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경제난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북한 철도, 개성공단·금강산에 활용하는 방안부터</font>
▣ 평양=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북한교통정보센터장
남북열차 시험운행이 있던 5월17일 낮 12시18분, 나는 평양역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남쪽은 물론 세계가 역사적인 순간을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각이건만, 평양역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북한 철도 시험운행을 알리는 축하 현수막은 고사하고 짧은 안내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날치 〈노동신문〉 4면 맨 아래 작은 기사가 하나 실렸을 뿐이다. 충격이었다. 평양역 주변 지역의 북쪽 주민에게 오늘이 남북열차 시험운행이 이루어지는 날인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너무도 명료했다. “모릅네다.” 남쪽의 역사적 흥분과 견준다면, 목욕탕의 열탕과 냉탕의 엄청난 온도차가 느껴졌다.
철길이 열렸는데 왜 침묵하는가
1994년 6월30일, 김일성 주석은 벨기에 노동당위원장을 만난다. 김 주석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인사이다. 이 자리에서 김 주석은 “남과 북이 협력만 하면 돈벌이를 많이 할 수 있다. 신의주와 개성 간 철도를 통해 중국 상품을 수송하고, 동해선으로는 중국 흑룡강성과 러시아 상품을 수송할 경우에 북쪽은 가만히 앉아서도 연간 15억달러의 돈을 벌 수 있다”고 언급했다. 김 주석이 이렇게 강조한 사업이 이루어졌건만, 북한은 왜 침묵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쪽의 철도는 너무도 애처롭다. 50여 년은 되었을 낡은 나무 침목, 탄력이 없이 축 늘어진 전차선과 낡을 대로 낡은 전기시설, 대장간에서 망치로 연마한 듯한 기관차 차체, 견인력에 비해 과중한 짐을 실어서 그런지 숨을 헐떡이는 디젤기관차…. 무거운 등짐을 지고 열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철길을 걷는 평양 시민의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쇠로 만든 두 개의 궤도 위를 달리는 철도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일본의 일부 지식층이나 우익세력들은 일제강점기에 조밀한 철도망을 한반도에 건설했다는 것을 대단한 공적인 양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매우 편협하고 무지한 것이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자원 약탈을 위한 자원개발형 철도망, 수탈물의 일본 반출을 위한 항만연결형 철도망, 대륙 침략을 위한 대륙연결형 철도망을 구축했다. 따라서 한반도의 철도망은 남쪽의 부산과 목포, 북쪽의 신의주와 온성을 ‘X’자로 연결하는 형태로 구성됐던 것이다. 즉, 지역 간의 균형 발전이나 산업 간 연계 기능 등을 철저히 무시하고, 건설비가 가장 적게 소요되며 대륙 침략과 식민지 경영에 적합한 노선이 구축됐다.
1904년 2월,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한국 정부와는 어떠한 상의도 없이 일본군용 철도로서 경의선을 부설한다고 결정했다. 무력한 한국 정부는 일제의 결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기간 중에 철도 건설 대상 용지를 헐값에 수탈했고 수많은 노동자를 강제 동원해 공사 착수 1년 만에 연락 운전이 가능하도록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살인적인 수준의 사역을 근로자에게 강요해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문명의 이기인 철도가 폭력과 탄압의 수단으로 변모했다.
일본의 속내는 자명했다. 1884년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신의주 연결철도는 동아시아 대륙으로 통하는 대도로서 장래 중국을 횡단해 인도에 도달하는 철도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또 1902년 일본 내각은 경의철도를 만주로 확장하는 것은 일본에 정치적·경제적으로 극히 긴요하고 유익한 방안이라고 의결했다.
인민경제의 ‘4대 주공노선’,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공동으로 철도망 복원사업이 추진돼왔다. 몇 차례 복원사업의 위기도 있었으나, 인내와 포용 속에서 열차 시험운행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북한은 외견상으론 철도강국으로 철도가 차지하는 정치·경제적 위상이 지대하다. 철도 노선 연장이 5248km로서 남쪽보다 2천여km나 길다. 화물수송의 약 90%, 여객운송의 60%를 철도가 담당한다. 또 중국과는 3개, 러시아와는 1개의 국제철도 노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50여 년간 동유럽을 비롯한 옛 사회주의 국가와 국제철도 수송을 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이 “철도가 운행되는 것은 인체에서 혈액이 순환되는 것과 같다”고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철도는 전력·석탄·금속 부문과 인민경제의 ‘4대 주공전선’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 정치·경제의 중핵인 철도는 현재 중병을 앓고 있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철도에 대한 적절한 유지,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주요 원인이다. 북한 철도는 전체 노선의 약 80%(남쪽은 49%)가 전철화돼 있으나, 만성적인 전력난으로 정상 운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 노선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으로 알려진 평양~신의주~선양~베이징 간 국제열차의 북한 구간 주행 속도는 시속 약 45km 수준이다. 다른 노선의 열차나 화물열차는 시속 20~30km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열차 중 일부는 한국의 대표적 마라톤 선수인 이봉주가 뛰는 속도보다 느리다는 얘기다.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UNESCAP)와 같은 국제기구는 화물열차가 경제성을 갖기 위해선 시속 40km 이상이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기관차 및 객화차에 적기에 부품이 공급되지 않아 대형 열차사고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최근에는 기관차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과 동유럽 지역에서 용도 폐기된 기관차를 도입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한 철도 시험운행은 56년 만의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철도 상용 운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남북 간에 법적·제도적·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이번 시험운행 과정에서 북한 군부와의 지루한 회의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군사적 보장조치 합의라는 커다란 장벽도 무시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새로운 가능성인가, 일회성 이벤트인가
단기적으로는 개성공단과 관련된 인적·물적 수송, 남쪽의 인도적 지원물자 수송에 철도가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급속한 철도 사용운행 및 북쪽 지역 통과운행을 추진하기보다는, 개성공단과 금강산의 인적·물적 수송수단(출근, 관광교통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개성공단 1단계 잔여용지가 올해 분양되면, 내년 상반기에 개성공업지구 내에는 북쪽 근로자가 약 15만~17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와 같이 버스를 이용한 수송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의선의 개성~손하~판문역 간의 열차 운행만이 개성공단 수송난을 일부 해결할 수 있다. 개성공단에 필요한 원자재를 중국·북한에서 조달하는 방법으로 경의선 북쪽 구간의 활성화를 유도하고, 중국과 북한에서 조달한 원자재의 일부분을 철도를 이용해 남쪽으로 반입하는 방안도 추진할 수 있다.
시험열차 운행은 남북 ‘통일열차’의 선명한 궤적을 남겼다. 이 궤적을 따라 남북경협의 본열차가 어떠한 모습으로 달릴까? 남북철도 시험운행은 새로운 가능성일 수도 있지만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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