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 성사 정치권 반응…한나라당은 핵 폐기 압박, 범여권 주자들은 주목 끌기 작전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8월8일 오전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나오자마자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재빠르게 논평을 내놓았다. 시기와 장소, 절차가 부적절하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나 대변인이 밝힌 한나라당의 입장은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바뀌었다. 오후가 되자 한나라당은 슬그머니 “오전에 나 대변인이 말한 것은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니었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대신 ‘북핵 폐기 없는 평화선언이나 종전협정을 하지 말 것’ 등 4가지 전제조건을 내세운 정상회담 조건부 수용 입장을 발표했다.
인상 찌푸리다 금새 여유
한나라당이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메가톤급 이슈와 맞닥뜨린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딱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여기에는 회담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미 남북이 합의한 정상회담이 취소될 일은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도 뒷받침됐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한나라당의 입장은 그 이후에도 갈수록 차분한 양상을 보였다. 발표 당일만 해도 “솔직히 말하면 우리 입장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은 아니다”라며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당 지도부 역시 이틀이 지난 10일에는 한층 여유를 되찾았다. 박재완 대표 비서실장은 이날 “남북 정상회담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정부가 당당한 자세로 회담을 치르고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면 칭찬해줄 일이고 잘못했다면 그때 가서 질책을 하면 될 문제”라고 말했다.
물론 남북 정상회담 국면에서 한나라당 입장이 기본적으로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정상회담이 19일의 당 대선 후보 경선 직후, 그리고 대선을 넉 달 앞둔 시점에 열린다는 사실이 한나라당으로서는 ‘고약한’ 일일 수밖에 없다. 권영세 최고위원은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은 총선을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 발표되는 바람에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했지만, 이번 대선은 정상회담이 열린 뒤에도 넉넉한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효과가 1차 때보다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정상회담 효과는 어디까지나 북핵 문제나 남북 관계에서 실질적 성과를 얻어내는 경우에 국한된다. 이와 관련한 한나라당의 접근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가져와야 할 ‘열매’에 대한 강한 압박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이미 평화선언이나 종전협정은 미뤄놓고 북핵 폐기 문제를 우선 해결하라고 주문해놓은 상황이다. 북핵 문제를 풀 수 있으면 더욱 좋지만 그보다는 남북 관계 개선이 현실적인 목표라고 여기고 있는 정부나 범여권의 입장과 차이가 생기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뒷거래 의혹 제기이다. 당내 정보통으로 통하는 정형근 최고위원은 8월9일 한국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과거 6·15 정상회담에서 5억달러를 준 여파 때문에 금전 거래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정보기관에서 많은 공을 들였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점 등을 봐서 경수로 지원 등과 같은 정치적 거래는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김정훈 당 정보위원장은 물론 진수희 의원 등 이명박 대선 경선 후보 쪽 인사들도 정상회담 뒷거래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적어도 범여권이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꽃놀이패’를 가지고 대선판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지는 못하게 할 최소한의 장치는 마련해두겠다는 복안인 셈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일정 성과를 낸다고 해도 한나라당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정상회담이 일정 성과를 냈을 경우, 범여권이 남북 관계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정치권 일각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장성민 전 민주당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이명박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했을 때 제기될 검증 문제도 남북 정상회담이 성과를 낸다면 함께 묻힐 것”이라며 “회담의 성과가 어떻게 한나라당에 불리한 결과로 다가온다는 건지 정밀하게 분석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과 범여권이 막연한 걱정과 기대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 봤을 때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소식이 적어도 ‘환영할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면, 범여권에겐 어떤 식으로든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일반적이다. 일단 범여권의 유력 주자들이 모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을 일이 생겼다는 점에서 이미 정상회담의 효과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회담 발표가 나온 직후부터 이해찬 전 총리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자신의 역할을 담은 활동 일지를 공개하는 한편, ‘한반도 평화시대 재창조 플랜’ 발표를 부지런히 추진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 역시 ‘한반도 상생경제 10개년 계획’을 제안하며 북한의 경제 재건과 북방시장 선점을 위한 전략을 제시했고,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장관 재직 시절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났다는 점을 강조하며 정상회담 성사의 숨은 주역이라는 사실을 과시했다.
대통합 촉매제 될까
그러나 현재로서 얻을 수 있는 ‘정상회담 효과’는 여기까지인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일각에서 전망하는 것처럼 정상회담이 노무현, 김대중 두 전·현직 대통령의 지지세력을 묶어내는 대통합의 촉매제로 작용할 가능성은 아직까지 미지수이다. 의원 수에 상관없이 여전히 범여권 지지세력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이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나온 이후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남북 정상회담과 신당과의 통합 문제는 전혀 별개라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은 “남북 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할 경사이지만, 민주신당이 잡탕 정당이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우리 원칙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안”이라고 전제한 뒤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해서 대통합이 빨라질 것이라고 하는 일부의 관측은 논리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막연한 기대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한나라당과 범여권의 ’막연한’ 우려와 기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시점은 8월28일, 장소는 평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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