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한·일 공동제작 다큐멘터리 의 주인공 이희자씨의 투쟁</font>
▣ 고베(일본)=후루가와 마사키 고베시 공무원·의 일본 쪽 주인공
2005년은 일본에서는 전후 60주년이 되는 해로 여러 방송에서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이 다뤄졌다. 한국에서는 해방 60주년, 그리고 식민지 지배의 시작인 을사늑약으로부터 꼭 100년이 되는 해다. 그 기념해야 할 해에 한·일 시민단체가 공동작업으로 제작한 것이 한·일 공동 다큐멘터리 다.
아버지의 발자국을 좇기 위해 유족회 활동
작품의 제작 기획은 2003년부터 시작됐다. 내가 지원하고 있는 ‘재한 군인·군속 재판’의 한국 쪽 원고 단체 사무국장인 김은식씨와 서울에서 한잔하면서 “이 기념해야 할 해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라며 나눈 이야기가 계기가 되었다. 아시아 전쟁 피해자의 ‘슬픔과 분노’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일본 젊은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화가 좋지 않을까. ‘불합리한 전후 처리 시리즈’로 3부작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서 나는 그 자리에서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2004년 가을부터 이야기는 급속히 구체화됐다.
3부작의 테마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짊어져야 했던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었다. 첫 번째가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자’, 두 번째는 ‘조선인 B·C급 전범’, 세 번째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장소에, 게다가 침략전쟁의 영령으로 모셔져 있는 ‘야스쿠니신사 합사’문제였다. 모두 재한 군인·군속 재판의 주요한 테마이기도 하다.
2005년 1월, 서울에 모인 한국과 일본의 스태프들은 본격적인 논의를 가졌다. 첫 작품의 테마를 ‘야스쿠니신사 문제’로 정하고, 타이틀을 ‘안녕, 사요나라’로 하기로 결정한 뒤 3월 일본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타이틀은 김태일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불행한 과거여 사요나라, 평화로운 미래야 안녕’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태평양전쟁 중 한반도에서 일본의 군인·군속으로 동원됐던 한국 거주 생존자와 유족 414명이 2001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재판이 재한 군인·군속재판이다. 영화 의 주인공인 이희자씨는 그 원고 단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덧붙여서 나는 재판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지원하는 모임의 사무국장으로서 한·일 간의 중개를 담당해왔다.
이희자씨의 아버지 이사현씨는 1944년 일본 육군에 군속으로 징용돼 1945년 중국의 계림 근처에서 부상을 당한 뒤, 병사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했던 이희자씨 모녀는 전후에도 아버지의 귀가를 계속 기다려야 했다. 이후 이희자씨의 어머니는 재혼하지만,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이희자씨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중간에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이희자씨는 자녀 양육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1990년대, 한국 사회가 민주화의 꽃을 피우고 있을 즈음, 아버지의 발자국을 좇기 위해서 유족회 활동에 참가하게 된다.
진실에 눈을 감은 ‘어용 재판’
유족회 활동을 통해 1992년에 아버지의 전사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1997년에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것을 일본 자료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사현씨가 야스쿠니에 합사된 것은 1954년의 일이다. 사망한 사실을 알 때까지 4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제사 모실 권리’를 빼앗긴 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이다. 게다가 합사명은 징용됐을 때의 ‘李原思蓮’이라고 하는 창씨명 그대로다. 피해자 유족에게 반성이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의 무신경에 이희자씨는 잠 못 드는 분노를 느껴야 했다.
“상처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유족에게 전사 통지조차 하지 않은 일본 정부가 유족들이 모르는 사이에 야스쿠니신사에만 통지했고 무단으로 합사하고 있다. 더 이상의 굴욕이 있을 수 있는가. 아버지는 죽어서도 계속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다”며 이희자씨는 소송을 제기했다. 영화는 그 이희자씨의 활동을 좇고 있다. 한국의 천안에 아버지의 묘가 있다. 그러나 묘석에는 아무런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다. “야스쿠니신사의 합사가 철폐되면 그때 이름을 새기겠다”고 이희자씨는 말한다. 전쟁 피해자의 슬픔과 분노가 거기에 응축돼 있다.
2006년 5월25일, 재한 군인·군속 재판의 판결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내려졌다. 판결은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인정을 모두 방기한 채, 국가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전대미문의 최악의 판결”(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이었다. 최대의 관심을 끈 것은 야스쿠니신사 합사 문제였다. 판결은 “확실히 피고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신사와 협력한 사실이 인정되며, 이 시기에 후생성의 회답에 의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이 인정되지만 피고 일본 정부가 실시한 전몰자 통지는 일반적인 행정 범위 내의 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야스쿠니신사에 ‘제신명표’라는 명부를 건네주고, 국가 예산을 지출해 전쟁 전의 방식을 답습한 행위를 ‘일반적인 행정의 범위’라고 하며 정교분리 규정의 위헌 판단도 포기한 것이다. 또 일본식 이름으로 합사시켜놓아 식민지 지배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피해 감정에도 모두 등을 돌렸다. 확실히 진실에 눈을 감은 ‘어용 재판’이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한·일 양국 스태프 간에 여러 번 충돌이 있었다. 시사회 때 나온 앙케트를 참조해 한·일 양국 스태프들은 밤을 지새우며 논의를 했고, 여러 벽을 넘어왔다. 가장 큰 논란은 엔딩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일본 쪽은 “엔딩은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묘석 신이 좋다. 일본인에게 문제의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여운을 남긴 채 끝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한편 한국 쪽은 “화해를 상징하는 뜻에서 이희자씨와 일본 젊은이가 포옹하는 신으로 끝나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양쪽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렸다. 실제 영화의 엔딩은 한국 쪽의 의견대로 ‘화해’로 끝나 있다. 관객의 감상을 읽으면, “그때까지 우익들의 폭력적인 신이 계속되다가 마지막 신에서 감동이 극대화됐다”라는 반응이 많았고, 나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올해 2월, 다시 합사취하 소송
그러나 현실 재판에서의 판결은 앞에서 말한 대로 ‘화해’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이희자씨는 “일본에 대한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왔다. 오늘의 판결에 실망하기보다 앞으로의 활력이 될 거라 느끼고 있다.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다. 많은 일본인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없었으면 절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힘을 하나로 모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희자씨는 다음 목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2월, 일본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면 야스쿠니신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야스쿠니신사 합사취하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에서의 문제 제기로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일본인 자신의 문제인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잘못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다는 상징이다. 전후 60여 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한·일 공동의 노력으로 하나의 일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투쟁을 함께해나가려 한다.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후루카와 마사키(古川雅基)씨는 고베시의 공무원으로 199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인 야스쿠니신사 합사취하 소송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2005년 한·일 공동제작 다큐멘터리 의 일본 쪽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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