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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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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부 관료들과 대립한 소신파

등록 2006-04-19 00:00 수정 2020-05-02 04:24

정태인은 누구인가…미국식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며 대안 모색해온 경제학자… 대학동기인 유시민 장관과 막역한 사이, 후배 소개로 노무현 캠프에 합류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파문’의 중심에 서 있는 정태인(46)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처음 만난 건 지난 2003년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이었다. 난 재정경제부를 출입하던 중 잠깐 인수위에 파견된 터였고, 정 전 비서관은 당시 인수위 경제1분과 위원이었다. 참여정부 경제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중책이었다. 당시 경제1분과 책임자인 간사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였다.

‘CBS 사태’ 때 노조편 들다 해임

한 달여 인수위를 맡는 동안 정 전 비서관을 공·사석에서 만나 나눴던 얘기들은 거의 잊혀지고,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로 부각돼 있던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당시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을 화제로 올릴 때 ‘시민이, 시민이’라고 부르던 일이다. 정 전 비서관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유 장관의 얼굴이 떠올랐던 게 그 때문인 듯하다. 그러고 보니 깡마른 인상도 닮았다. 늘 웃는 모습이라 유 장관보다 좀더 부드러워 보인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절친한 친구 사이인 정 전 비서관과 유 장관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동기이고 둘 다 운동권이었다. 정 전 비서관은 이번 인터뷰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학 다닐 때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알고는 지냈지만, 시민이는 학생운동 리더(지도자)였고 난 돌 던지는 사람이었다. (웃으며) ‘신분의 격차’가 컸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유학을 다녀온 뒤 1999년부터 학술진흥재단에 같이 일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정 전 비서관은 영국에서, 유 장관은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학술진흥재단에 근무하면서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을 도왔는데, (유 장관과) 사는 곳도 일산으로 같고 취미(낚시)도 같았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친분은 훨씬 더 돈독해졌다고 한다. 한-미 FTA 파문 뒤인 며칠 전에도 같이 낚시를 가자고 했는데, 정 전 비서관 쪽에서 시간을 못 내 무산됐단다.

정 전 비서관은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1983) 뒤 미국식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며 그 대안을 모색해왔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간사,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월간 <말> 편집위원을 지낸 경력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홍익대·조선대 강사, 미국 버클리대 방문교수(1995), 영국 케임브리지대 방문교수(199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2000년 기독교방송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2001년 문화방송 라디오 , 2002년 한국방송 라디오 <경제전망대>를 진행하면서 일반인들한테도 익숙해졌다. 2000년 ‘CBS 사태’ 당시 노조 편을 들었다가 권호경 당시 사장으로부터 해임을 당했다. 권 전 사장은 해임 이유를 ‘자질 부족’으로 들었는데, 그는 그해 한국방송프로듀서 대상(라디오 진행자 부문)을 받았고 다음해 문화방송에서 얼른 끌어갔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정 전 비서관과 노무현 대통령의 인연은 <한겨레21> 456호(2003년 5월1일)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둔 2001년 가을(11월)에 한국사회과학연구소(한사연) 후배를 만났는데, ‘누가 대통령이 돼야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스스럼없이 ‘노무현’이라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그 후배는 이미 노무현을 돕고 있었다. 그가 소개해서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람들을 모아놓고 주제를 정해 토론을 벌였다. (유시민 의원이 노무현 캠프에 합류한 게 그즈음이었다.) 그가 후보가 되면 당선은 된다고 봤기 때문에 후보가 된 뒤에는 따로 돕지 않기로 했다. 경제 공약도 다른 분들이 짰다. 나중에 노 후보가 TV토론을 도와달라고 해서 더 돕게 됐다.” 당시 그와 노무현을 연결시켜준 한사연의 후배는 훗날 청와대에 행정관으로 입성하는 배기찬(43) 동북아시대위원회 비서관이었다.

사상적 뿌리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인수위원 시절의 그는 재정경제부를 중심으로 한 관료 출신들과 뚜렷한 대립각을 보이며 색깔과 소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참여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를 지내고 현재 교육부총리로 재직 중인 김진표 당시 인수위 부위원장과 부딪친 일도 있었다. ‘집단소송제를 도입할 경우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할 수 있다’는 김 부총리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는 “두 제도는 서로 연관이 없는데 한 가지를 강화한다고 다른 하나를 완화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정면 반박했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정 전 비서관은 대통령자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 기획운영실장으로 청와대에 입성한다. 이어 정책기획위 산업노동팀 위원, 동북아시대위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으로 옮겨 일하다가 지난해 5월 ‘행담도 사건’으로 옷을 벗었다. 행담도 사건 재판에서는 무죄판결(1심)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우리 사회와 경제에 대한 정 전 비서관의 생각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7월에 나온 계간 <동향과 전망> 여름호에 기고한 시론 ‘한국 경제 위기와 개혁’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 글에서 ‘시장이냐, 국가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며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외치는 시장주의자들에세 칼끝을 겨누고 있다. 그는 “단순 재생산조차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체제 위기를 극복할 임무를 제도의 변경 없이 시장에 맡기는 것은 기존 행위 양식을 지속시켜 모순을 증폭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고통에 아우성치는 국민은 외면한 채 월스트리트의 투기꾼들만을 의식하는 한, 경제개혁은 실패한다”고 단언했다. 국제통화기금과 정부의 고금리 정책에 대해서는 “외환위기를 국내 금융위기로 바꿔놓아 생산·소비 축소의 순환적 위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정 전 비서관의 사상적 뿌리는 ‘민족경제론’의 박현채 선생에 닿아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가장 영향을 받은 이로 박현채 선생을 꼽았다. “박현채 선생의 제자인 정건화 교수(한신대)의 ‘개방적 민족경제론’이 내가 얘기하는 동북아공동체론, 지역주의론과 유사하다.” 그가 박현채 선생과 인연을 맺은 건 1986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들어가 농촌 실태를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간사를 맡은 때였다고 한다. 당시 경제평론가였던 박현채 선생이 3개 분과 중 1곳의 지도를 맡았다고 한다.

‘행담도 사건’과 FTA 파문으로 우울증 앓기도

정 전 비서관은 실제 이론에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 컬럼비아대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스티글리츠의 말대로 미국식 자본주의는 여러 자본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참여 민주주의랄까, 대의제를 넘어선 형태가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다. 시민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얘기하면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상을 전제로 한 시장의 제로섬(먹고 먹히는) 게임이 아니라 공동체적 민주주의, 공동체적인 어떤 것에 의해 플러스섬(상생) 게임을 하는 사회 체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 전 비서관은 이정우 경북대 교수와 함께 이런 생각을 담은 양극화 관련 책자 발간을 준비 중이며, <박현채 선생 평전>을 집필하는 작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행담도 사건’에 얽혀 재판을 받느라 한때 우울증을 앓았던 그는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나아졌다가 한-미 FTA 발언에 따른 마음고생으로 우울증이 도졌다. 약 먹고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했다. 의사의 권유로 술을 끊고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성당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마음의 평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됐다. 그래도 글 쓰는 일 때문에 담배는 못 끊을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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