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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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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서울의 기억상실증

등록 2007-09-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동대문운동장·서울시청 허물고 리모델링하고…추억보다 개발 이익을 택한 변화의 도시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도시의 모습이 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나면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도 변한다. 변한 사람들은 그에 맞게 도시를 바꾸고, 변한 도시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꾸면서 사람과 도시는 모두 변해가는데, 도시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해방과 뒤이은 전쟁, 그리고 불어닥친 사회적 혼란으로 1960년대까지 서울은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모습에서 부서지고 다친 채 퇴락한 모습이었다. 소설가 이호철이 에 라는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2월이었고, 40년 전 이미 만원으로 꽉 들어찬 서울의 인구는 380만 명이었다. 이듬해 가수 패티김은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로 시작하는 를 부르기 시작했다. 꼭 그 때문이라 할 순 없겠지만 서울도 대한민국도 가파른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환골탈태하기 시작했다.

구보씨의 서울은 어디로 갔나

지난 40년 동안 서울에서는 수많은 건물이 헐리고, 새로 지어지고, 다시 헐렸다. 그리고 2007년 9월, 서울의 화두는 다시 ‘변하는 서울’이다. 서울시는 1925년생인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그 위에 패션타운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1년 아우인 서울시청은 건물 전면(파사드)과 중앙부 돔만 빼고 전체를 해체해 리모델링하겠다고 문화재위원회에 등록문화재 현상변경 신청을 했다. 해체된 청사 뒤편에는 16·19층짜리 건물 두 동이 들어서고, 얼굴만 남게 되는 옛 청사 건물에는 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문화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옛 건축물들의 소중함을 모르는 서울시의 몰역사성을 개탄하며 “서울시청과 동대문운동장을 지키자”며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반향은 기대만큼 크지 않다.

도시의 변화는 너무 가팔라 100m를 전력 질주한 스프린터의 숨가쁨이 느껴질 정도다. 용산 물류센터 터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620m짜리 초고층 랜드마크 건물이 들어서고, 광화문 앞과 독립문에는 도시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는 대규모 광장도 조성된다. 땅값 비싼 공간마다 육중한 무게의 주상복합 건물들이 솟구쳐 주변을 위압하고 있다. 공간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것들과의 작별을 요구하고, 크고 작은 생활의 변화들을 받아들일 것을 강제한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말했듯 “건물 자체는 건물 소유주의 사유재산일 수 있어도, 건물에 대한 집단 기억과 그 외관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공유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같은 인식을 찾긴 힘들다.

도시 연구가 조이담씨가 지난 2005년 11월 펴낸 를 보면, 구보 박태원이 경성을 헤매던 1930년대 당시 서울 도심에 있었던 주요 건축물 60곳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그중에서 남대문·대한문·동십자각 등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기념물 7곳을 제외한 근대 건축물 53개 가운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고작 12개뿐이다. 1989년까지 대법원 건물로 쓰이던 옛 경성고등재판소는 앞 얼굴(파사드)만 남기는 과격한 리모델링 끝에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변했고,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한 옛 동아일보 사옥 역시 리모델링을 거쳐 일민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 밖에 남은 건물들은 경성부청(서울시청), 경성부민관(서울시의회), 광통관(우리은행 종로지점), 조선은행(한국화폐박물관), 조선저축은행(옛 조흥은행 제일지점), 미쓰코시 백화점(신세계 본점), 조선중앙일보(농협 종로지점), 명동성당, 조지야 백화점(롯데백화점 영플라자), 경성전기(남대문로 한국전력사옥) 등이다. 지도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1925년 신축된 경성역사도 옛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그래픽 참조).

그 12개 건물 가운데 애초 건축 그대로 살아 있는 ‘현역’들은 관공서인 경성부청, 금융기관인 조선저축은행, 종교시설인 명동성당, 사무실인 경성전기 등 4곳과 이미 무지막지한 리모델링이 이뤄져 옛 느낌을 찾기 힘든 미쓰코시, 조지아 백화점 등 상업시설 2곳밖에 없다.

광화문과 독립문의 수난사

건물의 부재는 그 건물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집단 기억이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잡혀 들어갔던 종로경찰서의 위치는 지금처럼 인사동 북쪽 입구가 아닌 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자리이고, 소설가 박완서가 에서 친구 복순이와 처음 찾은 총독부 도서관은 강남 서초구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아닌 지금의 웨스턴조선호텔 터에 있던 총독부 도서관이다. 그러나 총독부 도서관에는 어린이 열람실이 없어 박완서와 복순이는 소공동길 너머 경성부 도서관(지금의 한국은행 별관터)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도시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두 ‘노장’들인 서울시청과 동대문운동장의 소멸을 지켜보는 것은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사라져가는 건물들에 대한 애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가슴을 후벼판 것은 저문 옛 왕조의 상징이던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었다.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옛 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허물고 그 터에 조선총독부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총독부의 정면을 가리게 될 광화문이었다.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잡지 의 1922년 9월치에 ‘없애버려지려고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한 뒤 광화문 철거에 대한 반대 의견은 점점 높아졌고, 총독부는 결국 문을 허무는 대신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의 북편담(현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을 헐어 그 터에 문을 이전 복원한다. 철거 이전된 광화문에 대한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의 심정은 의 26살 소장기자 제의식이 1926년 8월11일치 4면에 쓴 명문 ‘헐려짓는 광화문’이라는 고별 기사 속에 녹아 있다. “다시 옮기는 그곳은 북악을 등진 옛날의 그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구궁의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중략)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퍼하는 백의인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조국은 해방을 맞았고, 해체 이전됐던 광화문은 1968년 12월 제 위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개발과 성장이 전부이던 시대, 헐린 광화문의 아픈 기억에서 우리 사회는 아무 것도 배운 게 없음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제 손으로, 제 조상들의 문화재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사적 32호)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가면 흰색 화강암으로 만든 독립문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독립문은 애초 있던 자리(독립문 네거리)에서 서북쪽으로 70m쯤 밀려나 있다. 1979년 서울시가 도심과 경인고속도로를 잇는 성산대로(너비 30~40m, 길이 2만4천m)를 만들면서 걸림돌이 된 독립문을 해체 이전했기 때문이다.

독립문 이전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언론들은 “독립문을 지켜야 한다”며 열심히 펜을 휘둘렀다. 는 1977년 11월1일치에서 “쫓기는 문화재 독립문, 어느새 성산대로 위에 위치”라고 지적했고, 일주일쯤 지난 11월9일치에서 은 ‘독립문과 민족정신- 서울시 건설행정의 단견을 개탄한다’는 사설을 썼다. 문화재 위원들도 “독립문은 청나라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헐고 그 위에 지은 것이니, 장소 자체가 역사성을 갖는다”고 제 위치 고수를 주장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곧 묻혔다. 철거공사는 1979년 7월13일 시작돼 1980년 1월에 끝났다. 독립문을 이전하고, 시 청사 리모델링을 주장하는 서울시 공무원들의 논리에서 광화문 철거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려 했던 옛 총독부 관리들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당혹스런 일이다.

동대문 운동장 허무는 데 62.9% 찬성

지난 몇 년 동안에도 적지 않은 근대 건축물들이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져갔다. 일확천금을 노리던 투기꾼들의 왁자지껄한 고함소리 가득했던 옛 경성주식취인시장(현 증권거래소 건물)은 2005년 6월30일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뒤 넉 달 지난 그해 10월18일 철거됐다. 서울 초동 스카라극장,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건물, 이광수·현진건·박목월 고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건물 등 등록문화재로 지정됐거나 지정될 예정인 건물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래서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사적은 명동성당·옛 서울역사 등 23개, 유형문화재는 서울 성공회 성당·천도교 중앙 대교당·옛 동아일보 사옥 등 7개, 기념물은 이화장·광통관·구세군 본관 5개, 등록문화재는 29개뿐이다.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집단 기억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별로 아파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방송은 지난 7월25일 서울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동대문운동장의 철거와 개발에 대한 ‘서울시민 의식조사’를 진행했다.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공원과 디자인센터를 만들자는 의견에는 62.9%가 찬성했고, 운동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보존하자는 의견에는 50%가 “공감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지난 80년 동안 시민들과 함께했던 시청 건물이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이영민·차범근·박노준 등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명멸해간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져도 아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공간에 얽힌 크고 작은 일상의 추억보다, 개발과 그로 인한 이익 창출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서울은 이전보다 더 강하고 냉혹한 변화의 시련을 감당해야 할 것 같다.

*손정목 (2003), (19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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