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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 삐걱삐걱 한나라당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BBK 먹구름에 손발 맞지 않는 대응, 박근혜 전 대표와 교감 이루어지지 않으며 내부 갈등도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짙은 먹구름에 갇힌 모습이다. BBK 사건의 실체가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한나라당이 술렁이고 있다. 이명박 후보의 자녀 위장취업 문제 등 갖은 악재가 꼬리를 잇고 있다.

이 후보가 자랑하던 ‘콘크리트 지지율’에도 균열이 생길 조짐이 보이고 있다. 가라앉는 여론조사 지지율을 반등시킬 만한 뚜렷한 호재가 없다 보니 곳곳에서 우왕좌왕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불발로 끝난 서울시당 집회의 속사정

정무에 밝은 한나라당 관계자는 “BBK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여전히 이명박, 김경준, 김백준 세 사람에 불과하다”며 “겉으로는 무조건 ‘(물증은) 위조’ ‘(김경준은) 사기꾼’을 외친다고 해도, 속으로는 검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한나라당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BBK 사건에 대한 대응만 보더라도 손발이 따로 놀고 있다. 검찰이 이 후보의 ‘친필 서명’을 요구하자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줄 수 없다”고 말했고, 이 후보는 몇 시간 뒤에 “안 해줄 이유가 없다”며 거꾸로 이야기했다.

무리한 주장도 속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 후보와 김경준씨가 만난 시점에 대한 한나라당의 입장 번복이다. 한나라당은 11월22일까지 이 후보가 김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초라고 고집했다. BBK 설립 시점인 1999년 초에는 국내에 있지도 않았고, 따라서 김씨와 접촉하지 않았다는 이 후보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은 “1999년 5월 미국에서 이 후보와 함께 지냈는데, 그 이후에는 이 후보가 한국에 들어간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주장은 김씨의 친누나인 에리카 김에 의해서 뒤집어졌다. 에리카 김은 11월22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이 후보와 동생 경준은 1999년 2~3월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처음 만났다”며 “이 후보의 여권 기록과 공항 출입 기록을 확인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한나라당은 “이 후보가 1999년에도 4~5차례 한국을 방문했다”며 말을 바꿨다.

11월21일부터 12월5일까지로 예정됐던 한나라당 서울시당 당원협의회(당협)별 집회도 서울시당과 당 지도부 간의 불협화음만 빚은 채 ‘불발’로 끝났다. 애초 공성진 한나라당 서울시당 위원장은 이 기간에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며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기로 했었다.

이 입수한 한나라당 대외비 문서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당협별로 최소 20명 이상의 당원을 동원해 정해진 일시에 집회에 참여”토록 했다. ‘김경준 관련 당협별 집회’라는 제목의 문서는 ‘친절하게도’ 다음의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선거법상 11월19일부터는 당원 집회가 안 되므로 각종 구국단체 및 대선 후보 팬클럽 등의 집회에 동참하는 형태로 시행’ ‘범여권의 공작정치 규탄 및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피켓 및 현수막 등을 당협별로 자체 제작하여 집회 참가(선거법상 이유로 당명 및 당협명 표기는 절대 금지)’.

한나라당 당원을 동원한 집회를 구국단체 집회로 ‘위장’해서 치르겠다는 의도를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이명박 후보를 향한 공성진 한나라당 서울시당의 ‘눈물겨운 충정’은 성사되지 못했다.

‘파랑새단’이 이회창 쪽에 둥지 틀어

한나라당 서울시당의 한 원외 당협위원장은 “행사 당일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행사 취소 소식을 들었다”며 “당 지도부에서 검찰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후보 본인이 가장 아프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은 이런 와중에 지지층 일부가 본격적인 이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신호탄을 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표였다. 박 전 대표는 11월21일 한나라당 창당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박 전 대표의 불참 소식을 놓고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했다. 행사장 곳곳에서 “박 전 대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이명박 후보가 주최한 행사도 아니고 당 창당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너무하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마침 이날 한나라당 관계자들에게 이명박 후보의 재신임을 촉구하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가 발송됐다. 발신자는 ‘747-×00×’로 표시됐다. 심지어 이날 기자와 함께 있던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핵심 측근 휴대전화에도 문제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박 전 대표의 한나라당 창당 행사 불참 직후 지난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박 전 대표를 도왔던 사람과 조직이 움직였다. 먼저 김용갑 의원은 11월23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명박 후보가 BBK 의혹에 대해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이 후보는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당당하게 밝히라”고 촉구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박 전 대표의 친위조직 ‘파랑새단’이 이회창 무소속 후보 쪽에 둥지를 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파랑새단은 경선 당시 박 전 대표 캠프에 몸담았던 이들 가운데 핵심 실무자 일부가 주축이 돼 만든 단체다.

강동훈 파랑새단 기획단장은 11월23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위장전입과 탈세, BBK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더 이상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이 부도덕한 이 후보의 볼모로 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 이회창 후보 지지에 나섰다”고 밝혔다.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이 박 전 대표와의 교감 아래에서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 전 대표 쪽에서는 “대표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파랑새단 쪽에서도 박 전 대표와 논의한 바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딱 걸렸네, 이재오와 정두언의 메모

그러나 드러난 현상만 놓고 보더라도 이미 이명박 후보는 큰 상처를 입었다는 지적이 많다. 중립 성향의 한나라당 관계자는 “경선이 끝난 뒤 이명박 후보가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였다”며 “하나가 BBK 사건 관리였다면 다른 하나는 박근혜 전 대표 ‘관리’였는데, 여전히 박 전 대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후보 쪽에서 이같은 지적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있을까. 이 인터넷 신문 을 통해 입수한 사진(사진 참조)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1월22일 열린 국회 본회의장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이날은 BBK 사건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문제의 사진에는 이 후보 쪽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과 정두언 의원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다. 사진에 나타난 두 사람은 한 메모를 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 메모를 확대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은 엉뚱하게도 ‘당 대표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 대표 문제’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메모는, 그 아래에 ‘창 공격 ×’ ‘박 대표 오히려 밀어낸다(10주년 불참)’ ‘강재섭 명의 임명장 수여’ ‘DR+서청원?’ ‘최고위원…’(볼펜에 가려서 안 보임) 등의 세부 내용을 담고 있다.

메모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전 최고위원과 정 의원이 강재섭 대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즉, 두 사람은 강 대표가 최근 이회창 후보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박근혜 전 대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강재섭 명의 임명장 수여’는 11월19일 강 대표가 대표 취임 이후 처음으로 7명의 대표 특보를 공식 임명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메모 내용을 접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쪽 관계자는 11월23일 과의 전화통화에서 “이 전 최고위원과 정 의원이 무슨 의도로 그같은 내용의 메모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BBK 사건에 당력을 집중해야 할 시기에 후보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두 사람이 강재섭 현 대표와의 당권 경쟁을 염두에 둔 듯한 메모나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하다”며 “얼마 전 ‘토의종군’(土衣從軍·흙 묻힐 각오로 몸을 낮춘다는 뜻)을 선언한 이 전 최고위원은 문제의 메모 내용에 대해 뭐라고 해명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차라리 수사 결과 빨리 나와라”

애초 대선 후보 등록 시점 직전에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던 검찰의 BBK 사건 중간 수사 결과 발표는 얼마간 늦춰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이미 ‘BBK 사건으로 인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하락-박근혜 전 대표 쪽 동요-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는 ‘BBK 도미노’ 현상이 시작된 듯한 양상이다.

BBK 먹구름에 갇힌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가 12월19일 이전까지 국면 전환을 맞을 수 있을까.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차라리 검찰의 수사 결과가 빨리 나오는 편이 낫겠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끊임없이 ‘잔펀치’를 맞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털고 가는 편이 오히려 속시원하겠다는 하소연이다.

동시에 한나라당은 먹구름 속에서도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지금의 한나라당 형편을 설명하는 데 ‘외우내환’이라는 단어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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