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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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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국회의 잊혀진 약속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용산기지 이전 동의안 통과시켜준 뒤 열기로 한 청문회는 아직도 감감 무소식…미군 재배치와 기지 이전 간의 관계·이전 비용 문제 등을 지금이라도 따져야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명패가 놓인 26명의 의원석은 쥐가 파먹은 자국처럼 듬성듬성 비어 있다. 앞서 2시간의 회의에 지친 듯한 표정들이다. 의원 15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읽다 숨이 넘어갈 만큼 이름이 긴 두 건의 의안이 나란히 상정된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미합중국 군대의 서울 지역으로부터의 이전에 관한 협정비준동의안’(이하 용산기지 이전), ‘2003년 3월29일 서명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에 관한 개정협정비준동의안’(이하 연합토지관리계획).
임채정 위원장이 서둘러 의안을 읽어 내려간다. 불쑥 권영길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한다. “지난번 공청회 다음에 이 부분에 대해 청문회를 하기로 합의가 된 바 있다. 청문회를 언제 열어야 될 것인가 하는 논의가 먼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날짜를 잡아 청문회를 못박아 두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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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0분 동안 눈을 피하는 동료 의원들에게 청문회를 왜 제안했는지 다시 설명한다. “국민에게 막대한 재정 부담을 끼치는 것은 국회의 비준을 받도록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는 그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나. 뭔지도 모르고 넘겨야 되나?” 권영길 의원은 주한미군의 성격이 바뀐 것과 관련된 자료의 공개를 거듭 요구한다. 박세일 의원이 나선다. “국민이 어느 정도 재정적 부담을 가질 것이냐에 대해서 그 대충의 규모를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료도 지금 없습니다.”
갑자기 장내가 소란해진다. “굴욕적인 용산기지 이전협정 비준안 통과를 반대한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등 시민단체 관계자 세 명이 구호를 마치기 무섭게 경위에게 끌려나간다. 박세일 의원이 말을 잇는다. “우리가 대체적인 감이라도 가질 수 있어야지 그 다음에 국회의 동의를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인데 그 부분이 전혀 있지 않기 때문에….” 원희룡 의원이 거든다. “비용 계산의 근거라든지 내역이라든지 권 의원이 지적한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회의(FOTA) 속기록이라든지 관련 자료들이 있을 텐데, 우리 국회가 요청해서 열람을 할 수 없는 거냐?” 정부 쪽 답변자로 나온 최영진 외교통상부 차관은 대부분의 문서가 3급 비밀이며 요청하면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답을 내놓는다. 최영진 차관은 “추가로 플러스 알파 때문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겠냐”(원희룡)는 질의에 “없다. 장담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박성범 의원은 미군이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옮겨가는데 왜 우리가 비용을 분담해야 하는지, 비용 추산의 막연함, 구체적 내용이 담긴 이행합의서(IA)가 국회 동의절차를 밟지 않는 점 등을 따진다. 최영진 차관은 GPR과 용산기지 이전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정부 입장을 다시 확인한다. 최성 의원은 “상임위에서 비공개 청문회를 하기로 합의된 상황이다. 청문회 시기와도 연결돼 있기 때문인데 비준동의가 왜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돼야 하는지 이야기해달라”고 묻는다. 올해 처리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정부 쪽 인사의 빤한 답변이 나온다.
권영길 의원은 불안한 듯 청문회 얘기를 다시 꺼낸다. “공개하지 않는 것도 동의한다. 열람 한번 하자는 것이다. 간곡히 호소한다.” 청문회 개최에 대한 표결 처리를 하자는 권영길 의원의 마지막 요청은 여지없이 묵살된다. 유선호 의원은 “지난번 상임위에서 하기로 의결이 되었다”고 안심시킨 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비준동의안의 표결을 요청한다.
두 의안에 대한 기립 표결은 14명의 찬성과 권영길 의원 한 명의 반대로 통과된다.
임채정 위원장은 외교통상부 차관과 직원들의 퇴장을 허락하며 한마디 던진다. “이 계획이 앞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정말 국익적·민족적 차원에서 한 점 의혹이나 일탈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을 수도 있다.”

임종석 의원 “야당 간사와 논의하겠다”

2004년 12월7일 오후 4시37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회의실에서 1시간10분 동안 진행된 회의를 시계를 되돌려 압축한 것이다. 지난 5월4일 경찰과 군인, 용역업체 직원 등 1만5천여 명이 용산 미군기지의 새 터 예정지인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을 폭력으로 내쫓기 2년 전의 일이다. 정부의 손에 든 대추리 지역의 강제 행정대집행증과 철조망은 2년 전 국회가 쥐어준 것이다. 그날 국회는 국민에게 약속했다. 용산기지 이전과 연합토지관리계획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켜준 뒤 청문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아직까지 ‘사후 청문회’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통외통위 열린우리당 간사인 유선호 의원은 “언젠가 청문회를 할 생각이었지만 ‘타이밍’(적절한 때)을 잡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이후 통외통위 여야 간사들은 청문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잡기 위해 협의에 들어가지 않았다. 약속이 법적 효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상임위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돼 표결을 거쳐 의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버스는 이미 떠났다”는 청문회 무용론도 있다. 이후 권영길 의원이 상임위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청문회 개최를 요구해도 무시됐던 것은 이같은 분위기 탓이다.

하지만 청문회 개최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 필요성도 2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통외통위 위원장실 관계자는 “법적 효력은 없지만 상임위에서 합의됐던 사안이고 국민 앞에 약속했기 때문에 (약속은)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지키지 못한 약속이지만 국회 스스로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유선호 의원조차도 “여야 간사끼리 합의했을 뿐 아니라 상임위 의원들도 다들 필요성을 공감했다. 국익과 수평적 한-미 관계라는 원칙에 맞게 협상이 진행됐는지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앞으로 있을 다른 협상에서도 반성적인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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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준동의안의 처리와 상관없이 청문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통외통위 열린우리당 쪽 간사를 맡은 임종석 의원은 <한겨레21>에 “지금이라도 청문회를 해야 된다. 오는 6월 새롭게 원구성(상임위 조정)이 되면 권영길 의원과 야당 간사와 청문회 개최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미군 재배치 문제와 용산기지 이전과의 관계와 한-미 간 이전 비용의 새로운 쟁점거리로 떠오른 환경복구 비용 분담 등을 포함해 협상이 제대로 됐는지 따져보는 청문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진실 검증에 전력투구

민주노동당은 당 차원에서 청문회 개최 요구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민주노동당은 1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통해 “(용산기지 이전) 협상 과정에 대한 국정조사와 청문회 개최를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단 대표는 5월4일 대추분교 옥상에서 “국회에서 미군기지 확장 문제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비준 당시 정부가 제시한 비용도 자꾸 늘어나고 있다. 2년 전 외교통상부 차관은 비용이 불어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지만, 당시 제시한 이전비용 30억~40억달러는 35억~45억달러(4월 국방부 발표)로 늘어난 상태다. 권영길 의원실의 이용승 보좌관은 “국민의 엄청난 세금이 들어가는 일인데도 국민에게 제대로 된 실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 간의 일이라 협상 내용을 공개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통해 진실이 뭔지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2004년 통외통위 수석전문위원은 용산기지 이전에 대한 검토보고서에서 협상 방식과 결과, 비준동의 절차 등 많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다수의 의원들도 정부가 내세운 비준동의안의 급박성에 밀려 동의했지만 협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은 의원은 거의 없다. 그 문제들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고 있다. 여야 의원 63명의 서명을 받아 용산기지 이전에 대한 감사청구안을 냈던 노회찬 의원실은 “30년 뒤 기밀문서가 해제돼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바로 지금 밝혀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했다. 국회가 해야 할 일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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