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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배우와 인간 배우의 혈투

등록 2005-12-28 00:00 수정 2020-05-02 04:24

2050 대중문화 미래 예측…3D 기술의 힘을 바탕으로 혼자서 만드는 영화 봇물…현재의 인터액티브 예술처럼 일반인들이 디지털 배우를 가지고 창작하는 시대

▣ 듀나/ 영화평론가

일상과 대중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나는 일단 여기서 단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기로 하겠다. 그건 소위 인터액티브 예술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인터액티브 예술은 단일 내러티브 예술을 대체할 수 있을까?

한 작품이 수천 수만의 작품 거느려

20세기 말만 해도 인터액티브는 한계에 도달한 내러티브 예술의 궁극적인 대안처럼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가능성에 대해 실험했고 그중 꽤 쓸 만한 것들도 나왔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 진행 방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우선 인터넷과 텔레비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21세기 초의 텔레비전은 인터넷과 함께 상당한 수준의 인터액티브를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티즌의 요구에 밀려 작가가 각본을 고쳐 쓰는 정도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터액티브 현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커뮤니티의 형성, 팬픽, 리캡, 패러디와 같은 것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청자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텔레비전 시리즈 스토리를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만의 스토리를 개발하고 캐릭터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 최종 결과는 시청자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단일 내러티브 작품들로 구성된 거대한 도서관이다. <스타 트렉> <엑스 파일> <닥터 후>와 같은 히트 시리즈들은 모두 이런 도서관을 갖추고 있다. 이 세계 안에서 팬픽 작가들은 거의 절대적인 자유를 휘두른다.

여기서 지적해 마땅한 것은, 의미 있는 인터액티브 현상은 개발자나 창작자가 그 현상을 통제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걸 고려해보면 지금의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은 그 대안이 되지 못한다.

대표적인 비디오 게임들을 한번 떠올려보길 바란다. <툼 레이더> 시리즈도 좋고 <할로>나 <슈퍼 마리오> 시리즈도 좋다. 이 게임들을 플레이할 때 게이머들은 일종의 자유의지의 환상에 젖는다. 그들은 컨트롤러를 이용해 주인공을 그 자리에 가만히 세워놓을 수도 있고 점프시킬 수도 있고 물건을 집어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비디오 게임에서 인터액티브 현상은 극도로 제한된다. 중간에 훨씬 순발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비디오 게임의 자유도는 보드 게임이나 퍼즐을 특별히 넘어서지 못한다. 결국 게이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결말은 하나거나 제작자가 만들어낸 몇 가지 결말들 중 하나다. 그 결말의 수는 게임에 따라 상당히 많을 수도 있지만 그건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여러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게이머에게 진짜 자유의지를 부여하려면 틀만 제공하고 빠져나와야만 한다. <심즈>는 거기서 어느 정도 성공한 게임이다. <심즈>의 플레이어는 심 캐릭터들의 능력에 미치는 범위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심즈>는 원시적인 게임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형식이 계속 발전된다면 그 결과는 텔레비전 시리즈 팬픽 유니버스와 비슷해질 것이다.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게임이 존재할 것이고, 그 게임의 결과물인 단일 내러티브의 작품들이 나올 것이다. 지금도 <심즈>만으로 자기만의 만화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에 나온 피터 몰리뉴의 <더 무비스>도 비슷한 형태의 게임을 권장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게임의 인터액티브 기능은 단일 내러티브 작품을 위한 창작 과정으로 변질된다.

여기서 하나의 가능성이 나온다. 몇십 년 안에 3D 오브젝트들을 다루는 컴퓨터와 프로그램의 기능은 향상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대중적인 퍼스널 컴퓨터와 이런 게임 프로그램을 갖춘 일반 사용자들이 혼자만의 힘으로 지금의 텔레비전물과 비슷한 수준의 3D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 능력과 공간이 확장된다면 혼자 취미로 만든 영화들을 대중과 공유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미래엔 방송은 훨씬 개인적인 매체가 될 것이다.

이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금까지 배우집단에서는 디지털 배우들의 등장에 늘 우려의 시선을 보내왔는데,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디지털 배우들이 영상매체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건 공장 생산품이 수공품을 대체하는 것과 같다. 디지털 배우와 세트는 더 싼 값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자금 부족으로 진짜 배우들과 세트를 구입할 수 없는 영화제작자들에게 디지털 배우들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일 것이다.

낙천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경쟁 속에서 스타 시스템은 진화할 것이다. 인간 연예인들은 디지털 경쟁자들과 맞서기 위해 고급화 전략을 내세울 것이다. 디지털 경쟁자들이 한동안 줄 수 없는 실제 인간의 느낌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아마 디지털 배우들의 장점인 깨끗한 사생활과 대립되는 스캔들과 소란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질 수 있다. 좀더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앤디 서키스가 그러는 것처럼 이미지와 전혀 상관없이 순수하게 연기력만을 제공하는 배우들도 생겨날 것이다.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톰 행크스가 그랬듯이 한 영화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한 명의 배우가 소화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배우란 직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세분화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은 순수성을 잃을 것이다. 지금도 몇몇 단순한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기존 연예인과 썩 비슷한 모양의 디지털 오브젝트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세월이 흐른다면 일반 사용자가 기존 스타들을 닮은 디지털 배우들을 이용해 자기만의 영화를 찍거나 그들을 장난감으로 삼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중 몇몇은 결코 좋은 구경거리가 아닐 것이다. 오리지널 육체를 가진 자연인의 이미지가 포르노나 그보다 더 험악한 오락의 재료로 사용되는 일도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원래 이미지의 주인은 그 과정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까? 그보다 긍정적인 현상으로, 오래전에 죽은 배우들을 살려내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로렌스 올리비에를 중요한 조연으로 출연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머잖은 미래엔 지금 장난감 가게에서 <엑스 맨>의 액션 피겨를 팔 듯 배우들의 3D 오브젝트를 파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가 개인적인 예술이 될 때…

그렇다고 이 모든 직접적인 참여 과정이 전혀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몇 가지 인터액티브 실험을 상상할 수 있다. 하나의 드라마 상황을 설정해놓고 그 속에서 몇몇 플레이어들이 스포츠를 하듯 드라마에 참여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어떨까? 상대방의 의중을 전혀 모르는 작가들이 서로의 주인공들을 우위에 놓으려 경쟁하는 소프 오페라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특별히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도구들을 이용해 대부분 플레이어들이 재미로 만든 작품의 수준은 평범하거나 그보다 더 나쁠 것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일 것이고, 그들 역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체의 가능성은 넓어질 것이다. 언젠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소외된 뚱보 소녀가 캠코더로 걸작을 만들 수 있다면, 그때서야 영화는 성숙한 장르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매체의 진화는 이 소외된 뚱보 소녀에게 걸작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시와 소설과 같은 개인적인 예술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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