세계 22개국 2만2천 명을 상대로 ‘거대기업의 영향력과 정부와의 관계’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4명 가운데 3명꼴로 거대기업이 자국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답했다.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
입소스의 설문 결과, 조사 대상국 가운데 ‘기업의 영향력이 과도하다’는 답변이 가장 많이 나온 나라는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였다. 두 나라 모두 전체 응답자의 85%가 기업의 과도한 영향력을 우려했다. 브라질(84%)·미국(82%)이 그 뒤를 이었고, 캐나다와 독일에서도 각각 80%의 응답자가 우려를 표했다. 반면 일본과 폴란드에서는 각각 57%에 그쳤다.
‘거대기업의 활동을 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전체 응답자 10명 가운데 7명꼴로 나왔다. 기업의 과도한 영향력을 가장 우려한 아르헨티나에서 ‘규제론’이 가장 높은 찬성률(87%)을 보인 반면, 기업의 힘에 관대했던 일본에선 규제론에 대한 찬성률이 응답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2%로 나타났다. 또 전체 응답자 10명 가운데 7명(69%)꼴로 이미 ‘정부보다 기업의 힘이 세다’는 답변을 내놨다. 아르헨티나(85%)·프랑스(82%)·독일(80%) 등에서 이런 답변이 평균보다 많았으며, 미국·네덜란드·영국 등에서도 각각 70%의 응답자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일본과 싱가포르에선 각각 43%와 39%로 나타나, 기업보다 정부의 힘이 여전히 세다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제너럴모터스(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 지난 1952년 찰스 윌슨 제너럴모터스 당시 회장은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이 아니어도 기업의 정부 장악력이 가장 큰 나라로는 단연 연간 매출액이 1천억달러가 넘는 기업만 10개나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꼽힌다. ‘코포크라시’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찰스 더버 미 보스턴대 교수는 (김형주 옮김, 두리미디어 펴냄)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은 법인체들이 지배하는 체제다. 다국적 법인체들이 각당 소속 정치 엘리트들을 통해 정부를 통제한다. 법인체 체제는 법인체와 국가의 결합관계를 말한다. 이 결합관계에선 법인체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
더버 교수의 지적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면면을 살펴보면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부시 대통령 자신도 정계에 입문하기 전 텍사스주에서 정유업체와 프로야구단을 운영했고, 딕 체니 부통령은 백악관 입성 직전까지 다국적 에너지 업체 핼리버튼의 회장으로 일했다. 각부 부처 장관과 백악관 보좌진에도 기업체 경력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미 시민단체 ‘책임정치센터’(CRP)가 정치권과 업계의 유착관계를 추적한 자료를 모아놓은 ‘오픈시크릿’이란 사이트를 보면, 부시 행정부 각료 가운데 기업체 경력이 없는 인사는 그야말로 ‘예외’다.
과도한 영향력 동의, 규제는 반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다국적 정유업체 셰브론과 투자업체 찰스슈왑·트랜스아메리카 등지에서 이사로 일했다. 지난해 9월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퇴임한 마이크 조핸스 전 농무장관은 거대 농산물 가공업체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와 다국적 식품업체 크래프트, 그리고 타이슨과 콘에그라푸드 등의 중역을 두루 거쳤다. 칼로스 구티에레즈 상무장관은 다국적 식품업체 켈로그의 회장을 지냈고,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투자회사 피델리티와 거대 요식업체 브링커 인터내셔널에서 각각 이사로 재직했다.
또 새뮤얼 보드먼 에너지장관은 피델리티 자회사의 사장과 다국적 화학업체 카봇의 회장을 거쳤고, 알폰소 잭슨 주택·도시개발장관은 전력업체 아메리칸일렉트릭파워의 텍사스주 지사장을 지냈다. 이 밖에 일레인 차오 노동장관은 노스웨스트에어라인과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메리 피터스 교통장관은 컨설팅업체 HDR에서 각각 중역으로 일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과 조시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은 골드만삭스에서 각각 회장과 법무팀장을 거쳤다. 기업에서 일하다 공직에 나서고, 공직에서 물러나면 기업으로 복귀한다. 그야말로 ‘회전문’이다. 둘 사이의 구분은 어느새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기업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힘을 발휘할 때, 민주주의의 미래는 암울해진다.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권력이 우리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의 힘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머지않은 장래에 기업이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입소스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응답자 가운데 79%는 ‘기업이 정부의 정책결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부가 거대기업들의 활동을 좀더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답변은 전체 응답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7%에 그쳤다. 기업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이를 정부가 규제해선 안 된다는 응답이 높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쩌면 알아채지 못하는 새 우리는 이미 ‘기업지배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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