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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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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러 왔다가 사회복지에 눈뜨다

등록 2007-07-26 00:00 수정 2020-05-03 04:25

귀농민 5명 사랑방 방담… 3명의 아내는 도시에서 생활, 적게 먹고 적게 쓰니 마음은 밝아져

▣ 남원=글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이영오(52) 위원장의 트럭을 쫓아 약속 장소에 도착한 건 오전 9시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경(51) 대표의 주선으로 방담에 참석하기로 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실상사 근방에 자리잡은 조립식 건물이었다. 두런두런 인사를 나누면서 방 안에 빙 둘러 들어앉자 널찍해 보이던 방에 빈자리가 얼마 남지 않는다. 모내기철을 넘긴 때여서였는지, 아니면 휴일이어선지 조금은 여유들이 있어 보였다. 방담을 진행한 7월17일 산내면에는 띄엄띄엄 안개비가 내렸다.

아이 대안학교 보내면서 결행

언제 어떤 계기로 귀농했는지부터 들어보고 싶다. (조금은 머쓱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질문을 던지며 좌중을 돌아보았더니 왕영술(44)씨가 먼저 나설 뜻을 비친다. 산내면에 뿌리를 둔 지역 시민단체인 (사)한생명에서 지역생태농업총괄팀장을 맡고 있는 이다. 좀 그을렸지만 도시인 티를 다 벗지 못한 얼굴이었다.)

“(왕영술) 지난해에 여기로 귀농했다. 실상사 귀농학교 17기(2006년 가을)다. 5년 전에 (불교계 시민단체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실상사에 자주 왕래하던 터였다.” 왕 팀장은 한때 유시민 의원이 주도했던 개혁당의 서울 강서위원장으로 일했으며, 귀농 전까지는 여론조사 기관인 ‘더 피플’에서 부장급 조사연구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알게 되면서 이 지역으로 탐방을 왔고, 딸을 ‘실상사 작은학교’(중등 과정의 대안학교)에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시에 살면서 늘 귀농을 머릿속에 그리면서도 (결행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딸의 학교 문제로 (귀농 시기가) 예상보다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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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영술(44)

“농촌 사정이 어렵다. 유기농, 생태농업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척박한 현실이다. 적게 먹고 적게 쓰는 마음으로 들어왔다. 눈에 띄게 건강해지고, 마음이 밝아진 걸 느낀다.”

<li>귀농시기</li>2006년
<li>예전에 했던 일</li>
정당인, 여론조사 기관 연구원
<li>지금 하고 있는 일</li>
(사)한생명 지역생태농업총괄팀장
<li>가족</li>
부인(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액세서리 가게 운영)과 딸 2(실상사 작은학교3학년, 초등학교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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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대안학교에 보내겠다는 결심을 한 건 무엇 때문이었는지….

“우리 사회가 학력 위주 아닌가. 미래 사회엔 그런 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켜서는 아니고, 딸이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로 커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다. 바라는 걸 하면서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고 싶었다.” 왕 팀장의 딸은 현재 작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며, 방학을 맞아 서울에 있는 아내 쪽에 가 있다고 한다. 한 달에 50만원 안팎에 이르는 대안학교의 학비를 비롯한 집안의 씀씀이를 감안할 때 왕 팀장 부부는 한동안 떨어져 살아야 할 처지다. 왕 팀장의 한 달 수입은 100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의 아내는 남대문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형제가 나란히 귀농해 함께 살고 있는 건 드문 일 아닌지…. (실상사 농장 대표와 작업반장을 각각 맡고 있는 김규동(44), 김규식(41)씨가 형제라는 얘기는 방담 직전에 들었다.)

“(김규동) 여기로 귀농한 게 5년째다. 2003년에 왔고, 귀농학교 10기다. 졸업한 해 농장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면서 농장 일을 맡게 됐다.” 김 대표는 대학·대학원에서 정치사상을 전공한 뒤 주로 번역 일을 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김 대표 부부 또한 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 직장에 다니는 그의 아내는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이 그렇듯 오래도록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10년 가까이 그 문제를 풀지 못하고 내려왔다.”

“(김규식) 형제가 의기투합했던 건 아니고 1년 간격을 두고 따로 내려왔다. 난 2004년에 귀농했고, 귀농학교 12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사회생활을 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많은 서울 사람들처럼 ‘주변인’으로 성장했다. 목수 일도 했고, 방송장비를 제작하고 설치하는 일도 했다. 노동자로 살면서 사회단체 활동도 했는데, 계속할 수 있을지에 회의를 느꼈다. 잔업이 너무 많고 내근·외근을 수시로 바꿔 하는 과정에서 귀농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농사에 자신이 없어 주저주저하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내려와 한번 부딪쳐보니 길이 보이더라.(웃음)

부인 몰래 사표 쓰고 내려오기도

먼저 귀농한 형의 처지에서 혹시 말리지는 않았나?

“(김규동) 반대? 권유했다. (동생이) 많이 힘들어하더라. 내 보기에 도시의 인간관계는 (문제를) 풀 수 없게 맺어져 있다. 서로 잘못한 게 없는데 풀 수 없는 것이 도시생활의 인간관계다. 자연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지 못하면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도시에선 그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다.”

실상사 농장은 1만5천 평 규모에 이른다. 김규동 대표가 전반적인 관리를 맡고 있으며, 김규식 반장은 직접적인 생산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농장에서 키워내는 주요 작물은 쌀, 배추, 감자, 양파, 표고버섯이며 이해경 대표의 지리산친환경영농조합과 연계해 ‘지리산 품안愛’라는 브랜드로 생산물을 출하하고 있다. 실상사 농장에서 상근하는 이들은 김규동 형제를 비롯해 3명이며, 이 밖에 자원봉사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실상사 농장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공간인 동시에 실상사 귀농학교와 인근 학교 학생들의 농사 체험장으로 활용되는 교육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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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오(52)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싫든 좋든 참여해야 하는 공동의 일이 많다. 싫어도 몸으로 부딪쳐줘야 한다. 도시에서 온 이들은 이걸 어렵게 생각한다. 소득(생계) 문제도 있다.”

<li>귀농시기</li>1986년
<li>예전에 했던 일</li>
대우실업 직원, 부산 해운대구청 공무원
<li>지금 하고 있는 일</li>
산내면 매동마을 농사체험관 운영위원장. 사과 농사, 음식점 겸 민박집 운영
<li>가족</li>
부인(남편과 함께 음식점 겸 민박집 운영)과 아들(군 복무 중)·딸(고등학교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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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하려고 하면 보통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는가.

“(왕영술) 부부가 의견을 맞춰 내려온 것이어서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좀 걱정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농사를 지었던 분들이어서…. 올해 처음으로 감자를 수확해 갖다드렸더니 기뻐하시더라. 살아갈 수 있겠구나, 확인을 받은 것 같다. (웃음) 농촌 사정이 어렵다. 유기농, 생태농업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척박한 현실이다. 만만치 않은 일인 건 틀림없다. 적게 먹고 적게 쓰는 마음으로 들어왔다. 눈에 띄게 건강해지고, 마음이 밝아진 걸 느낀다.”

“(이해경) 귀농학교 학생들을 만나보면, 제일 큰 장애물은 아내다. 심한 경우 부인 몰래 사표 쓰고 내려온 경우도 있다. 그게 나중에 들통이 나서 싸우기도 하고…. (웃음) 내 경우 다행히 집사람이 이해하고 후원해준다. 혼자 된 어머니가 많이 걱정하는 편이다.” 이 대표의 부인은 같이 귀농하려고 국세청 공무원직을 그만뒀다가 가족의 생계 문제 때문에 귀농을 미룬 상태다. 2년제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지금은 전주에 있는 노인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단다.

이 위원장님은 농촌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하도 오래돼서 지역의 원주민에 더 가까울 듯한데, 어제 보니 부인은 귀농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이영오 매동마을 농사체험관 운영위원장은 전날 묵었던 민박집의 주인이기도 하다. 저녁에 소주를 곁들인 식사를 같이 하면서 사연을 미리 들어둔 터였다. 산내면에 있는 매동마을의 농사체험관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 위원장이 고향인 이곳에 정착한 건 1996년이었다. 대우그룹의 뿌리인 대우실업 부산공장을 거쳐 부산 해운대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회의를 느껴 1986년부터 벌을 키우는 일로 농업에 뛰어들었다. 고향에 들어오기 전까지 10년가량 구례와 진안을 돌았다고 한다.)

싫어도 몸으로 부딪쳐라

“(이영오) 집사람이 3년 뒤(1989) 농촌으로 따라 나왔는데, 아직도 시골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담 너머’(도시)만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도시로 나가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해 서울 갔다 오는 길에 대전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조한규의 이란 책을 보고 농촌에서도 꿈을 펼칠 수 있겠다 싶더라. 집에서 두세 번 읽어보고 괴산 자연농업학교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자연농업을 위한 양질의 퇴비를 만든다는 목적에 따라 120평 규모의 돈사에 한때 250두에 이르는 돼지를 키우기도 했으며, 지금은 1헥타르(ha)의 농장에서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올해 작황이 좋아 사과 농장 규모를 2헥타르로 늘린다는 계획 아래 개간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다. 농사체험관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답게 ‘교육 농장’을 목표로 잡고 있다. 도시 소비자와 어린이들에게 농업 교육과 체험 기회를 주면서 농외 소득을 올린다는 구상이다. 이는 농사체험관을 통해 어느 정도 실현돼 있다.

귀농자와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 분위기도 있다고 들었다. 농촌에서 사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이영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싫든 좋든 참여해야 하는 공동의 일이 많다. 싫어도 몸으로 부딪쳐줘야 한다. 도시에서 온 이들은 이걸 어렵게 생각한다. 소득(생계) 문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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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44)

“서로 잘못한 게 없는데 풀 수 없는 것이 도시생활의 인간관계다. 자연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지 못하면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도시에선 그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다.”
<li>귀농시기</li>2003년
<li>예전에 했던 일</li>
번역가
<li>지금 하고 있는 일</li>
농산물 생산 조직인 ‘실상사 농장’대표
<li>가족</li>
부인(경기 용인에 거주하는 직장인)과 아들2(실상사 작은학교3학년, 초등학교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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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도 농사는 만족스럽게 안 된다. 주민들과의 갈등은 농촌을 바라보는 큰 틀에서 사소한 문제로 본다.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주민들과 대화를 별로 못했다. 아직은 농사를 체험하고 공부하는 처지다. 기계를 쓰는 것과 흙에 대해 배우는 게 재미있다. 이젠 이해의 틀이 잡혀 캄캄하지는 않다.”

“(왕영술) 제 일은 지역민들과 관계를 많이 맺는 게 중요하다. 주민들과 자주 접하고, 친숙하게 지낸다. 귀농한 사연은 다양한데, 기본적으로 농촌 지역에 들어왔으니 농촌의 각도로 접근하고 맞추려는 자세를 가지려 한다. 마을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생산량이 적든 많든 어느 정도는 농사를 지어야 같이 일을 하고 접하면서 소통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여기 생활이 한가롭지는 않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 강도가 높다. 그래도 좋은 건 마음이 편하다는 거다. 노동 강도가 똑같아도 즐겁게 하는 것과 먹고살기 위해 (억지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귀농한 이들은 어떤 삶을 꿈꾸며 사는지 궁금했다.

“(김규동) 꿈? 없다. 이쪽(농업)으로 가다 쓰러지면 죽는 거다.” (웃음) 김 대표의 짤막한 답변이 끝나자마자 동생이 나섰다.

“(김규식) 농촌 생활을 미리 계획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도시에선 견뎌낼 수 없었다. 가난해도 마음 편하게 살아보자는 정도였다. 여기 와서 좀 바뀌었다. 먹고살 거리로 선택해 왔는데, 와서 보니 지역 공동체가 형성돼 있더라. 먹고사는 일 외에 농촌에서 사회복지 단체 활동도 추가로 할 수 있겠더라. 먹고사는 수단에만 매달리기보다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가치 있는 활동에 힘을 보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농사 기술 익히는 게 자연스러운 생활이고, 추가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지 틈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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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41)

“도시에선 가난해도 마음 편하게 살아보자는 정도였다. 여기 와서 좀 바뀌었다. 먹고살 거리로 선택해 왔는데, 그 외에 농촌에서 사회복지 단체 활동도 추가로 할 수 있겠더라.”

<li>귀농시기</li>2004년
<li>예전에 했던 일</li>
목수, 직장인
<li>지금 하고 있는 일</li>
실상사 농장의 생산 실무를 책임지는 작업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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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게 아깝다”던 아이의 변화

“(김규동) 나 또한 예상치 못한 성과가 있었다. 실상사 작은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들에게 도시에선 가르칠 수 없는 걸 일깨워준 것 같다. 큰아이가 (귀농한) 초기엔 ‘아빠 왜 그렇게 살아?’ 그러더라. 배운 게 아깝다는 투였다. 2학년 말쯤 되니 ‘돈만 되면 (농촌 생활도) 괜찮은 삶이야’라고 했다. 3학년에 올라가고부터는 대화 상대가 됐다. 애엄마가 강권하다시피 보냈는데 잘 자라줬다는 생각이다.” 어른들의 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이어졌다.

중등 과정의 대안학교를 끝낸 뒤에 다시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는 것 아닌가. 비인가 교육기관이어서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를 거쳐야 한다고 들었다. 대안학교 성격의 고등학교와 원활하게 연결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왕영술) 중등에서 고등 과정으로 이어지는 대안학교의 연결 구도가 짜여 있는 데가 드물다. 산내면에서도 이제 시도하는 단계다. 지금까지 졸업한 아이들의 진로는 다양하다. 일반 고등학교에 간 아이들도 있고, 외국 유학을 간 아이들도 있다.”

큰딸이 중학교 3학년이면 이제 곧 졸업인데, 진로를 어떻게 잡고 있는가?

“딸은 뮤지컬 배우를 꿈꾸고 있다. 방학 때 춤 배우는 곳으로 연결해줬더니 열심히 하더라. (웃음) 길거리에 가면서도 춤을 춘다. 동기부여는 됐다.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있다. 예술고를 가야 할 텐데, 거기선 영어·수학 같은 과목도 어느 수준까지 올려야 한다.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더라. 어디든 아이가 바라는 대로 가게 할 것이다. 애들한테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도 크다. 옥수수같이 빨리 크는 아이도 있고, 늦되는 아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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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경(51)

“귀농학교 학생들을 만나보면, 제일 큰 장애물은 아내다. 심한 경우 부인 몰래 사표 쓰고 내려온 경우도 있다. 그게 나중에 들통이 나서 싸우기도 하고….”

<li>귀농시기</li>1997년

<li>예전에 했던 일</li>
대학 경제학 강사
<li>지금 하고 있는 일</li>
산내면 농민들의 공동 판매 조직인 지리산친환경영농조합 대표
<li>가족</li>
부인(전주에서 사회복지사로 활동)과 딸2(대학교2, 고등학교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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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대표도 “아들 스스로 판단하게 맡겨두고 강요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풀어내는 단단한 성격을 갖는 쪽으로 가면 좋겠다고 했다. 이영오 위원장은 아이 둘을 모두 일반학교에 보내 대안학교와 관련된 고민은 해보지 않았단다. 방담 막바지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농업 개방 같은 주제를 둘러싸고 얘기가 잠깐 오갔지만 ‘어차피 대세로 수용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분위기였다. 이해경 대표는 “농촌을 지원할 돈으로 119조원을 마련하고 있다 하는데, 농민들 스스로 해보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 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쓰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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