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교수 인터뷰…여수 참사 때는 하지 않던 ‘조승희 사건’ 추모와 위로가 역겹다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박노자 교수는 ‘세계 시민’이다. 그는 러시아 태생이고, 한국 국적자이며,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노르웨이 오슬로다.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이 “불필요하고, 때때로 불편하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그는 분명 2001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 대해 발언하려면 시민공동체에 참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질문은 ‘한국의 민족주의’였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한국의 미국 중심주의’였다. 한국인에게 민족주의와 미국 중심주의의 경계는 모호했고, 둘을 구별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귀화를 위해 필요한 통장 잔고 2천만원
국적이 한국이다. 국적 취득의 계기는.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한국 여성과 결혼했고, 한국에 자주 오니까 아무래도 국적을 얻는 게 편했다. 또 한국에서 벌어지는 담론에 내부인으로 참여하고 싶었다. 외국인 신분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고 하면 “외국인이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결국 국적은 형식이다.
국적 취득 과정은.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국적을 취득하던 1999년까지만 해도 한국 국적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는 5년 이상 직장과 주소를 갖고 한국에 체류해야 한다는 게 조건이었다. 한국인과 결혼하면 그 기준이 2년으로 다소 완화된다. 귀화 시험을 보기 전에 재산이 얼마인지 확인하는 절차도 있다.
어떻게 했나.
=돈이 없어서 장인에게 2천만원을 빌려 통장 잔고를 ‘찍고’ 다시 돌려줬다. (웃음) 가난한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필기시험을 봤다. 한자투성이인 한국 근로기준법의 일부분을 해석하는 문제와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놓고 저자를 알아맞히는 문제가 있었다. 무지 까다로운 시험이었는데, 합격자를 화교, 일본인 또는 한국학의 세례를 받은 서구인으로 한정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시험은 1999년에 붙었지만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 2001년이 돼서야 여권이 나왔다.
‘조승희 사태’를 어떻게 봤나.
=신문에서 신부님들과 스님들이 이번 사건으로 숨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떠오른 것은 지난 2월의 여수 참사였다. 그때 숨진 외국인들에게 기독교든 불교든 그런 배려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노무현 대통령까지 나서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위로의 전화와 전문을 보냈다. 이것은 사과는 아니지만 사과의 간접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과 대한민국은 하등의 관계가 없다. 조승희는 어릴 때 한국을 떠났고, 이후 한국과 이렇다 할 관계도 없었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러나 여수 참사는 대한민국 행정부의 부주의로 일어난 비극이었다. 외국인들을 단속해서 사람이 살기 힘든 시설에 넣었다. 외국인 노동자 인권단체들과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노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묵묵부답이었다. 미국과 같은 높은 나라에는 납작 엎드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외면하는 모습이 아닌가. 역겹다는 느낌밖에는 안 들었다.
수많은 장·차관의 아이들은 어디에서 자라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한국인들의 뼛속에 뿌리 박힌 미국 중심주의다. 원인을 따지자면 이렇다. 한국 사람들이 받는 교육은 극도로 민족주의적이면서 서구 중심주의적이다. 우리 교육의 틀은 얼핏 민족주의로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구 중심주의다. 우리 역사 교과서는 우리 역사의 전개 과정을 서구 근대주의로 나아가는 목적론적 흐름으로 파악하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근대주의와 별 관계가 없는 실학이 근대주의적인 것으로 탈바꿈하고, 서구적인 의미에서는 민족주의로 볼 수 없는 의병들도 그렇게 묘사된다. 그 시각 속에서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를 지켜주는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된다. 서구 중심주의, 좀더 정확히 말해 미국 중심주의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그것과 겹쳐 나타나는 것이 인종주의다. 일상에서 백인종이 여타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뿌리 깊은 인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 남성들은 백인 여성과 한 번 자는 것을 (속된 표현으로) ‘백마 탄다’고 한다. 백인 여성과의 관계를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인종주의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권력자들의 상당 부분은 기독교 지상주의를 체화하고 있다. 그들에게 미국은 기독교인들의 고향이고, 기독교를 수호하는 선(善)의 국가다.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고려도 있었을 텐데.
=한국 지배계급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과 전략은 분명 문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노무현 정권의 논리 가운데 하나는 앞으로 수출에서 중국과 경쟁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되도록 빨리 미국과 FTA를 맺어서 미국 시장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조승희 사건이 FTA 추진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전체 무역의 30%는 중화권 무역이고 대미 무역은 13~14%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대한민국 지배계급은 대미 종속성이 강하다. 공부는 어디서 하나? 미국에서 한다. 거기서 최종 학위까지 받아야 여기서 어느 정도 행세할 수 있다. 한국의 수많은 장·차관, 외교부 공무원의 아이들은 어디서 자라나? 미국에서 자란다. 그런 큰일이 터졌는데 애들 때문이라도 당연히 호들갑을 떨게 되지 않겠나. 조선시대 사대관계는 상징적·문화적인 현상이었는데, 지금의 예속관계는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심층적이다. 미국인 이상으로 미국화돼 있다.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런데 일반인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민족주의에는 ‘자랑스런 한국인 콤플렉스’가 있다. 조승희 사건은 이를 뒤집은 충격이었다.
=세계 무대에 나가 활약하는 자국민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세계 체제로 편입되는 초기에 약소국 민족주의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다. 우리와 세계의 연결고리가 되는 누구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고약한 부분이 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좌파운동에 기여했다. 남의 나라에 가서 기여한 것인데 반체제적인 활동이니까 잘 생각을 안 한다. 지역적 편중도 심하다. 러시아나 중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열광은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에 견줘 대단치 않다.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만 하나님 떠받들듯 한다.
미국에서 활약하는 국민, 노르웨이에선 “그렇군” 정도
노르웨이에서는 어떤가.
=노르웨이도 미국에서 활약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군” 하는 정도로 반응한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노르웨이는 복지국가가 완성된 뒤 개인들의 생활이 극도로 안정됐다. 노르웨이가 미국보다 더 편하다는 인식이 있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의 야만성이 확인된 뒤 미국을 별로 동경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는가.
=쉽진 않지만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던 한국의 지배계급은 구한말 역동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한 세대 만에 친일로 변화했다. 100년 전 한국에서 미국의 영향은 전무했다. 그런 변화가 또 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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