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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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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에서 소설이 태어난다

등록 2007-01-26 00:00 수정 2020-05-02 04:24

일본 출판 기업 고단샤의 월간 문학잡지 편집장 가라키 아쓰시 인터뷰…“편집자는 작가가 쓰고 싶은 것 끄집어내야… 문제 제기 없을 땐 신뢰하지 않아”

▣ 도쿄=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고단샤는 1909년 만들어진 종합 출판사다. 현재 1024명의 직원이 1545억엔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주간지, 월간지, 여성지, 유아지, 역사지 등 20여 개 잡지를 내고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순문학 중심의 , 읽을거리와 수필 등이 실리는 , ‘본격파 종합지’ 가 있다. 는 미스터리, 공상과학(SF) 등의 장르소설을 제외한 작품을 모두 다룬다. 신인상을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로, 무라카미 류가 로 데뷔했다. 의 편집장 가라키 아쓰시를 만나, 시대에 맞는 일본 소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들었다. 그는 경력 20년 이상의 베테랑 편집자다.

독자 수가 다양성의 원동력

일본 번역문학 비율이 한국에서 최근 10년 동안 성장세를 보였다. 2005년에는 줄곧 1위였던 미국을 앞서기도 했다.

=구체적인 통계수치는 모르지만 최근 한국에서 일본 소설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1위가 됐다는 통계는 놀랄 만하다.

일본 문학의 힘은 다양성에서 온다고 본다. 독특한 장르, 다양한 장르가 발달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먼저 상당한 ‘독자의 수’에 있다고 본다. 독자가 많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수요가 있다. 일본에서 미스터리 소설, 연애소설, 역사소설이 인기지만 이것이 일본만의 독특한 장르는 아닐 것이다. 일본 특유, 독특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본다. 일본은 1700~1800년대부터 책을 읽는 문화가 있었다. 책이 지식인, 독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서민과 남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즐겁게 책을 읽는 전통이 있다. 현대적인 요인으로 들자면 출퇴근 시간 때문이다. 전철 안에서 코믹류를 읽는 인구는 줄어든 반면, 휴대전화로 메일을 보내는 인구는 급증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소설을 읽는 사람은 변함이 없다. 작가의 다양한 도전에 대해서 기다려주고 수용하고 읽어주는 문화도 있다.

일본의 문학 관련 출판편집 시스템에 대해 알고 싶다.

=편집자에게 단순히 작품을 넘겨 소설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기본적으로 제일 처음 거치는 것이 편집자와의 ‘사전회의’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만들자” 하는 회의를 서로 아이디어를 내면서 진전시킨다. 그런 부분이 예를 들면 영화 기획과 같을 수는 있으나, 사전에 모두 짜놓고 감독 찾듯 작가를 찾거나 하는 일은 없다.

사전회의 등은 한국 출판 상황에서, 특히 소설 분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안 그렇다는 말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해왔기 때문에 세계 어디서나 공통으로 이렇게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무엇을 써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쓰고 싶은 것은 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런 거 써도 될까, 또는 지금 이런 것을 써도 될까 등 여러 종류의 고민들이 작가에게 있을 수 있다. 작가적 성장의 단계나 쓰고자 하는 주제의 선택 등에 대해 면밀히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면밀한 사전회의’야말로 일본 출판문화에서 중요한 단계이며 출발점이다. 물론 집필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몫이므로, 편집자가 옆에서 일일이 이러쿵저러쿵 관여하지 않는다.

한국에는 회의가 없단 말인가?

사전회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처음 20~30매를 쓰는 단계에서 편집자와 상의하거나, 100매를 쓴 상황에서 이러한 방향성이 어떤가 하고 토론을 한다. 관련 자료를 모아가며 상의해 진전시켜나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마디로 일본은 이런 것을 당연시하는 출판편집 문화다. 결국 편집자는 작가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 ‘의지가 되는 존재’라고나 할까.

편집자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과연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문학비평 쪽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편집자는 작가에게 지시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전회의는 어디까지나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회의를 통해 작가 자신을 더욱 명료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문학평론 분야에서도 편집자의 아이디어 없이 탄생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에 대한 차이를 두지 않는다. 물론 영화나 게임을 바탕으로 소설화(노벨라이제이션)하는 경우는 높이 평가받기 힘들다.

편집자가 스토리를 짜고 작가를 선정하고, 이후 영화화나 만화화까지 생각하는 대형 기획도 많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타이틀 결정이나, 스토리 설정까지 다 한다면 그게 대리 쓰기지 소설인가? 작가는 하청업자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전회의를 통해 편집자는 제안을 하고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협력하는 파트너다. 편집 작업의 시작이기도 하고, 편집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의 하나다. 예를 들어 작가의 작품과 초고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안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면, 오히려 작가가 그런 편집자를 신용하지 않는 경향이 일본에는 있다. ‘내 작품이 마음에 안 드나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니 파트너가 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가 지난해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다. 고단샤에서도 다수의 작품을 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 오쿠다 히데오를 일약 작가 반열에 올리고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그가 초기에 고단샤에서 발표한 라는 미스터리였다. 일본에는 작가 등용문이 되는 신인상이 많다. 신인상에는 약 2천 편의 응모작이 도착한다. 먼저 편집자가 검토하고, 젊은 평론가들의 전형위(예선심사)를 거쳐 최종심사위원단에 5편 정도가 넘겨져 수상자가 결정된다. 는 10월 말 마감이고, 예비전형과 편집부 심사, 최종심사를 거쳐 다음해 5월 초에 발표된다.

판매수익의 위기라기보다 내용의 위기

일본의 베테랑 소설 편집인으로서, 한국에서 오랫동안 화두가 되고 있는 ‘문학의 위기’에 대해, 또 일본 문학에 대해선 어떤 전망을 갖는가.

=문학의 위기라면 소설 자체의 위기다. 판매수익의 위기라기보다는 내용의 위기라 말하고 싶다. 과거에는 전쟁이니 원자폭탄이니 하는 공유 인식이 있었으나, 현대 일본에는 그것에 필적하는 경험이 공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젊은 작가들이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하고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과제다. 이런 문제는 편집자가 작가와의 협의 속에 계속적으로 충실히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다. 한국에서 현재 일본 소설이 인기 있다는 것은 한국 소설의 발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감동하고 놀라고 하면서 우리도 쓰고 싶다 하는 젊은 작가들의 욕망이 새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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