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아지 가족은 어떤 차별 속에서 살았나
경찰은 의심의 눈초리, 사람들은 공포의 눈초리, 기업들은 기피의 눈초리
▣ 파리=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난 스물다섯의 프랑스인이다.
파리 교외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아지다. 사람들은 알제리계 프랑스인이라고 나를 부른다. 모로코와 튀니지계 이민자를 한데 묶어 마그레브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어머니는 1976년 누나와 형을 데리고 알제리에서 지중해를 건넜다. 1960년대 파리에 먼저 들어온 아버지는 건설노동자였다. 지난 26년 동안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차량 방화 소요사태가 일어난 파리 교외의 클로생피에르 공용주택이다. 지금은 온 가족이 파리에서 교외선을 타면 북동쪽으로 20분 떨어진 피에르레역 주위에 모여 산다.
오토바이 탔다고 때리다니…
지난 9월20일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오토바이를 탈 수 없는 동네 지역이었다. 갑자기 경찰관 3명이 쫓아와 내가 탄 오토바이를 세웠다. 나를 벽에 밀치더니 이마에 총을 겨눴다. 그러고는 땅에다 내려쳤다. 주먹으로 코를 때려 피가 났다. 정부가 발행한 장애인 등록카드를 보여줬더니, “너희 ‘부뇰’들은 한결같이 장애인이냐, 돈 받으려고 장애인 등록한 것 아니냐”고 조롱했다. 부뇰은 알제리 독립전쟁 때 프랑스인이 알제리인을 비하해서 쓴 말로 ‘더러운 알제리인’이란 뜻이다. 4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에 대한 경멸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24시간 동안 구금당했다. 알레르기 장애가 있어서 약물 투여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매형이 와서부터다. 매형의 요구에 경찰은 마지못해 약물 투여를 허락했다. 매형은 파란 눈에 피부가 하얀 순수 프랑스 백인이다. 파스칼 클린그레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이름만 봐도 백인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법을 위반한 것은 맞다. 번호판이 없고, 보험에 들지 않은 오토바이를 몬 것도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보통 딱지 한 장 떼고 벌금을 물고 만다. 그런데 경찰은 나를 때리고 인격적으로 모욕했다. 참을 수 없었다. 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인권단체에도 제보했다. 현장을 목격한 이웃 주민 4명의 진술도 받아놨다. 내가 정통 프랑스인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와 같은 차별을 매형은 한 번도 겪지 않았다. 매형은 3년 전 교차로에서 황색등일 때 차를 몰았다. 경찰이 차를 세웠다. 경찰은 존댓말로 상황을 설명하며 딱지를 떼려 했다. 빨간 불에 건넌 게 아니라 응할 수 없다고 하며 끝까지 사인을 해주지 않았더니, 경찰이 그냥 보내줬다. 매형은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번 내 일과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고 말했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당한 것은 처음이다. 물론 차별은 늘 있었다. 매형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다. 관공서에 갈 때마다 내가 뭔가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나는 프랑스 국적을 가진 프랑스인이지만 마그레브라는 이유만으로 종종 다르게 취급받는다. 경찰은 불심검문을 할 때 내 신분증을 요구하면서 언제나 범죄인 다루듯 반말을 해댄다. 프랑스에선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존댓말을 써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경찰의 반말은 행동준칙 위반이라고 한다. 매형은 외국계 프랑스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게 프랑스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아내는 오스니 지역에 있는 ㅌ기업에 다녔다. 인사과에서 근무했다. 어느 날 인사과에 지침이 하나 내려왔다. 외국 이름의 이력서를 따로 분류하라는 것이었다. 회사의 지침을 놓고 부서에서 회의도 했다. 회의에서 나온 얘기들은 아랍계 이민자들이 행실이 바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계속 앉아 있기 거북할 정도였다. 직원들은 “알제리계 이민자들은 우리와 교육도 다르게 받았고 행동도 다르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여직원들은 아랍계 남자들과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내는 그때 모욕당했다는 느낌을 아직도 지우지 못한다. 회사에서 젊은 여직원들은 성 없이 이름만 쓴다. 아내는 온 갸르라는 이름에 순수 프랑스인과 구분이 안 되는 얼굴을 지녀, 그들과 섞여 회사에 다닐 수 있었다. 아내가 회사의 인사과에 있으면서 모든 직원의 이력서를 살펴봤지만, 아랍계는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기업이 마그레브 이민자들을 잘 고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내는 지금은 회사를 옮겼다.
“골족의 전통 프랑스인만 고용한다”
알제리 이민 3세대인 아내의 아버지는 2살 때부터 프랑스에 사셨다. 아내의 할머니는 아직도 프랑스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알제리가 프랑스 식민지였을 때 왕래가 자유로워, 프랑스로 건너왔다고 한다. 다른 많은 아랍계 프랑스인들처럼 우리 부부도 무슬림이다. 가능한 한 매주 금요일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 간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저소득자용 공용주택이다. 벌써 35년이나 됐지만, 페인트 칠을 새로 해서 그나마 깨끗하다. 이곳에 산 지 1년6개월이 됐고, 월세는 330유로(약 40만원)를 낸다.
매형은 16~25살의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과 기업체와의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는 공공단체에서 일한다. 일자리를 찾는 대다수가 외국계 2, 3세대 프랑스인들이다. 매형은 아내가 겪은 외국계 프랑스인에 대한 고용차별과 관련된 좀더 내밀한 얘기를 듣는다. 매형이 하루는 ㅅ기업을 찾아갔다. 사장은 노골적으로 “골족의 전통 프랑스인만을 고용한다”고 말했다. 외국계 이민자들은 아예 소개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이같은 일은 작은 업체에서는 흔하게 벌어진다. 큰 기업은 더 영리하고 교묘하게 할 뿐, 큰 차이는 없다는 게 매형의 판단이다.
매형의 씁쓸한 농담이다. “프랑스에서 외국계 이민자를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곳은 프랑스 축구 대표팀뿐이다.” 나도 파리 방리유에서 자동차에 불을 지른 젊은이들과 똑같은 분노를 갖고 있다. 의견 표출 방식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번 소요사태는 이슬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언론과 정치인들은 청년들이 아랍계 이슬람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 아예 무슬림들이 폭동에 나섰다고 부추겼다.
경찰은 아랍계 청년들에 대해 강한 선입관을 갖고 있다. 한번은 장애인 스티커가 붙은 차를 쇼핑센터 앞 장애인 주차구역에 세웠다. 곧바로 경찰이 왔다. 장애인등록증의 제시를 요구했다. 그러고는 스티커와 일치하는지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랍계들이 신분증을 잘 위조한다는 선입관을 갖고 나를 차별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알제리 여권도 갖고 있지만, 나의 첫 번째 정체성은 프랑스인이다. 프랑스인이면서 무슬림일 뿐이다. 내가 만약 어떤 정치인들의 말마따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면, 난 거기 알제리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 난 알제리인이기 이전에 프랑스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민자 2, 3세대의 젊은이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보통의 프랑스인들은 나를 같은 프랑스인으로 바라본다. 문제는 인종차별적인 사람들의 시각이다. 예를 들어 아랍 사람이 거의 없는 파리 16구역에서 자란 정통 프랑스인들은 아랍계를 보면 겁을 내고, 자꾸 구분해서 본다. 또 매체는 차에 불이나 지르고 무임승차를 하는 아랍계 젊은이들을 보여주면서 아랍계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운다. 프랑스에서 성공한 아랍계 이민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프랑스와 알제리 전쟁의 흔적들
마그레브 이민자에 대한 차별은 오래됐다. 폴란드와 이탈리아, 스페인계는 종교적·문화적으로 프랑스와 비슷한데 마그레브는 이슬람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이다. 또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열등하게 보는 것도 있다. 그리고 프랑스와 알제리 전쟁의 흔적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외할아버지는 알제리 군인이었다. 인도차이나에 가서 프랑스군을 돕기도 하셨지만,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겨우 8살 때다. 어머니의 이름은 우리다 하지다. 어머니는 알제리 수도 남쪽의 사막지대인 바리카에서 자랐다. 게토지역이다. 독립전쟁 뒤 모든 게 폐허로 변해버렸다. 가난했던 기억밖에 없다고 하신다. 아버지와는 1970년에 결혼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왔다. 프랑스에 값싼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던 때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죽인 나라지만 무섭지 않았다고 한다. 반감도 없으셨다. 오직 알제리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29년 동안 알제리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불어를 할 줄 모르는 어머니는 프랑스 사회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시청에서 마련한 프랑스어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 말을 배우고 있다. 지금은 프랑스 국적을 얻고 싶어하신다. 국적 신청서를 지난 11월17일 관공서에 제출하셨다. 그동안은 프랑스 국적을 얻고 싶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씀해왔다. 많은 아랍계들이 정치적 망명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굳이 프랑스 국적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자신이 살 집을 마련했고, 자식들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어머니가 낸 서류는 심사하는 데 12~24개월이 걸린다.
어머니는 자신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 잘 모른다. 매형은 어머니처럼 아예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차별을 쉽게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우리와 달리 당신이 프랑스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인식이 크다. 그래도 학교나 우체국에 갔을 때 공무원들의 묘한 시선들을 느끼신다고 한다. 또 당신이 이슬람 사원에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어머니는 간섭만 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없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방리유 사태를 지켜보고선 차에 불을 지르는 방법은 좋지 않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신다. 막내 아들 하센이 1년 넘게 집에서 놀다가 최근에야 겨우 일자리를 구한 것을 봤기 때문에, 남의 일로 생각지 않으신 듯하다. 동생 하센은 피부빛이 나보다 더 검은 전형적인 아랍 얼굴이다.
매형은 모든 것을 거푸집 안에 몰아넣어 프랑스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정부의 이민자 정책은 옛 방식이라고 비판한다. 프랑스가 다문화·다종교 사회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매형은 얼마 전 파망 부시장에게 공동묘지에 이슬람교도를 위한 구역을 따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부시장은 “나중에, 나중에”라며 무시했다. 묘지 확장안에 애완동물을 위한 구역이 따로 마련될 계획이다. 이슬람은 천에 주검을 싸서 메카를 향해 묻는다. 아직 보편화되진 않았지만 일부 자치단체에선 이슬람을 위한 공동묘지 구역을 따로 마련해주는 곳도 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선 주검을 알제리나 모로코로 보내는 경우가 흔하다.
왜 헤자브만 종교 상징물인가
매형은 전형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반면 레일라란 이름의 누나는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다. 2003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와 라마단을 동시에 기념한다. 큰조카는 금발에 순수 백인의 얼굴을 가졌다. 그렇지만 이름은 아랍어로 좋은 친구를 뜻하는 잘리스다. 작은조카 녀석은 살로메라는 유대인 이름을 지녔다. 집안에 유대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어를 잘하는 누나는 웬만한 차별엔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어벽을 쌓기 전 7살 때의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 학교 선생님이 알제리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누나에게 “너는 불어를 잘 못할 테니 수준이 낮은 반으로 가야 해. 네가 말을 잘 배울 수 있을진 모르지만, 여기서 성공할 순 없을 거야”라고 던진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 마그레브 이민자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교육하겠다고 하지만 맘이 완전히 놓이는 것은 아니다.
누나는 아랍의 보통 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헤자브를 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누나는 근대 이슬람이라면 자신이 사는 공간과 그 틀에 어느 정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공교육에서 탈종교성이란 중립성 원칙에 따라 학생들이 종교적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하지만 누나는 헤자브를 착용한 사람의 자유는 그것대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헤자브를 금지시킨 것은 반아랍·반이슬람 정서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유대인 남자들이 머리에 쓰는 납작모자 야물카(키파)나 십자가의 착용은 허용되기 때문이다.
가끔 누나와 매형이 너무 예민한 듯싶을 때도 있다. 어머니의 집 뒤뜰에 배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이 배나무를 해코지했다. 이런 경우 이웃들이 못하게 야단치는 게 보통이지만, 주위의 순수 프랑스인 이웃들은 그냥 구경만 했다. 누나 부부는 배나무가 순수 프랑스인의 정원에 있었다면 이웃들이 그렇게 놔뒀겠느냐고 말한다. 이것도 일상 속에서 빚어진 작은 차별의 하나라고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누나는 프랑스가 톨레랑스가 넘치는 사회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엄연히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순수 프랑스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공동체에서 가해지는 차별도 포함한다.
누나는 매형과 마찬가지로 외국계 프랑스인들이 자기 정체성과 문화를 지닌 채 사회에 편입되는 게 아니라, 비슷하게 동화되길 바라는 정부의 이민정책에 반대한다. 우선 알제리 역사나 문화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알제리인들과 큰 동질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와도 조금 다르다. 그리고 프랑스인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아랍계 프랑스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그래서 피를 모두 제거한 돼지고기(할랄)를 먹고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주위에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누나의 아랍계 프랑스인으로서 정체성은 자주 무시된다.
나는 그냥 프랑스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방리유에 사는 아랍계가 폭력적이라고 하면서 무서워한다. 자신의 차에 불을 지르거나,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빠져나왔지만 아랍계 이민자들은 대부분 방리유의 공영주택에 몰려 산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돈 벌 기회도 없고 잘사는 곳으로 옮겨갈 기회도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프랑스인들은 20~30년이 지나도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매형은 차별이나 인종주의의 가장 큰 원인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빚어지는 선입관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내려온 아랍과 아프리카 사람을 비하하는 무의식적인 시선들이 그렇다. 이런 것들이 오랫동안 쌓였다. 그래서 겉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줬으면 한다. 나를 그냥 프랑스인으로 봐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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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알제리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이 유별나다.
4세대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와 알제리 독립전쟁의 역사적 배경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1963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알제리인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을 계기로 극대화된다. 1961년 10월 3만~5만 명의 알제리인이 파리에서 시위를 했는데, 이때 법의학연구소에 따르면 200명 이상의 알제리인이 프랑스인들에 의해 센강에 빠져 죽거나 실종됐다. 아지의 외삼촌인 아지즈 알라와씨는 “라디오로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1962년 에비앙 협정을 통해 알제리가 독립했지만, 알제리에서 비밀 군사조직의 테러와 암살,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보복이 자행됐다. 이때 100만명에 이르는 알제리의 프랑스인들인 ‘피에 누아르’들은 빈손으로 알제리를 빠져나왔다. 프랑스에서는 비밀 군사조직 가담자 236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41명이 처형됐다.
이같은 역사는 프랑스인과 알제리를 넘어선 마그레브인들의 이질성과 적대감을 강하게 확인시켜줬다. 프랑스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인들한테 전쟁에서 졌다는 것에 콤플렉스 같은 묘한 감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또 알제리계 이민자들의 상당수가 무슬림이라는 것도 거부감을 갖는 원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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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프랑스에서 외국계, 특히 아랍계 이민자들에 대한 고용차별이 있다. 프랑스 사회단결 및 균등 담당 장관인 카테린 보트랑도 지난 9월26일 ‘이민지원 및 차별반대를 위한 행동기금’의 개원식에서 이를 강조했다.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프랑스의 법이 이러한 통계의 수집을 아예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몇몇 보고서들이 나오고 있다. 프랑스 기업인 생고뱅의 클로드 베베아 회장이 2004년에 작성한 ‘프랑스의 유색인들에게 있어서의 기업’도 그중 하나다. 총리에게도 보고된 이 보고서는 프랑스 평균 청년 실업률이 23%인 데 비해 도시 빈민지역은 38%에 이른다고 밝혔다. 도시 빈민지역엔 주로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모여 산다. 대졸 이상자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다. 날 때부터 프랑스 국적 대졸자의 실업률은 5%에 불과한 반면, 외국 출신의 국적 취득자는 18%였다.
파리1대학의 장 프랑수아 아마디유 교수가 258개의 기업을 대상으로 조건을 같게 한 뒤 프랑스 이름의 이력서를 보냈더니 75명이 인터뷰를 받을 수 있다고 호출이 왔다. 반면 외국 이름의 경우엔 14명만이 호출을 받았다. 같은 학위를 지녔더라도 외국계 구직자가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 산업부 장관인 로제 포루가 올해 작성한 ‘고용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운동’ 보고서에서도 파리 지역에서 마그레브 이름을 쓰는 구직자는 프랑스 백인 이름에 비해 인터뷰에 호출될 확률이 다섯 배나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라쉬드 네카즈 알레프랑스 회장은 “아랍계 이민자들이 취업을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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