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서서 반대하자니 쟁점만 커질 것 같고 가만 있자니 답답하고…경부운하 선제공격에 침묵으로 대응하면서 속앓이 하는 경쟁자들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정책 혹은 정치적 사안이 논쟁으로 번지는 과정은 이렇다. 유력 정치인이 불꽃을 쏘면 언론이 이를 전하고 정치권이 시끌벅적해진 뒤에 시민사회로 번진다. 역순으로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오면 그 사안은 처음 던졌을 때보다 몸집이 커진다. 여러 단계를 거치며 수정되고 살이 붙어 논란이 증폭되는 것이다.
행정수도와 청계천의 학습효과?
하지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내놓은 경부운하(이 전 시장은 ‘한반도 대운하’로 고쳐 부르고 있다)는 전혀 다르다. 던진 쪽과 받는 쪽만 있을 뿐 정치권이라는 과정이 생략되면서 논쟁으로 커지지 않고 있다.
검증하겠다고 달려드는 곳도 없다. 비판과 검증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공약이 공약답게 다듬어질 텐데, 피드백 과정이 없다 보니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두 부류로 갈린다.
이 전 시장의 경부운하에 대해 정치권은 조용하다. 언론이나 시민사회만큼도 발언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내에서 경쟁관계인 박근혜 전 대표, 그리고 내년 대선에서 맞붙을 수도 있는 범여권의 유력 정치인 가운데 누구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의도된 침묵의 느낌마저 든다. 왜 그럴까.
우선 시점을 내세운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니라는 이유다. 이 전 시장의 경부운하는 아직 말과 개념뿐이다. 경부운하로 시작해 내륙운하, 한반도 대운하로 이름을 여러 번 고쳤지만 문서화된 형태로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은 적이 없다. 그러니 왈가왈부할 근거가 없다고 경쟁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속내는 따로 있다. 정치적 쟁점은 건드릴수록 커진다. 이 전 시장이 경부운하를 가지고 혼자 ‘장사’를 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정치적 쟁점으로 커지는 것보다 낫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일종의 무대응 전략이다. 잘못 대응하면 아직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굳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표나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셈법은 비슷하다.
2002년 대선과 서울시장 선거에서 쟁점이 됐던 행정수도 이전과 청계천의 학습효과로도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던진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반대하는 안티(anti) 세력들이 이를 공격하면서 정치 쟁점화됐다”며 “오히려 홍보가 되는 효과를 거둬 충청 지역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전 시장 쪽도 이런 계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의 최측근인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 쪽은 “공약은 안티가 있는 그랜드 플랜(거대 계획)이어야 한다”며 “누구나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공약이라면 얘기가 안 된다”고 말했다. 안티의 대상으로서 이슈를 쟁점화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안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슈 선점 효과도 있다. 물론 검증 과정에서 터무니 없다는 게 밝혀지면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는다는 위험부담은 감수해야 한다.
박근혜의 텃밭을 흔들어 놓다
경부운하 무시 전략이라는 점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나 여권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만, 박 전 대표 쪽의 사정이 더 다급해 보인다. 이 전 시장은 박 전 대표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같은 당 소속이다. 당내 경쟁자의 공약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면 ‘집안싸움’으로 비칠 수 있다. 박 전 대표의 ‘브레인’으로 알려진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은 “같은 한나라당 예비후보가 하는 공약이기 때문에 근거 없이 반대할 생각은 없다”며 “표현하기가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최근 이 전 시장의 지지율은 박 전 대표를 12.6%포인트 앞서며(10월14~15일 한길리서치 조사, 이명박 32.1%, 박근혜 19.5%)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경부운하 공약이 이 전 시장의 지지도 변화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 전 시장이 구상하고 있는 경부운하는 박 전 대표의 지역 기반인 대구·경북과 충청 지역을 지난다.
실제 경부운하가 지나는 지역 민심은 경부운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대구 사람들은 박 전 대표에 대한 애틋한 감성과 정권이 바뀌면서 못 먹고 못 산다는 피해의식이 뒤섞여 있다.” 구태우 대구환경운동연합 환경조사 부장의 말이다. 이 전 시장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는 대구·경북의 유력 신문인 과의 8월28일치 인터뷰에서 “‘한반도 대운하’ 건설로 가장 큰 이익을 누리는 곳은 대구·경북이 될 것”이라며 “특히 대구는 낙동강을 통해 부산으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 형산강으로 포항과도 연결돼 내륙도시인 대구가 항구를 2개 갖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지역 경기 침체로 팍팍한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대구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이다. 안재홍 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국장도 “운하 건설이 죽은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확신이 서면 대구 민심은 박 전 대표에게서 급속히 이탈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역 경제 활성화를 고심 중인 경북과 충북 내륙의 다른 지방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결국 박근혜 전 대표는 경부운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니 이 전 시장의 전술에 말려드는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지지율 차이는 자꾸 벌어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박 전 대표만큼은 아니더라도 여권도 ‘벙어리 냉가슴’이다. 백원우 열린우리당 의원은 “경부운하는 철저한 대선전략용”이라며 “운하의 환경파괴 논란을 이용해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공고히 하려는 이 전 시장의 포지셔닝 전략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지역주의와 연결지어 보는 시각도 있다. 여당의 한 대선 예비후보 쪽은 “경부운하가 대구·경북과 충청 지역을 거친다는 점에서 ‘신지역주의’의 부활”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공개적인, 공세적인 언급은 꺼린다. 일단 한나라당의 ‘예선’에서 살아오면 그때 대응해도 늦지 않다는 계산이다.
이명박 전 시장 쪽은 경쟁자들의 ‘무대응 전략’에 대해 일단 “손해 볼 것 없다”고 말한다. 정두언 의원은 “반대가 없으면 경부운하가 순항을 하는 거고 기정사실화되기 때문에 나쁠 것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전 시장 쪽도 박 전 대표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내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지지율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는 한 불안하다고 보고 있다. 지금 이대로라도 나쁠 것은 없지만, 아직은 이슈 선점 효과 정도여서 경부운하가 더 큰 쟁점으로 커지기를 바라고 있다.
“제3의 기관이 검토하고 조사하라”
대규모 국책사업은 잘되면 국민경제의 젖줄이 되지만 잘못되면 재앙과 짐이 된다. 그런 점에서 철저한 검증과 비판적 안목이 필요하다. 그 몫이 언론이나 시민사회가 될 수도 있지만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조정과 타협을 거치는 정치권이 될 수도 있다.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공약을 던지고 정치권이 대응 전략과 그 시기를 놓고 저울질하면서 검증을 소홀히 하면, 정책의 정치화가 더 심해진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내건 정책은 무조건 좋고,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닌….
그러다보니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제3의 기관에 정책 검증을 맡기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의 ‘한탄강댐 건설사업’에 반대해 탈당한 이철우 전 열린우리당 의원은 “정치권이 경부운하와 관련해 호흡 조절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면밀한 검증 없이 이 문제가 긴급하게 대선 국면으로 넘어가버리면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정쟁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그는 “객관적인 제3의 기관이 경부운하에 대해 검토하고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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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한 당내 기반 보완하려 내놓은 이명박쪽의 프로젝트
경부운하는 얼마나 다듬어진 공약일까.
1996년 세종연구원의 착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는 신한국당 국회의원 이명박이었다. 그리고 10년을 묵혔다. 오는 11월 운하의 밑그림과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나와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지난해 이맘때쯤에는 대선공약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은 청계천 준공 뒤 이 전 시장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을 인터뷰했다. 청계천 다음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 의원은 “이벤트 정치, 이미지 정치에 길들여진 질문”이라고 말했다. 이 전 시장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경부운하를 언급한 적이 있기에 물어본 것인데 그는 “(경부운하는) 좋은 대권 프로젝트도 아니고, 영남 프로젝트라 표도 안 된다”고 잘라말했다. 전국에서 득표를 할 수 있는 공약이어야 하는데 경부운하는 지역색이 강한 프로젝트라는 얘기다.
불과 1년 전에 대선공약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던 경부운하는 정 의원의 예측과는 달리, ‘한반도 대운하’라는 새 이름을 얻어 구체화되고 있다. 이름이 바뀐다고 물길이 바뀌는 것은 아닐텐데, 어떻게 이 전 시장의 대표상품으로 떠올랐을까.
내년 12월19일 대선까지 수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현재의 정당·대선후보 지지도가 줄곧 이어진다면 한나라당 경선 결과가 바로 대선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전 시장이나 박근혜 전 대표 모두 일단 경선이라는 큰 산을 넘지 않고서는 희망을 얘기할 수 없는 처지다. 대선후보를 어떻게 선출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예상되지만 현재대로라면 ‘당심’이 절반, 민심이 절반(대의원 20%, 책임당원 30%, 일반 국민 선거인단 30%, 여론조사 20%)이다. 이 전 시장은 한나라당의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서 당심부터 사로잡아야 안정권에 진입할 수 있다.
공약에 경선용·대선용이 따로 있을 수 없지만 대선을 1년 이상 앞둔 시점에 경부운하 공약을 공론화하는 것은 다분히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최근 만난 정두언 의원도 “당내 기반에서는 우리가 밀리는 측면이 있어, 경선 때문에 이슈를 먼저 내놓으려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영남의 지지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한길리서치가 10월14~15일 조사한 대선 예비주자 지지율을 보면, 대구·경북 지역에서 이명박 전 시장은 37.4%로 28.9%를 얻은 박 전 대표를 8.5%포인트 차로 앞질렀다. 이 지역에서 이 전 시장은 박 전 대표에게 줄곧 뒤졌고 한 달 전 실시된 같은 조사에서도 11.9%포인트 차로 뒤진 바 있다. 지지도 변화와 경부운하가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정교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경부운하는 영남 지역에 ‘새로운 도약’으로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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