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준비생의 ‘환상을 깨는’ 프로그램들… 귀농학교에서 입문 교육, 미진하면 텃밭 분양 받아 실습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전시 기획을 주로 하는 외국계 기업에서 16년째 근무하고 있는 이정복(44·경기 남양주시 호평동)씨는 지난해 겨울 귀농을 결심했다. 직장 생활 10년째인 지난 2000년 갑자기 공황장애(금방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상태가 지속되는 정신질환)를 앓았던 데서 비롯됐다. 업무상 1년에 10번은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이 병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30~40대 생태적 삶, 50대 이상 목가적 삶
직장 생활의 위기를 계기로 “나는 지금 행복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됐다. ‘아니다’라는 답을 얻은 그는 그때부터 막연히 귀농을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강원도 산골 노부부의 농촌 생활을 담은 TV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고서 그 길로 서점에 가서 귀농 관련 책들을 사서 읽으며 귀농의 뜻을 굳혔다. 이씨는 지금 귀농 후보지 다섯 곳을 차례로 돌아보는 중이다. 7월 중에 귀농지를 결정하고 8~9월에 좀더 자세히 둘러본 뒤 농업기술센터에 문의해 작물 교육을 받으려고 한다.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이근희(54·서울 방학동)씨는 지난 2004년 경기도 이천에 농가주택을 구입했다. 2005년부터 주말마다 가서 400여 평의 텃밭을 일구고 있다. 이씨는 지금 대학교 3학년인 작은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2009년에 귀농할 계획이다.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는 아내를 열심히 설득 중이다. 이씨는 “두 아들이 결혼하면, 손주들이라도 자연이 있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고 싶어서 귀농을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직장생활 10년차를 넘어선 ‘도시인’들 중에는 막연하게나마 귀농의 뜻을 품고 있는 이들이 꽤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이 2005년 도시에 사는 40살 이상 성인남녀 189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8%가 “은퇴 뒤 농촌으로 이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실제 귀농한 가구 수는 외환위기 직후 2년 정도 반짝 급증한 뒤 2003년까지 줄어들다가 반전돼 2004년을 기점으로 다시 늘어나고 있다. 농림부에 따르면, 2003년 885개 수준이던 귀농 가구 수가 지난해에는 1754개에 이르렀다. 2003년에 견줘 두 배가량으로 늘어난 수치로, 가구당 인구를 2명으로만 잡아도 약 3500명이 도시에서 시골로 삶의 터전을 옮긴 셈이다.
귀농의 배경은 나이대별로 조금 차이를 보인다. 30∼40대의 경우 생태적·환경적인 삶을 살기 위해 귀농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생업을 농업으로 바꾸는 본격적인 귀농을 꿈꾼다. 반면, 50대 이상은 은퇴 뒤 심심치 않은 소일거리로 텃밭을 일구면서 여유롭게 사는 목가적 삶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귀농이라기보다는 마을만 옮기는 귀촌 개념에 가깝다.
어떤 경우든 농촌에 정착하기 전 미리 배우고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필수적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이하 귀농본부)가 1996년 발족한 뒤 무엇보다 먼저 귀농학교를 운영했던 배경이다. 귀농본부가 운영하는 귀농학교는 크게 두 개로 나뉜다. 두 달씩 열리는 3번의 ‘귀농학교’와 방학 때 4박5일간 압축적으로 열리는 ‘여름 생태귀농학교’다. 지난 11년간 총 2천여 명이 귀농학교를 수료했다. 귀농본부는 이 중 10%를 조금 넘는 250여 명이 귀농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귀농 접는 이들 위한 ‘산촌 유학’도
귀농 교육은 모두 입문적 성격을 띤다. 귀농학교 교육이 주력하는 부분은 농촌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다. 안동균 귀농본부 간사는 “누구나 농촌에 대한 환상을 품고 귀농을 생각하는데 이 환상을 깨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며 “조금의 보탬이나 덜어냄 없이 농촌의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 귀농에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말했다.
1차 교육으로 아쉬운 이들은 도시 농부 양성을 위해 귀농본부가 주최하는 ‘도시농부학교’를 수강하거나 ‘농사실습생 제도’ 등을 통해 텃밭을 분양받아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정복씨는 지난 3월 집 근처인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 텃밭 25평을 분양받았다. 이씨는 주말마다 가족들과 함께 밭에 가서 씨를 뿌리고, 풀을 매고 거름을 주며 농사를 익히고 있다. 휴일인 지난 7월17일에는 부인 이성련(41)씨, 큰딸 규원(14), 작은딸 승원(11)이까지 네 식구가 모두 텃밭에서 강낭콩 수확을 했다. 이씨는 “저 같은 경우는 자립형 소농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농사일을 직접 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라며 휴일마다 밭에서 땀을 흘리는 이유를 설명했다.
전업농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귀농의 돌파구를 찾기도 한다. 이현정(36·경기도 부천)·송영철(39) 부부가 그런 경우다. 이들은 11살, 8살, 5살배기 세 아이를 뒀다. 그만큼 교육 시설과 양육비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귀농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오히려 자신을 잃었다. 젊은 사람이나 아이들이 없어 학교는 폐교되고, 농가 수익도 낮으며, 타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기까지 한다는 농촌의 부정적 면모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귀농’의 꿈을 접으려던 이들이 찾는 해결책은 ‘산촌유학’이다. 산촌유학이란 도시 아이들이 시골 학교에 가서 짧게는 1∼2달, 길게는 1년까지 시골을 체험하는 도농 교환 체험 프로그램이다. 일본에서는 30년 전부터 시행돼왔던 것으로 농촌 주민들이 수입을 보전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돼왔다.
이현정·송영철씨 부부는 산촌유학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들은 주말에 경북 상주에서 산촌유학을 시범운영하는 이명학씨, 충청도에서 열리는 산촌유학 워크숍 등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결국 전라북도 진안군 새울터에 형성되는 전원마을에서 산촌유학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입주 신청을 했고, 내년 3월에 진안군 주민이 된다. 이현정씨는 “결혼 10년쯤 되니 무료하기도 하고, 꿈도 없는 똑같은 일상이 지속됐는데 갑자기 새로운 꿈과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귀농을 결심하고 실행하기까지는 수많은 걸림돌에 부딪힌다. 가장 직접적인 장애물은 가족의 반대다. 정보기술(IT)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김경석(44)씨는 “어차피 70살까지 보장받지 못하는 직업이라면, 지금 그만두고 농촌에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귀농을 생각”하고 있지만, 아내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현재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 수입까지 합해 연 1억여원이 되는 소득이 가장 큰 이유다. 아직 중·고교생인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다. 김씨는 우선 아내에게 오는 9월에 열리는 43기 서울생태귀농학교를 수강할 것을 권했다. “수업을 듣고도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좀더 시간을 갖고 천천히 아내를 설득하겠다.”
가족을 끝까지 설득하라
이정복씨는 중학교 1학년생인 큰딸 규원이의 반대를 맞닥뜨리고 있다. 이씨는 딸에게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첫째 아빠랑 시골에서 산다, 둘째 삼촌 혹은 할머니와 살면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 셋째 중학교까지만 시골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기숙 학교를 간다. 결국 규원이는 읍내가 20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으로 갈 것, 인터넷이 되는 곳으로 갈 것 등의 조건을 달아 1번을 택했다.
채상헌 천안연암대 교수(농업교육)는 “가족을 설득해서 가족과 함께 귀농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작은 장애물에도 금방 포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농림부는 이와 관련해, 가족 등 모두가 쉽게 귀농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교육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농림부는 늦어도 2008년에는 온라인 교육과 귀농 정보 통합 전산망이 가동될 것이라고 밝혔다.
가족보다 불편한 건 사회다. 송영철씨는 귀농학교 41기 동기모임 게시판에 “귀농을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 하나같이 ‘귀농하면 뭐 해먹고 살래?’ ‘애들 교육은?’이라는 똑같은 질문을 한다. 나를 찍어낸 붕어빵처럼 비슷한 표정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본다”며 “그래서 요즘은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진다”고 썼다. 귀농자는 사회의 1%에도 미치지 않는 소수이고, 이들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깊지 않음을 방증한다. 경쟁에서 낙오된 ‘도피자’쯤으로 보는 시선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정복씨는 “귀농은 이사가 아니라 작은 이민”이라고 말했다.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모두가 서울로 도시로 몰려드는 요즘, 하나하나 준비해 ‘이민을 결행하는 이들’에게 의혹과 의아함의 시선을 보내기보다는 ‘도시의 삶’이 행복한지 자문하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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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의 유형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도시에서 고향인 농촌으로 돌아가는 U형, 농촌으로 돌아가되 타향으로 가는 J형, 도시에서 태어난 이가 농촌으로 떠나는 I형이 있다. 강대구 순천대 교수(농업교육)는 “부모님이 물려준 땅이나, 부모님 때부터 지속된 인간관계가 귀농 생활의 자산이 되는 U형에 비해 아무것도 없이 농촌에 대해 이상적인 아이디어와 꿈만 갖고 있는 I형이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귀농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 교수로부터 I형 귀농자들이 새겨야 할 점을 들어보았다.
초기 정착 비용을 아껴라:I형은 농촌 생활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멋있고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초기에 집 꾸미는 데 투자를 많이 한다. 그러나 귀농 직후 2~3년까지는 수입이 현저히 줄어들거나 없을 확률이 높으므로 정착 비용에 너무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반드시 배우자와 함께 가라: 배우자를 설득하지 못해 혼자 귀농하고 주말부부 형태로 지내는 부부는 ‘필패’한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으니 작은 어려움만 생겨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또 하나는 농촌 사회에서 차지하는 남성 네트워크나 여성 네트워크(관계망)의 중요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촌에서는 여자들끼리 서로 도움을 청하고 주는 일이 많은데, 남자 혼자일 경우 이런 네트워크에서 소외돼 마을의 일원으로 빨리 흡수되지 못한다.
인사를 크게 잘 하라: 영업직·판매직종에 종사했던 활발한 성격의 사람들이 시골에서도 적응을 잘 한다. 원주민들은 귀농자들을 적어도 3년은 평가한다. 3년이 지날 때까지 농사도 잘 짓고 착실히 생활해야 마을 구성원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매일 만날 때마다 모든 마을 어른들에게 큰소리로 인사하는 건 좋은 점수를 받는 데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된다.
마을에서 신망받는 어른과 친하게 지내라: U형이 부모가 물려준 땅이나 인간관계, 영농기술을 기반으로 농촌 생활을 할 수 있는 반면 I형은 비빌 언덕이 없다. 강대구 교수는 귀농지를 결정했다면, 미리 귀농지에 가서 그 마을에서 신망받는 어른을 찾아가 일을 도와드리면서 농사 실습을 해보라고 조언한다. 일도 배우고, 마을에서 신망받는 어른과 돈독한 관계도 쌓아 일석이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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