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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작가님들, 행복하십니까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상업화 바람과 함께 살벌한 경쟁·화랑과의 갈등·작품 획일화 등의 문제도 불거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지금처럼 자본과 예술의 궁합이 찰떡처럼 맞는 때도 없다. 미술만 해도 너무 급속하게 가까워져서 걱정될 정도다.”

서울 홍익대 앞 미술 대안공간 루프의 기획자 서진석씨는 푸념하듯 말했다. 화랑과 급속히 가까워진 요즘 젊은 작가들의 태도를 넌지시 나무라는 발언이었다.

미술시장 활황의 첨단에서 화랑 전속작가로, 해외 경매 등에서 각광받는 주역이 된 젊은 작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불과 2~3년 만에 한국 미술판의 변방에서 외면받다가 갑자기 화랑들에 이끌려 미술시장의 주역으로 등장한 그들은 다기한 혼돈 속에 놓여 있다.

우레탄과 장난감 비행기로 9·11 테러 장면을 재현하는 등의 아이러니한 매체 영상 작업을 하는 작가 진기종씨는 요즘 화랑가의 유망작가 중 한 명이다. 지난해 아라리오 갤러리 전속작가가 된 그는 지난봄 일본 요코하마 전시공간의 기획전을 마친 데 이어 6월 독일의 세계적 영상미디어센터인 ZKM 기획전, 7월 뉴욕의 아트오마이 스튜디오 거주 프로그램, 12월 아라리오 서울의 개인전 등을 소화해야 한다. 2005년 경원대 미대를 졸업한 뒤 불과 2년여 만에 자신에게 들이닥친 변화가 실감나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꿀릴 생각은 없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작품이 일찍 팔리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정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감성과 생각을 순환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새 20~30대 젊은 작가들은 가장 양질의 창작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대안공간뿐 아니라 지자체 미술관 갤러리의 공모전, 작가 지원 프로그램이 도처에 차려져 있다.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지원금 받으며 작업을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총감독을 지낸 프란체스코 보나미가 이탈리아 국제 기획전 참여작가를 고르기 위해 슬그머니 입국해 서울 연남동과 홍대 앞의 국내 작가들 작업실을 돌아다니며 작가들과 만났다. 2000년대 초반에 고독한 프로젝트 작업을 하면서 전위를 노래했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세계 곳곳의 기획자와 작가, 화랑주들이 한국의 스타 작가를 구하러 오는 시대다. 경매에서 약진한 젊은 작가들이 화랑들의 제작 지원을 받는 전속작가가 되어 미술시장의 주역으로 진입하자 화랑주들은 대안공간은 물론 학생들 작업실까지 들어가 작가 발굴에 올인하고 있다.

물론 급변한 창작 여건만큼이나 정서적 혼돈도 감내하기가 버겁다. 살벌한 경쟁의 포석 또한 도처에 깔렸기 때문이다. 작가 ㅇ씨는 “졸업 전부터 시장과 화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견디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동료 작가들끼리의 관심사는 작품이 얼마나 팔렸느냐로 바뀐 지 오래됐다. 기획자 최금수씨는 “전속·비전속 작가들끼리 눈치를 보며 작품의 판매 여부를 둘러싼 괴리감을 키우다가 서로 상처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전했다.

상업적 잇속으로 팔리는 그림을 은근히 채근하는 화랑, 경력 관리의 수단 혹은 매니저로 화랑을 생각하는 일부 작가들 사이의 갈등도 쌓인다. 현재 아라리오, 국제, 갤러리현대 등 주요 화랑의 전속작가는 50여 명 정도. 그러나 화랑과 원만한 교감을 이루며 전속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다.

전통 민화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온 작가 홍지연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지난달 개인전을 열면서 메이저 화랑인 가나아트센터와의 전속계약을 접었다. “계속 전속을 하고 시장에 노출되면 아직 어린 제가 실험하면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영영 못한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래서 홀가분하게 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쪽을 택한 거죠.”

미술계에서 또 하나 우려하는 건 작가들의 작품 콘텐츠의 획일화와 담론 부재이다. 일상의 이미지를 집요한 편집증적 수작업으로 그리거나, 극사실적 회화에 전념하는 것 등은 그 획일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를 낸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최근 트렌드인 광고·패션 등의 팝적인 이미지, 팬시한 분위기, 일상 사물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화법에다 사회참여적 메시지 등을 슬쩍 묻히면 일단 화랑가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다”고 했다. 그 결과로 미학적·사회적 이슈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청년미술 기획전들이 거의 사라졌다. 1990년대 청년미술의 지배적 조류이던 미디어 영상미술은 안 팔린다는 이유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미디어 영상을 하던 친구들은 이제 눌러앉아 극사실 그림을 그린다. 개인전들은 상업 무대 진출의 포석이 된 지 오래다. 젊은 유망주들의 발굴 무대이자 담론장 구실을 하던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의 경우 기획자 김선정씨가 떠나면서 청년작가들의 소통 마당 구실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된 것도 작가들에게는 큰 아쉬움이다. 작가 권오상씨는 “화랑 전속제 도입으로 처지가 달라진 동료 작가들과 공동체적 교감을 나눌 기회는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대안공간은 젊은 작가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미술시장의 거센 상업화 바람과 화랑들의 신진작가 마케팅에 밀려 점차 대안공간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작가들과의 고리는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이제 대형 화랑들이 경매사 운영은 물론 신진작가 발굴, 매니저 구실까지 도맡는 화랑가의 독점자본화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안공간의 디렉터들도 상업적인 외부 전시기획을 하거나 아트마케팅에 나서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안공간 루프의 서진석 디렉터는 “한국·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90년대 이후 자본과 아트의 결합이 급격히 일어나고 있다. 이제 그 관계를 긍정적 맥락으로 바꿀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 연말 자본 아트의 결합에 대한 대안 세미나를 준비 중인 그는 “대자본 화랑들에 비해 아트, 특히 작가들은 자본과의 결합 관계, 자본의 구조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아 일방적으로 이용당하고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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