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보다 못한 지위로 무조건 명령 따라야 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그들에게 B·C급 전범의 낙인을 찍은 재판 과정도 심각한 문제점 드러내
▣ 이세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진실규명위원
B·C급 전범이란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 주도의 전쟁범죄자 재판을 통해 포로를 비인도적으로 대한 죄 등으로 처벌받은 전쟁범죄자를 뜻한다. 이렇게 처벌받은 B·C급 전범 가운데 조선인 148명과 대만인 173명이 포함돼 있다. 조선인 148명 가운데 절대다수인 129명이 포로감시원이었다.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었으나, 일본의 침략전쟁에 군속으로 동원돼 포로감시원으로 강제 노역에 종사했다.

광고
제네바 조약의 존재조차 안 알려줘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동원은 말레이반도 상륙, 싱가포르 점령을 비롯한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의 승전을 배경으로 이뤄졌다. 동남아시아에서의 잇단 승리로 일본 군부는 영국·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미국 등 수십만 명의 연합국 포로들을 떠안게 됐다. 포로 관리의 필요성을 절감한 일본 군부는 1941년 12월 육군성에 포로정보국을 설치했고, 이듬해 5월부터 포로감시원을 모집하게 된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포로감시원을 충원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 반강제적 할당을 줬다. 군 직원은 중앙에서 할당받은 인원이 미달된 경우, 식량배급 중지 같은 강압적 수단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군내 신분은 ‘군속’이었다. 포로학대 혐의로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김종연(창씨명 가네미야 쇼렌)은 법정 진술에서 자신은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군속으로 일본군 내에서 이등병·일등병의 지시를 받아 포로를 호송하는 일을 했으며, 자신에게 작업을 지휘 감독하거나 포로를 지휘 감독하는 중요한 업무가 맡겨진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포로감시원의 임무가 포로의 수용소 출입, 탈주 감시, 화재·절도 등 수용소 내의 소동 예방, 포로와 원주민들의 싸움 예방, 작업장까지 포로 인솔 등이었다고 진술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 지휘체계 아래서 어떤 재량권도 갖지 못한 채 일본군의 지휘 명령에 따라 감시 역할만을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포로감시원들은 일제가 패망한 뒤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복수심으로 인해, 그리고 연합국의 옛 식민지인 동남아시아 국가 주민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에 따라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광고
일본은 포로에 대한 보호, 인도적 취급, 포로의 권리 등을 규정한 제네바조약에 조인했으나 비준하지 않았다. 개전 이후 연합국이 제네바조약의 준수 여부를 문의해왔을 때 일본 쪽은 “준용한다”는 회답을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이를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포로감시원은 일체 조선인과 대만인으로 충당됐다. 조선인과 대만인이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된 배경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본 군부가 일본 자체의 병력 부족만을 고려했을 뿐 포로 관리가 심각한 전후 처리 문제가 될 개연성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주장과, 오히려 전후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을 예견했기에 식민지 출신의 조선인·대만인을 포로감시원으로 동원했다는 주장이 맞서 있다.
일제는 포로감시원에게 제네바조약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조약의 존재조차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이 배운 것은 “연합국의 포로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 전부였다. 포로학대 혐의로 사형당한 조문상(창씨명 히라하라 모리츠메)은 동원된 포로감시원들이 받은 교육은 “체구가 큰 포로에 맞서려면 폭력밖에 없다”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육군성은 ‘포로처리 요령’을 통해 백인 포로를 군사상의 노역에 이용할 것을 지시했으며 전후 A급 전범으로 교수당한 도조 히데키는 “하루도 무위도식하는 일 없이” 노동력을 활용할 것을 명령했다.

광고
검찰쪽 증거 일방적으로 채용
일본군은 원래 공병부대의 조직적인 구성이 연합군에 비해 미흡했고, 기계 도입도 늦은 편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혹은 점령지 현지인을 강제 동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로를 활용 가능한 노동력으로 간주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 나치에 붙잡힌 영미 포로의 사망률이 4%에 못 미친 데 견줘 일본군에 잡힌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27%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한국 출신 포로감시원들이 전후 심각한 전쟁범죄자로서 처벌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영화 로 잘 알려진 타이와 미얀마를 잇는 ‘태면철도’ 건설 현장이었다. 이곳에는 강제 노역에 동원된 연합국 포로와 800~1천 명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있었다. 포로 감시 과정에서 빈약한 병참, 과도한 노역과 학대로 포로 희생자가 속출했다. 이때 희생된 1만3천 명의 연합군 포로에 대한 책임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도 돌아가게 된 것이다. B·C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27%가 포로 관련 혐의였고, 사형자의 11%가 포로수용소 관계자였다.
재판의 근거가 된 것은 포츠담선언 13항 “일체의 전쟁범죄인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연합국은 전쟁이 끝난 1945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전쟁범죄인 재판 규정을 급조했다. 그 법률은 오늘의 기준으로 볼 때 증거 채택이나 인정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 출신 B·C급 전범에 대한 처벌이 합리적인 법적 근거와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쟁범죄 재판 규정에 “그 어떤 것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둘째, 영국·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에서는 현대 재판에서 기피청구 대상으로 꼽히는 일본군에게 잡혔던 옛 연합군 포로들이 재판에 간여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재판의 공정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다. 셋째, 구체적인 죄상 조사, 진술 등이 생략되는 등 불충분한 검찰 쪽의 증거가 일방적으로 채용됐을 뿐 아니라 피고인에게 진술의 기회도 주지 않는 등 변호의 기회가 불충분했다. 넷째, 실제로 증인이 출두해 증언을 하고 피고 쪽이 반대신문을 한 경우가 드물었다. 대부분은 본국에서 사진으로 피고를 확인하고 진술한 내용을 유죄의 증거로 삼았다. 이러다보니 처벌받은 사람이 가해자 본인인지 불확실한 경우가 있다. 다섯째, 밀라이 학살 사건 같은 현대 국제 전범재판에서도 위관급 지휘관이나 참모장교의 책임은 인정하고 있으나 상관의 강압적인 명령에 따랐을 뿐인 최하위 졸병을 처벌하지 않는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본군 내에서 이등병보다도 못한 신분이었다.
누군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희생을 고려하지 않은 비인도적 포로정책을 입안 수행한 책임자보다 말단의 최전선에 배치된,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출신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수많은 포로 희생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갔다. 그들은 전범이자 대일 협력자라는 오명을 쓰고 고통받았고, 주변으로부터 백안시당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일본 사회에서도 철저히 배제된 채 경제적 궁핍 속에서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과연 전범이었을까. 누군가는 이제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결정문 분석] ‘5 대 3의 희망’ 정형식·김복형·조한창도, 파면에 이견 없었다
‘불소추특권’ 잃은 윤석열…형사 법정 여기저기 불려다닐 처지에
[전문] ‘윤석열 파면’ 헌법재판소 결정문 ①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명문”…헌재 선고 요지 칭찬 릴레이
헌재 “야당 입법독주? 거부권 행사했는데”…윤석열 파면 ‘핀셋 판단’
오늘부터 다음 대통령 예비후보 등록…6·3 대선 유력
윤석열 파면에 “아이고, 나라 망했다”…전광훈 “내일 3천만명 모이자”
[전문] 윤석열 “기대 부응 못해 안타깝고 죄송하다”
‘가시방석’ 떨쳐낸 대구 시민들 “묵은 체증 내려가…힘든 지형 체감”
헌재 간 국힘 의원들 “윤석열 파면”에 내뱉은 첫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