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87년, 창조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노동운동에 나서야
▣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haclass@hanmail.net
1987년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울산에서 시작됐다. 삽시간에 태화강 둔치에 5만여 명의 노동자가 모이면서, 며칠 뒤 공설운동장에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모이면서, 파출소와 동사무소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그것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허겁지겁 울산으로 내려간 나에게, 한 노동자가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준 꼬깃꼬깃 구겨진 유인물에 적혀 있던 구호들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앞에 선명하다.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달라!” “출퇴근시 사복 착용하게 해달라!” “안전화 신고 조인트 까지 마라!”
노동자 권리 이해수준은 아직 천박해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수만 명의 노동자가 모여서 외쳤던 중요한 요구사항들이 그런 것들이었다니….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웃는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엄연한 사실은 87년 이전의 한국 노동자는 지금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개발독재가 한국의 노동자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점심을 회사 식당에서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스스로 인간인 것을 잠시 잊지 않아도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국의 노동자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였다.
87년 투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성과에 대해 지금 점수를 매기자면 그 성적표는 초라하다. 민주화의 열망이 87년 투쟁으로 폭발했으나 ‘양김’은 분열했고, 노태우 정권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과거의 ‘민주투사’들이 집권했지만 역대 정부의 정책기조는 ‘신자유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않았고 구속 노동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포함해 아직도 1천 명에 가까운 양심수가 있다. 사회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계속 실망스럽다.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실질적) 민주화는 실패했다’는 지적도 따갑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 경쟁력’이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는 현상은 더욱 짙어졌다. 참여정부는 집권 초기에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구상해보기도 했으나 점차 자본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분명하게 세웠고 그 집요한 노력은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거의 완성됐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관철되는 과정에서 ‘권력’이 차지하고 있던 사회 지배력을 점차 ‘자본’이 대체할 것인데, 우리 사회 자본이 노동자 권리를 이해하는 수준은 아직 천박하다. 대표적 사례가 유력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얼마 전에 당당하게 밝힌 노동자관이다. 교수와 예술인 노조에 반대하는 그의 발언이 알려진 뒤 열린우리당조차 “이 전 시장의 발언은 ‘무노조’를 칭송하고 나선 것이며, 개발독재 시대의 빈곤한 노동철학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비판했지만, 이명박씨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대학교수는 방학이 있고, 일 안 해도 봉급이 나오고, 출퇴근 시간도 없고, 오후에 강의가 있으면 오후에 나오고 다른 자리에 참석해 보수를 받을 수도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가도 한 달에 한 번 두 번 공연하면 나머진 자유시간이잖아요.” 이러한 발언은 전교조가 처음 설립될 무렵 정치인들이 앞다퉈 “신성한 교직자가 어떻게 노동자냐? 교사가 왜 자신을 노동자라고 비하하느냐?”고 비난했던 노동자관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국민들의 반응이다. 문제의 ‘돌발영상’에서는 이명박씨가 예술인 노조에 대해 비웃듯 말했을 때, 청중들이 거의 환호작약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의 발언으로 이명박씨에 대한 지지율이 오히려 올랐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기묘한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제 식민지’와 ‘분단’과 ‘친일독재’와 ‘군사독재’라는 비정상적인 자본주의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의식이 왜곡된 100년의 역사 속에서 주입된, 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한 번쯤 해봐야 한다.
민주노총에 쏟아지는 쓴소리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대표적인 성과는 무엇보다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도덕적 우월성의 표본이었던 민주노총에 최근 쏟아지는 눈총은 따갑다.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운동의 위기”를 주장하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기업 기득권 노동자 중심인 민주노총의 노동운동은 더 이상 정당성이 없다고 대통령이 직접 비난하자마자 때를 맞춘 듯 대기업 노조 간부들의 비리가 터졌다. 노·사·정 교섭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현란했고, 한국 현대사 속에서 유일무이한 ‘민주주의의 학교’를 자부해온 민주노총의 자부심에는 금이 갔다.
잠시 이루어졌던 양대 노총의 공조는 비정규직 관련법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극심한 반목을 하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더 방치했다가는 한국 노동운동 전체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미조직 노동자의 문제는 조직 노동자들이 반드시 함께 해결해야만 한다.
정부가 각종 현안 과제들을 이미 설정한 ‘로드맵’ 속에서 무리하게 추진한 책임이 크고, 노동자의 권리가 점차 확대되는 게 역사의 순리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자본의 저열한 역사의식이 커다란 저해요소인 것이 사실임에도, 굳이 민주노총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 전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교섭 없이 투쟁만 한다’는 비난과 ‘투쟁 없는 교섭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반드시 ‘교섭 있는 투쟁’과 ‘투쟁 있는 교섭’으로 만나야 한다.
영미식 시장경제주의나 노자 간의 타협적 질서조차 아직까지 제대로 실현돼본 적이 없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운동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자리를 대체하는 ‘자본’의 대척점에는 ‘노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양극화를 극복하는 힘이 노동자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 세력이 출현한다고 해도 그것은 건강한 노동운동의 기반에 따른 성과일 것이다. 유럽의 복지사회들은 정치인들의 세계관 변화에 따른 아량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부단한 요구의 결과였다.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관심 있으십니까
임금 인상 투쟁과 단체교섭을 통해 노동조건의 수준을 높이는 경제적 투쟁은 확산됐지만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실현된 노동자가 중심이 된 진보정당의 집권도 언젠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 직장인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아직 갈 길이 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세계 노동운동사에 우뚝 선 기적이었다. 새로운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성과들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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