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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갇힌, 우리 안의 ‘한국인’들

등록 2007-05-04 00:00 수정 2020-05-03 04:24

‘여수 참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수갑 찬 채 경찰 조사를 받고 보호소로 보내진 외국인 노동자들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유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부상자들의 쾌유를 기원한다.”(4월17일 노무현 대통령 1차 메시지)

“비극적 사건이 한국인 영주권자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으며….”(4월17일 2차 메시지)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 아래 사건이 조속히 수습되어 미국 국민들이 충격과 슬픔에서 하루빨리 벗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4월18일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위로 전문)

미국인이 죽었다면 어땠을까

4월16일 오전 33명이 숨진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노무현 대통령은 무려 세 차례나 미국 정부에 애도를 표하고 위로 전문을 보냈다. 한 번으로 끝났으면 일상적 업무로 봐줄 일이지만, 똑같은 말을 세 차례나 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청와대에서 발원한 한국 정부의 ‘과잉 대응’은 이태식 주미대사로 이어졌다. 그는 4월17일 워싱턴 인근 페어팩스시 청사에서 열린 추모예배에 참석해 “대사로서 슬픔에 동참하며 한국과 한국인을 대신해서 유감과 사죄를 표한다”고 말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보수언론은 개인의 범죄를 한-미 관계로까지 비약하는 ‘오버’를 보여줬다. 미국 언론이 한국의 과잉 반응을 ‘황당히’ 여길 때까지 이런 분위기는 유지됐다.

“송구한 마음으로 애도 드립니다.”(4월19일 사설 제목)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로 한 계단 도약의 계기를 맞은 한-미 관계에 이 사건이 행여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미국민의 다대한 심적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미국은 6·25 전쟁 때 3만6천 명의 군인을 희생시키며 공산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준 혈맹이다. 비극적이지만 우발적인 사건으로 한-미 관계에 금이 가선 안 된다.”(4월19일 사설 중)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인 2월11일. 한국 여수의 외국인 보호소에서는 10명의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가 화재로 숨진 사건이 있었다. 국가의 ‘잘못’으로 다수의 외국인 피해자가 발생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최현모 이주노동자인권연대 대표가 물음을 던졌다. “만약 여수에서 숨진 사람들이 미국인이었다면, 한국 사회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여수 외국인보호소에서 참사를 당한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재중동포와 아시아 출신이다. 국적은 중국·우즈베키스탄 등. 이들은 광주·전남 일대에서 붙잡혀 ‘쇠창살 보호실’에 수용된 불법 체류자들이었다. 일요일 새벽 화재가 일어났고, 9분 동안 잠금장치를 열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3월6일 “재중동포 김아무개씨가 일으킨 방화”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화재 당시 근무를 게을리한 출입국관리국 직원 등 4명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정부는 관리 소홀을 인정하고 사망자 10명과 부상자들에게 ‘국가 배상’을 실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없었다. 주무부서인 법무부도 중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최 대표는 “김성호 법무부 장관이 유족들에게 유감을 표시한 것 외에 정부의 행동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도 마찬가지였다”며 “보수언론은 방화 여부와 관리 소홀에 초점을 맞췄고, 이주 노동자의 인권이나 이주 정책 등 구조적인 문제는 뒷전에 뒀다”고 말했다.

정신적 후유증 “철제 파이프에 목을 맸다”

국내 언론들이 사망자의 인적사항과 방화범의 과거 행적을 추적하고 있는 사이, 사건 당일 화재 건물에 있었던 외국인 수용자들은 여수의 한 종합병원으로 후송됐다. 여기서 부상자와 비부상자가 가려졌고, 비부상자들은 버스에 태워 여수 경찰서로 이송됐다. ‘비부상자’로 분류됐던 유세비 무하마드(30·이란)가 말했다.

“노동자들은 버스에 앉아 수갑을 찬 채 기다렸고, 4명씩 경찰서에 들어가 조사를 받았어요. 그렇게 6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식사로 제공된 김밥도 수갑을 찬 채 먹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렇게 버스에 갇혀 있었다. 언론이 이 사실을 몰랐는지, 혹은 알고도 당연스러워 보도를 하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경찰 조사가 끝나고 노동자들은 청주 외국인보호소로 옮겨졌다. 이들이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30분. 동료가 죽어나가는 등 심리적 충격을 겪고서도 정신적 안정을 취할 시간을 주지 않았던 셈이다.

유세비는 아직까지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는 “4월 초 청주 외국인보호소의 화장실 철제 파이프에 수건으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유리창을 깨는 등 난동을 부린 적도 있다. 여수에서 청주까지 유세비와 동행한 김경철(42·중국)씨는 “이 와중에서도 청주 외국인보호소는 유세비에게 창문값 배상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상재 이주노동자인권센터 교육홍보팀장은 사건 초기부터 4월 초까지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는 “활동 과정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가장 큰 벽이었다”고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여론은 2월16일 장례식을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김성호 법무장관이 장례식장을 방문하자 대책위 소속 회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대책위와 경찰·법무부 직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여수 화재 합동분향소는 난장판”(2월16일 )이었다. 이런 보도가 잇따르자 인터넷에서는 “중국인들이 보상금을 더 타내려는 수작”이라는 내용의 글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팀장은 “이때부터 갑자기 한국 대 중국의 문제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지 시민단체와도 여수 참사에 대한 대응을 두고 강·온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세계박람회를 준비하고 있던 여수시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유치가 좌절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고, 시민단체도 이 분위기를 거스르기 힘들었다.

2010년, 이주노동자 100만 명 시대

한국 정부가 잘못한 사건은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고, 미국 사회의 병리 현상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스스로 사과하겠다고 나선다. 시사주간지 은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이후 “한국인들이 집단적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한국 민족주의가 발현하는 방식은 상대 국가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2003년부터 한국에서 산 유세비는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한다. 한영 대역문고 읽기를 즐기는 그는 “된장국과 삼겹살, 김밥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재중동포 김경철씨는 “중국말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며 자신이 “중국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유세비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인식하는 김경철씨는, 우리가 품지 못하는 우리 안의 한국인들이다. 2010년에는 이주노동자 100만 명 시대가 된다. 이주 인구는 200만 명이 될 것이다. 한국판 ‘조승희 사건’이 발생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때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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