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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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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잠재적 마초’들의 노래

등록 2006-01-04 00:00 수정 2020-05-03 04:24

초등학교 교사가 바라본 국민의례와 애국주의를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는 아이들…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선 ‘뻔한 길’만 남아있을 뿐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전체조회’(애국조회)라는 고약한 모임은 지금도 학교에 살아 있다. 아이들은 한 줄로 기다랗게 늘어서 멍하니 천장을 보거나, 신발로 바닥을 비비거나, 앞에 선 아이를 쿡쿡 찌르거나, 끝없이 히히덕거린다. ‘육체’와 ‘시간’이 서로를 뭉개고 누르면서 벌이는 지루한 싸움의 풍경.

‘전체조회’라는 고약한 모임에서…

이 모임은 언제나 국민의례라는 충성의 서약으로 시작한다. 나는 대열의 맨 뒤로 슬그머니 빠진다. 이 학교에서, 교사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조국’과 ‘민족’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어설픈 ‘불복종’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국민의례 때마다 김선일이 떠오르고, 앞으로는 전용철 아저씨와 홍덕표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므로, 굳은 얼굴로 대열의 맨 뒤에 멀찍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론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총’ 대신 ‘감옥’을 택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결연한 용기도 없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응시해야 하는 의식이 사무치게 싫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끄럽기만 한, 이제는 수치와 모멸의 감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 조국의 상징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의 주문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나는 그간 <한겨레21>을 구독하면서 독도 문제를 다룬 특집이나 우리 사회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기사들에서 우리 사회의 남성주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문제 삼는 <한겨레21>의 관점에 공감해왔다. 국가주의건 남성주의건 모두 ‘전체주의’의 한 변종일진대, <한겨레21>의 이 모든 노력은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예민한 촉각이었다. 그 기사들을 통해 내가 배운 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목마름을 느꼈다는 것도 고백해야겠다. 예컨대 이제는 대학 면접·구술 고사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 같은 소수자 관련 문제가 출제되고, ‘톨레랑스’라는 말은 웬만한 고등학생도 알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독도, 황우석, 새만금, 천성산, 쌀수입 개방, 이라크 파병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 앞에서 ‘국익’이라는 도깨비 같은 수사로 포장된 이 전체주의적 성향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조·중·동과 <한겨레>의 힘의 차이인가, 보수 정당들과 민주노동당의 의석 수의 차이인가, 아니면 교총 회원과 전교조 조합원의 수의 차이인가.

‘안락한 삶’을 향한 반복된 루트들

<한겨레21>의 기사들을 통해 느꼈던 나의 목마름을 이런 질문으로 환언해보자.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위시한) ‘전체주의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인가, 삶의 양식(樣式)인가.’ 만약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라면 왜 학교 현장에서 ‘통일교육’ ‘양성평등 교육’이 공식적인 교육과정 속에 등재되고, 국가인권위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권고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정작 학교 현장에서 전체조회는 사라지지 않으며, 국민의례와 같은 폭력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는가. 왜 우리 아이들은 적지 않은 교사들의 노력에도 여전히 장애인을 ‘애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를 ‘뵨태’로 느끼며, 독도 문제나 황우석 사태에서는 어른 세대 이상으로 폭발하면서 ‘잠재적인 우익’으로 ‘잠재적인 마초’로 성장해가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국가주의, 남성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뭉친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로 이 사회의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양식’으로 이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았다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모두는 ‘안락에 대한 희구’와 ‘그 안락을 박탈당했을 때의 공포’로 꽁꽁 묶여버린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탈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모험이 되고, 모두에게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뻔한 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은 ‘안락한 삶’을 향해 나 있는 반복된 루트를, 이를테면 학교와 학원, 텔레비전과 판타지 소설과 컴퓨터 게임을 오가면서 짓무르도록 답습한다.

언젠가 나는 <구운몽>을 가르치면서 ‘성진’이 꿈속에서 ‘양소유’로 태어나 현세의 부귀영화를 맘껏 누리듯이, 너희가 직접 꿈속의 ‘양소유’가 되어 폼나게 살다가 꿈에서 깨는 과정을 써보라는 과제를 준 적이 있었다. 내 의도는 너희가 지금 갖고 있는 현세적 성공과 관련되는 ‘욕망의 판타지’를 한번 양껏 펼쳐보라는 것이었다. 판타지 소설이나 비슷한 유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익숙한 그들이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과제라 여겼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너무나 앙상한 도식, “사법고시에 패스해 온갖 연예인들 거느리며 살다가 꿈에서 깼다더라”는 졸가리로 일관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그 글들에는 구체적 삶의 세계가 없었다. 그것은 성적이 우수한 아이건 그렇지 않은 아이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억지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확대된 해석일지라도 이런 경향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그 나이와 세대에 고유한 ‘구체적인 경험의 세계’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으로 퇴화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욕망이 구축한 시스템의 상자 안에 갇혀버렸다. 그들은 사물과 진정한 교섭을 이룰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학교 교육이, 어른 세대가 가르치려는 가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다만 본능적인 회의의 대상이다. ‘경험’이 없는데 어찌 그 경험의 알짬,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치의 니힐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족·친구 집단 같은 실체적 공동체건, 국가·민족 같은 상상된 공동체건)에서의 존재감의 확인, 그것밖에는 없다.

사랑 노래는 그들의 절망인가

한 달여 전 우리 학교 아이들과 3박4일간의 수련활동에 참여했을 때, 각 반의 재주꾼들이 장기자랑하는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나는 유심히 들은 적이 있다. 그 노래들은 대부분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사랑’을 다루고 있었는데, 아주 극단적인 상황, 이를테면 ‘너에 대한 사랑 하나로 이 세상에서 내가 겨우 사는데, 너는 죽었다. 혹은 그걸 남에게 빼앗겼고, 나는 지쳤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죽을 것만 같다’는 식이었다. 이것은 원래 사랑 노래의 고전적인 도식일 따름인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랑’들은 1천 년 이상의 까마득한 시간대로 비약한 신비화된 사랑이었고, 하나같이 처절한 비극이었고, 그래서 극단의 사랑이었다. 삶의 형상, 일상의 곡절 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랑의 형상은 없었다. 문득 나는 느꼈다. 아이들이 불쌍했다. 그 노래들의 밑바탕에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아이들이 부르는 장중한 발라드와 고음에서 터져나오는 절규가, 자유와 일탈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안락한 삶’만을 위해 학원에서 학원으로, 입시에서 입시로, 감시와 처벌, 통제과 규율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만 키워온 아이들의 황폐한 내면의 한 풍경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존재감을 갈구하는, 불안하고 가련한 어린 짐승이었다. 그 아이들이 타자에 대한 관용과 힘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제 존재감으로 육박해오는 것들에 열광한다. 학교에서 하는 전체 모임은 그토록 지겨워하고, 국민의례의 태극기에는 무덤덤한 아이들이 월드컵 공간에서는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에 눈물 흘리며 제 존재감을 확인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국민 영웅’ 황우석을 흠집내는 ‘진보주의자’들에 분노하고, 독도를 제 땅이라고 우기는 ‘쪽발이’들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왜, ‘우리 땅’ 독도를 건드리고, ‘우리’의 영웅 황우석 박사에게 가탁된 내 존재감을 박탈해가느냐”고 말이다.

경험을 돌려다오, 경험을!

나는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점점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기 원하는 지성이 있다면, 그 노력은 단연코 이데올로기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아이들을 ‘자연’으로, ‘경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몸부림이다.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정연하게 비판하면서도 김훈의 <칼의 노래> 같은 마초적 허무주의, 우익적 사무라이 근성이 넘쳐흐르는 소설에 가슴 설레는 아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삶의 양식이 아닌 다만 ‘이데올로기의 혼란’이 있을 뿐이다. 가치의 니힐리즘, 아이들의 애국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경험’ 그 자체에서 싹터오를 수 있다.



도덕 교과서의 파시즘

보편 윤리보다는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만 강조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한국인의 국가주의는 학교에서 내면화된다. 국기를 신성시하는 교육은 주로 도덕 교과를 통해 전달된다. 교육부가 펴낸 초등학교 1·2학년 바른생활 교과서의 교육과정 해설서를 보면, ‘나라 사랑하기’가 ‘내 일 스스로 하기’ ‘예절 지키기’ ‘다른 사람 생각하기’ ‘질서 지키기’와 함께 5가지 주요 덕목으로 다뤄진다.
1학년 과정에서는 국기 바르게 달고 바른 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한다는 지도사항이 소개돼 있다. 2학년에는 무궁화를 사랑하고 잘 가꾸는 교육을 하도록 돼 있다. 교육부가 제7차 교육과정 시작과 함께 1998년 펴낸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을 보면, 이 시기 주요 지도사항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 방법 알기 △무궁화 동산 만들기 △간첩신고 요령 알기가 나와 있다. <중학교 도덕 2>의 223쪽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애국·애족하는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 품에 안겨서 느꼈던 포근함이나 안도감처럼 자연스러운 사랑의 느낌과도 같은 것이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도덕교육의 파시즘>이라는 책에서 “원래 도덕은 국가나 민족의 경계 안에 가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에서는 선과 악의 문제가 국가나 민족의 당파성으로 해소된다”고 말한다. 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움에서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감과 희생정신을 이끌어내고, 도덕적 인간의 전형은 국가를 위해 애쓰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도덕 교과서의 단골 사진은 국립묘지 풍경이다.
이광연 전국도덕교사모임 대표는 도덕 교과서가 이러한 국가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시대의 수신 과목에서 반공·도덕, 국민윤리, 다시 도덕으로 이름을 바꿔왔지만, 보편 윤리를 애국이라고 주입하는 데선 큰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애국에 대해서 한 번도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며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면서, 국익을 위해 이라크에 파병하는 데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없는 것처럼, 교과서는 애국(국익)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도덕과 윤리에 대해 생각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주의 도덕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현 도덕 교과서의 집필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은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진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 정권 때 각 대학에 신설된 국민윤리교육과는 민주화 이후 윤리교육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서울대는 옛날 이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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