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달리 개별 산업의 이해관계가 전달·조정되는 길 꽉 막혀…통상 비밀주의만 유지하면 ‘마늘 협상 파동’ 같은 일 재현될 수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통상관련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제620호(2006년 8월1일)에 실은 글에서 눈길을 끄는 사례를 하나 든 적이 있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 앨리스 데트윌러의 얘기였다.
데트윌러는 미국 여성농업인협회 부회장을 지낸 뒤 농업 분야 통상자문위원회의 과일·채소분과 소위 위원으로 임명됐다. 그에겐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과일과 채소 분야 통상 협상의 목적과 전략에 대해 조언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1975년 발효된 통상법에 산업별 이익을 통상 협상 때 반영할 수 있도록 부문별 자문위원회를 두도록 한 데에 따른 것이다.
민간대책위 구성부터 미심쩍어
데트윌러를 비롯한 과일·채소 분과 위원들은 미국이 추진하는 모든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과일과 채소 분야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지를 평가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는 미국 무역대표부와 미국 의회에 제출된다. 축산분과, 곡물분과, 가공식품분과, 설탕분과, 면화분과의 위원들도 마찬가지의 임무를 띠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개별 산업의 이해관계는 협상단에 전달돼 반영된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농업인 가운데 정부의 통상정책과 협상에 농업계의 이익을 반영하는 통로 구실을 할 사람이 있을까? 농업 외 다른 분야는 또 어떨까?
한국에도 미국의 통상자문위원회와 비슷한 게 있긴 하다. 지난해 4월18일 출범한 ‘한-미 FTA 민간대책위원회’(민간대책위). 민간대책위 홈페이지(www.yesfta.or.kr)에는 ‘업계 의견을 (협상팀에) 전달하는 것’이 설립 목적의 하나로 돼 있다. 이 목적은 얼마나 실현되고 있을까?
업계 의견이 협상팀에 얼마나 전달됐는지를 따지기 전에 민간대책위의 구성부터 미심쩍다. 6명에 이르는 공동위원장의 면면을 보자.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 김용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기협) 회장,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정대근 농업협동조합중앙회(농협) 회장, 유지창 은행연합회 회장.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들은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반면, 노동계의 이해를 반영할 통로는 한 곳도 없다. 농협에 대한 농민과 농민단체들의 불신이 뿌리 깊은 현실을 감안할 때 농협 회장을 농업계의 통로로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공동위원장 아래 설치된 업종별 단체에서도 농업, 노동계의 이익을 담아낼 그릇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경제단체 대표들 또한 법적 권리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민간대책위는 홈페이지 이름(yesfta)의 ‘yes’라는 대목에서 이미 자기 성격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개별 산업계의 이익을 반영하는 통로뿐 아니라 산업 분야 사이에 이해관계가 어긋날 때 조정하는 절차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대통령 직속으로 통상정책·협상자문위원회(ACTPN)라는 이해충돌 조정 장치를 두고 있다.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소를 기르는 목장주인 위스 윌리의 예를 보자. 미국 육우협회장을 역임한 윌리는 2004년 ACTPN 위원으로 임명됐다. 위원회는 미국의 전반적 이익이란 관점에서 산업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모든 FTA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한다. 또 USTR는 위원회 활동에 필요한 인력과 정보를 제공하도록 돼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산업별 이익을 균형 있게 반영하는 통상 정책이 만들어진다.
쌀 개방 협상 때도 이면합의를 국가기밀로
반면, 한국의 경우 나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산업계와 의논할 법적 권리를 보장받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2002년의 ‘마늘 협상 파동’ 같은 일이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는 폭발성을 그대로 안고 있는 셈이다. 마늘 농가의 피해와 한국산 휴대전화, 폴리에틸렌 분야의 이득(중국의 보복 관세를 받지 않는 데 따른)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해당사자들을 참여시켜 저울질하는 절차를 거쳤다면, 농민들의 분노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중국산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를 믿고 마늘 농사를 더 짓는 실수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산업 분야별 이익을 반영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통로가 없는 현실은 필연적으로 통상의 밀실주의로 이어진다. 웬만한 건 다 ‘비밀’로 분류돼 이해당사자들이나 국회 쪽 모두 통상 협상의 진행 상황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난감한 구조다. 2000년 7월에 타결된 한-중 마늘 협상 합의문의 부속 문서에 ‘세이프가드 연장을 2년 반으로 제한한다’는 조항은 (국가정보원법에 따른) ‘국가기밀’이었다. 국·가·기·밀! 이는 2004년 쌀 개방 협상 때도 고스란히 되풀이돼 농민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면합의’(쌀 관세화 유예 연장을 위해 미국, 중국 등 개별 국가들과 벌인 협상의 합의 내용)를 ‘국가기밀’로 분류했다.
한-미 FTA 협상에서도 비밀주의의 유구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공식 협상에 들어가기도 전에 쇠고기, 자동차, 의약품, 스크린쿼터 등 ‘4대 선결 과제’를 들어주고 ‘대외비’에 부쳤다. 미국과 벌이는 ‘외부 협상’만 있을 뿐 국내 이해당사자들의 대립을 조정하고 설득하는 ‘내부 협상’은 관심 밖으로 여겨진다.
한-미 FTA 협상 관련 문건을 인용해 보도한 와 의 1월18일치 기사에 대한 정부의 반응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당시 기사는 “정부가 반덤핑 제재 등 ‘무역구제’ 분야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다른 분야를 얻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는 게 주내용이었다. 핵심 과제로 꼽아온 무역구제 분야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정부는 이 보도 뒤 내용 자체나 영향에 대한 설명보다 문건 유출자 색출에 열을 올렸다. 이를 두고 “FTA 협상 체결이 어려워지다 보니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있다”(국회 한-미FTA특위 소속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는 얘기까지 나왔다.
“가급적 많이 알려질수록 좋은 것”
지난해 1월10일 서울행정법원은 통상 협상과 관련한 의미 있는 판례를 남긴 바 있다. 쌀 관세화 유예 과정의 이면합의를 공개하라며 농민단체가 낸 소송에 대한 결정이었다. 언론에선 ‘기각’ 결론으로만 짤막하게 다뤄진 당시 판결문에는 눈길을 끈 대목이 포함돼 있었다. 정부가 이면합의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로 든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부정당한 것이다. 재판부는 정부가 쌀 협상 이면합의를 국가정보원법과 보안업무 규정에 따른 ‘3급 비밀’로 분류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밝혔다. 이면합의 내용을 담은 정보가 ‘누설되는 경우 국가 안전보장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비밀’(보안업무 규정 4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송기호 변호사는 “통상 협상이라는 게 외교나 안보 관련 국제협상과 달라서 사실 대단한 게 아니다”며 “협상 전략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중대한 영향을 받는 산업계 이해당사자들에게 가급적 많이 알려질수록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협상은 국가 사이뿐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의 이해 대립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어느 선을 그어 이해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해당사자들이 내부 토론을 통해 부딪치는 사안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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