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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의 기술에 충격받았다”

등록 2006-11-30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내 유명 유학 전문학원에서 일했던 김씨의 ‘아이비리그 찍어내기’ 폭로…성적표 ‘뻥튀기’는 예사, 고액을 받고 추천서를 미화하거나 대신 써주기도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박주희 /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기자 hop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국내 유명 유학 전문학원에서 일했던 김성종(가명)씨. 이 지난 10월 외국어고 유학반 문제를 보도하고 일주일이 채 안 돼, 김씨는 취재진을 찾아왔다. 김씨의 손에는 학원에 일할 적에 미리 챙겨나온 각종 유학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서류를 하나하나씩 보여주며 유학원의 비뚤어진 ‘아이비리그 보내기’ 편법을 폭로했다.

국문 성적표 3.08이 영문 3.6으로

김씨는 10월21일 인터뷰에서 “일부 유학원이 고액을 받고 교사 추천서와 에세이 대필, 내신성적 조작 등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다”며 “아이비리그 대거 합격을 선전하는 일부 교육기관의 주장에도 거품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김씨는 유학원에서 일하면서 ‘미국 명문대생을 찍어내는 기술’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미국과 한국의 교육제도 및 교육윤리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각지대에서 각종 편법을 십분 활용해서 쉽게 미국 대학에 가는 거죠.”

김씨는 미국 대학의 입학시험에 전형 요소가 되는 내신성적이 부풀려지는 과정과 엉터리로 작성되는 추천서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털어놨다. 먼저 김씨는 유학원에서 일할 때 미국 대학에 보낸 특목고 출신 두 학생의 영문 성적표를 내놨다. ‘트랜스크립트’(transcript)라고 쓰인 영문 성적증명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두 학생의 성적표는 A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몇 년 전에 졸업한 김기식(가명)군의 성적표는 1학년부터 3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이 일반수학(B)을 제외하곤 모두 A였다. 이미진(가명)양의 성적표도 2학년 2학기까지 모든 과목이 A였다.

또 다른 학생인 박상진(가명)군의 국문 성적표와 영문 성적표를 견줘보자 ‘성적 부풀리기’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박군의 국문 성적표는 대부분 과목이 ‘미’나 ‘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 성적표를 영문으로 옮긴 성적표에선 ‘미’가 ‘B’가 되고, ‘우’는 ‘A’로 변신했다. 이렇게 성적을 한 차례 ‘뻥튀기’한 뒤 미국 대학에 내는 이 학생의 내신성적 총평점(GPA)을 계산해보니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진짜(국문 성적표)와 가짜(영문 성적표) 성적의 총평점을 계산해 비교해봤어요. 1학년 성적은 3.08에서 3.6으로 올랐고, 2학년 성적은 3.57에서 3.83으로 올랐죠. 이 학생이 SAT를 얼마나 잘 봤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미국 동부의 명문대를 갔습니다.”

일부 영문 성적표에 ‘80점 이상이 A’라는 단서가 나와 있기는 하다. 하지만 A~E 등급으로 나눌 경우, 통상 90~100점이 A, 80~90점이 B인 점을 감안할 때 이런 배점기준은 명백한 ‘내신 부풀리기’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부가 제시한 성적표 양식에는 전체 석차를 병기하도록 하고 있지만, 마치 전체 석차를 내지 않는 것처럼 석차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직접 써야 하는 영문 에세이가 유학원에 의해 첨삭이 이뤄지기도 하고, 심지어 대필도 이뤄진다고 전했다.

한국 카운슬러들은 최고 평가 남발

학원에서 써주는 추천서도 부풀려지기는 마찬가지다.

김씨의 말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내신성적(GPA) 외에 고교 정직원인 진학담당 교사(카운슬러)나 학생을 잘 아는 교사가 쓰는 추천서를 첨부해야 합니다. 카운슬러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추천서를 써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고교 교사 이름으로 추천서를 대신 써주거나 번역하면서 ‘미화’해서 보내는 등 다양한 편법이 동원되지요. 아예 유학원에서 먼저 추천서를 작성한 뒤, 담임 교사의 사인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유학원은 학교 교사에게 촌지를 주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미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김씨가 설명하는, 추천서가 ‘미화’되는 과정은 이렇다. 추천서 평가 항목에 △학업성취도 △지적 장래성 △창조성 △리더십 등 15개가 있는데, 카운슬러가 이를 △평균 이하 △평균 △좋음 △매우 좋음 △뛰어남 △아주 뛰어남 △일생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한 학생 등 7개 등급으로 평가한다. 김씨는 “그런데 ‘일생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한 학생’은 미국 카운슬러가 몇 년 동안 학생을 지도하면서 정말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학생에게만 신중하게 주는 평가”라며 “한국에서는 이런 고평가가 남발되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국에선 추천서 작성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학생과 학부모가 참여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지만, 우리 사회가 워낙 이에 대한 윤리의식이 느슨해서 미국식 기준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김씨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유학 전문학원은 SAT 강의를 기본 메뉴로 내세우면서도 고교생의 미국 대학 진학 컨설팅을 중요한 사업으로 하고 있다. 외국어고 가운데 유학반을 따로 두지 않거나 유학 컨설팅 ‘노하우’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학교는 학생들을 학원에 보내서 입학 절차를 밟도록 한다. 영문 성적표를 학교에서 발급은 하지만 실제 성적을 어떻게 표기할지 등은 유학원의 조언에 따른다는 것이다.

유학원에서 보통 10~15개 대학의 지원서를 써주면, 300만~500만원대에서 ‘시장 가격’이 형성된다고 김씨는 전했다. 하버드대 등 아이비리그 중심으로 구성된 지원서는 700만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미국 고교에서 입학한 학생들의 불평

김씨는 “시험 주관사인 칼리지보드가 공개를 허락하지 않은 기출문제가 나돈다는 말이 있다”며 “칼리지보드에서 공개한 문제일 수도 있고, 공개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지만 학부모들은 그런 기출문제를 많이 갖고 있는 과외 강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현재 한국 유학원, 외국어고의 관행이 미국과 한국 교육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며 “사교육 세력이 이런 사각지대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미국 현지에서도 미국 고교에서 입학한 학생들과 한국 외국어고에서 온 학생들 사이에 위화감이 있다. 현지 고교에서 입학한 학생들은 ‘한국에서 온 아이들이 편하게 온 것 아니냐’며 편치 않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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