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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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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 진보의 미래인가

등록 2006-11-01 00:00 수정 2020-05-03 04:24

패배의 기억을 안은 채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었던 일본 좌파 세력…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진보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 이기호 평화포럼 사무총장

꽤 오래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매일 새롭게 터지는 이슈들에 맞춰 열심히 성명서를 만드는 단체들이 생각하고 있는 한국의 미래 혹은 남북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다. 특히 진보 진영이 꿈꾸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경제성장과 민주화 투쟁을 체험한 우리 사회의 진보 진영이 꿈꾸는 분단 극복의 미래는 무엇일까?

북에서는 핵실험을 하고, 남쪽 제주도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한창인 요즘 한가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남북관계의 재설정, FTA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가속화 등 우리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변화의 물결에 근본적인 물음과 성찰 없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북한과 가까우면 진보가 되는가

북핵 문제는 우리 안의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은 물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었다. 어쩌면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규정된 세계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북핵 문제’는 본질적으로 국제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진보 진영이 북핵 문제에 대해 갈팡지팡하는 것 또한 북핵 문제가 담고 있는 수많은 변수와 불러올 파장을 쉽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좌파 진영은 ‘진보의 가치’에 대해 솔직하게 성찰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언급하면 ‘진실과 상상력’의 가치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좀 성급하고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이들 가치를 진보의 동력으로 복원해내지 못하는 그 순간, 진보 진영은 ‘식물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기는 대단히 어렵다. 진실을 놓고 수많은 담론과 정책이 경쟁하면서 진실을 새롭게 포장하고 각색하는 현실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은 대량살상무기 보유가 진실이라고 믿게 하는 데서 현실정치로 작동했다. 북한의 핵실험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6자회담 복귀와 관계없이 핵폐기를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은, 이런 모순된 대북정책을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우리 사회 진보 진영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진보 진영은 이를 방기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일부 그룹은 북의 핵보유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기초해 문제를 풀어가자고 주장한다. 어찌 보면 진보 진영 내부의 ‘선 통일’ 대 ‘선 평화’의 논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애써 강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현실로부터 거리를 둔 셈이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둬야 할 점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보려는 의지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거칠게 물어보자. 미국과 가까우면 ‘보수’고 북한과 가까우면 ‘진보’가 되는 것인가? 미국의 핵우산은 위험하고, 북한의 핵보유는 자주평화에 기여하는가? 거꾸로 한-미 동맹에 의한 핵우산은 안전하고, 북의 핵보유는 전쟁을 야기하는가? 적어도 ‘친북좌파’가 아니라 ‘반핵좌파’가 그 최대공약수가 될 수는 없는가?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친북좌파가 됐든 반북좌파가 됐든 ‘북’의 실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논의 역시 진실의 담론에서 생략될 수 없는 부분이다.

잠시 일본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보자. 일본에서 ‘진보’는 이제 사라진 개념이다. 1960년대 안보투쟁과 함께 사라진 추억의 단어로, 누렇게 바랜 헌책방의 중고서적에서 등장하는 단어다. 일본에선 진보세력이라는 표현 대신 ‘양심적 세력’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진보 진영의 쓰라린 패배의 역사가 있다.

1960년 안보투쟁에서 1969년 전공투가 도쿄대의 야스다 강당에서 연행되는 시기까지, 일본의 시민운동은 격렬한 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 반전운동, 환경운동, 혁신자치체운동 등 일본의 주요 운동들이 급성장했고, 전범 중 하나였던 기시 내각을 실각하게 하는 부분적 성공도 거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기 투쟁이 국가권력은 ‘난공불락’이며, 운동이 현실정치를 바꾸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이라는 ‘패배의 기억’을 사람들 가슴속에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패배의 기억’만 남고 ‘진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은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는 좌파는 그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이에 반해 한국의 사회운동이 역동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민주화 운동이 거둔 ‘승리의 기억’에 의존한 바가 컸다. 돌이켜보면 당시 민주화 운동의 힘은 진실을 보려는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의지는 군부독재 타도라는 현실 변혁의 에너지로 전환됐고, 진실의 공감대가 민주화의 동력이 됐다.

대화의 단절과 상상력의 부재

1960년대 이후 진보의 동력을 상실했던 일본의 시민사회가 지금까지 21세기 새로운 국가를 디자인하고 도전할 만큼의 에너지를 회복하지 못한 이유는 과거의 실패가 그들 간의 골 깊은 대화의 단절과 공동의 상상력 부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진실과 상상력’은 진보세력에게만 필요한 가치가 아니라 보수, 진보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이다. 진실은 과거와 현재에서 보수와 진보 간의 긴장관계를 구성하고 대화를 열어주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진실은 누구를 벌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와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사실관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정국을 보면 1945년 해방정국을 한 갑자의 세월을 보내고 2005년에서 2008년에 걸쳐 다시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진보의 에너지가 급속히 소진해가는 모양도 그러하고, 분단의 틀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게다가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주변 국가들의 태도 또한 당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돌고 돌아 또다시 분단의 현장에 돌아온 느낌이다.

‘미래에 대한 기억’은 상상력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진보 진영의 미래에 대한 담론과 시나리오는 토론 과정을 통해 미래에 대한 공동의 기억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대안의 부재를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처럼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현상으로 돌리는 것은, 진보 진영뿐만 아니라 지식사회 전반의 무책임성에 기인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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