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노동 현장에 뛰어든 발랄 상쾌한 남자들… 병동 간호사·전화상담원·유치원 교사까지, 남녀가 아닌 개인의 발견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페르소나’라는 말이 있다. 본디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을 가리킨다. 인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나타내려고 할 때 쓰는 가면이 페르소나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개인을 잊은 채 남성·여성의 페르소나의 가면에 갇혀 살았다. 특히 개인의 남성의 가면에 숨어 무리를 지휘하고 규율하고 훈육했다. 가부장으로 존재하는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대다수 노동 현장에서 남성 페르소나가 헤게모니를 쥔다.
“예쁜 누나들과 일해서 즐거워요”
반면 타자와의 정서적 접촉을 토대로 한 ‘감성 노동’이나 ‘돌봄 노동’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페르소나로 수행됐다. 간호사, 유치원 교사, 텔레마케터 등 여성 노동 영역에 진출한 남성들은 남성의 가면을 벗어던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성의 가면을 벗어던지니, 자신을 찾을 수 있었고, 이어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2월27일 저녁 서울 강남의 삼성서울병원 14층 서병동. ‘까르르’ 하는 굵은 톤의 웃음소리가 병실 구석구석에 번졌다. 링거를 끌고 가는 환자들은 활짝 웃고 지나간다. 남성 간호사 이정재(26)씨. 그는 삼성서울병원 최초의 남성 ‘병동 간호사’다.
“뭐, 특별히 병동 간호사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병원에 들어오고 나서 입문교육을 하는데 선배들이 하는 말이 ‘넌 병동 간호사 체질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 제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응급실이나 수술실에 가면 환자들과 깊은 교감을 나눌 시간이 없잖아요.” 남성 간호사. 이름만 들어도 낯설지만, 신종 직업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수술실, 응급실, 비뇨기과에서 암약했을 뿐이다. 서울삼성병원에는 모두 1200여 명의 간호사가 있는데, 남성 간호사는 21명(0.02%)이고, 이 가운데 병동 간호사는 단 1명이다. 이씨가 ‘대민봉사’의 막중한 사명을 지고 남성 최초로 병동으로 진출한 것이다.
“병실에 들어가 ‘안녕하세요, 점심은 맛있게 드셨어요?’라고 물어봐도 환자들이 감을 못 잡아요. 의사 같기도 하고, 인턴 같기도 하고, 아님 자원봉사자인가…. 의사라고 하면 다행이죠.”
그러나 그는 타고난 대인관계 기술로 자신이 간호사임을 각인시켰다. 그것도 친절한 간호사로. 할머니 환자들도, 아저씨 환자들도 ‘남성’처럼 폼 잡지 않는 그의 수다를 듣다가 아픔을 떠나보낸다.
“환자에게 간호 외적으로 정서적 지원을 해줘야 하거든요. 할머니 아드님 얘기도 하고…. 나도 환자와 사귀니까 재밌어요.”
그는 4년제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1999년 컴퓨터공학과와 간호학과 등 4군데에 합격했는데, 가족회의를 소집해 간호학과로 최종 결정했다고 했다. 그가 간호사의 길을 걸어서 불편했던 건, 대학 입학 뒤 좋아하는 농구를 같이 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과 탈의실에 가기 위해 1층까지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물어봤다. 남성들의 페르소나를 요구하는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남들이 부러워하던걸요? 예쁜 누나들 사이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좋은데…,”
일반적으로 텔레마케팅이라고 불리는 인·아웃바운드 직종도 금남의 직장이다.114 전화안내를 해주는 한국인포서비스 관계자는 “1995년 남성 정보 상담원을 공개채용을 실시해 현업에 투입한 적이 있었는데, 고객 반응이 안 좋아서 얼마 안 돼 다른 부서로 돌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서비스업체나 이동통신업체에서도 남성 전화상담원은 남성의 페르소나를 요구하는 영역에만 배치됐다. 이를테면 ‘2차 클레임’ 부서다. 불편 신고를 한 고객이 성을 이기지 못하고 “책임자를 바꾸라”고 요구할 때 돌려주는 곳이다. 이곳의 상담원들은 죄다 남성이다. 남성 상담원들은 이곳에서 ‘과장’을 자칭하며 고객들을 달랬다. ‘남성’과 과장’이 책임 있는 간부라는 모종의 신뢰감을 줬기 때문이다.
위계 강조하지 않아 편안한 느낌
그러나 이젠 1차 전화상담원으로도 남성들이 진출하고 있다. 이동통신 KTF의 콜센터 아웃소싱업체인 엠피씨. 유재욱(33)씨는 한 제과업체의 총무부에서 근무하다가 2004년 10월 이 회사에 문을 두드렸다.
“부장이 ‘야, 오늘 회식이다’ 하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내려와 모여야 하잖아요. 새벽 2~3시는 기본이었죠. 그렇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직원들과 얼마나 친한데요.”
사실 유씨는 회사에 들어오기 전 약간은 두려웠다고 했다. “전 회사 부서에서 여자 1~2명이 있었는데, 이젠 내가 그 여자 입장이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들어와 보니 그런 편견이 깨졌다. 여성이 남성 조직에 일하는 것보다 남성이 여성 조직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던 것이다. 그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좋다. 오히려 더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유씨의 부서에서의 회식은 한 달에 한 번 영화를 함께 보는 ‘무비데이’가 전부다. 나머지는 동료를 축하해줄 일이 있다거나 할 때 자연스럽게 모인다. 남성 조직과 다른 여성 조직의 특성이다.
김성호(30)씨는 여성 조직에서 성공한 남성 사원이다. 김씨가 2001년 회사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부서원 40여 명 가운데 남성은 단 2명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어, 남자가 전화를 받네?”라는 대답을 듣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뺨을 붉게 물들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경쟁의 정글을 뚫고 2005년 말 10여 명의 부서원을 거느리는 ‘파트장’ 직책을 맡았다. 김씨는 “여기에서 일하다 나간 직원은 다른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래서 재입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박경익(34)씨는 10년차 남성 유치원 교사다. 그는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서울의 유아교육과는 여자대학에만 흔해서 그는 지방까지 내려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
“유아교육과 학생이라서 남자가 담배도 못 피운다라는 말을 들어 콜록콜록대며 담배를 배웠어요. 지금은 끊었지만. 그래도 재밌었어요. 동기들과 함께 발레를 배웠고, 동기들의 소개로 불문과, 영문과 ‘퀸카’와 다 소개팅을 해봤잖아요.”
하지만 교사 초반부터 만만치 않았다. 1997년 교사에 입문한 첫해 담임을 맡은 한 여자아이가 남자 선생님이란 걸 알고는 유치원을 옮겼던 것이다. “당시에 한 남자 유치원 원장이 아이를 성폭행해서 사회가 떠들썩했거든요.”
그는 2003년 현장에서 장기간 굴러야 얻을 수 있는 원감 자격증을 땄다. 유치원 남성 원감으로는 최초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유치원을 이어받고, 유아교육연구소를 만드는 게 꿈이다.
“유치원 교사가 남자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게 사실이죠. 대신 여자가 할 수 없는 터프함으로 아이들의 인기를 끌 수 있어요. 굵고 큰 목소리로 ‘자, 여러분 점심시간입니다!’라고 외치면,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직종마다 지원자 수 급상승
그동안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노동 현장에 남성이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다. 아르바이트 전문 채용 포털 알바몬(http://www.albamon.com)이 2006년 2월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런 영역에서 남녀 구직 지원자 성비 격차가 둔해지기 시작했음이 보인다.
2004년 5월 간호·간병 직종 전체 지원자 가운데 남성 비율이 불과 3.67%에 그쳤던 데 비해 이듬해에는 6.89%, 그리고 2006년 2월에는 21.42%로 급상승했다. 텔레마케팅 직종의 경우 인바운드(전화 수신 상담)의 29.69%, 아웃바운드(전화 송신 마케팅)의 32.77%를 남성 지원자가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유치원 교사의 남성 지원자 비율도 지난해보다 4.25% 늘어 11.87%에 달했다. 이런 현상은 취업난과 무관치 않지만, 남성들이 전통적인 성 구분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성이 다수인 노동 현장에서 이들은 열심히 뛰고 있다. 특정 직업군에 특정 성이 편중될수록, 남성·여성의 가면이 씌워지고 개인은 배제된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종합병원 병동에서 콜센터에서 유치원에서 남성들은 하나둘씩 주위 시선을 걷어내고 자신의 일을 소화해내며 뿌듯해한다.
“난 병동 간호사가 체질인가 봐요. 앞으로 내가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나가야죠.”
이정재 간호사는 거침이 없다. 다른 말로 ‘개인의 발견’이다. 성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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