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부국이 빈국의 잉여이익 빼먹는 자유화, 합의라는 이름으로 개방 유혹하는 APEC…신자유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아시아 경제 블록’은 만들어질 것인가</font>
▣ 자카르타= 알렉산더 이르완(Alexander Irwan)/ 경제평론가 · 전 인도네시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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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를 갖췄다. 소수의 부자 나라들이 맨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고, 중간 정도의 소득을 얻는 (그리 많지 않은) 국가들이 가운데 아래 자리에 앉는다. 바닥에 깔리는 것은 대다수 가난한 나라들이다. 잘사는 나라들의 배만 불리는 이런 불평등한 구조와 잉여 이익의 흐름은 세계적인 차원의 헤게모니 국가에 의해 지탱돼왔다. 역사적으로 헤게모니는 새로운 헤게모니의 등장으로 몰락한다. 우리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등장과 대영제국의 몰락을 잘 기억하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의 수명은 매우 짧았다. 미국의 패권은 두 차례의 세계전쟁에서 꼭지점을 찍었고, 탈냉전 시기에 수명이 다할 것으로 보인다.
WTO와 IMF가 힘이라면 APEC은 함정
경제력을 갖춘 일본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대체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 일본은 서유럽과 북미와 맞설 수 있는 경제 중심지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본은 정치나 안보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인 의제를 설정하는 데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저질렀던 과오로 인해 불평등한 자본 축적의 질서를 보장하는 헤게모니를 행사할 권위를 갖지 못했다. 지금은 미국의 낡은 헤게모니에서 새로운 헤게모니로 이행하는 과도기다. 최근의 헤게모니는 정치·경제 권력을 손에 쥔 몇몇 강대국들의 세력 균형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일본에 견줘,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만한 군사적·경제적 힘을 키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강력한 경제·군사력을 갖췄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자유화를 거세게 요구하는 세계무역기구(WTO)나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고 있다. 이로 인해 북미·일본·서유럽뿐만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에도 존경심을 얻고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헤게모니로의 이행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다. 아시아 국가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오늘 같은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로 잉여 이익을 빼가는 신자유주의의 옛 맹주를 지금처럼 따라야 할 것인가? 선진국들은 그동안 이뤄진 교육과 의료 투자로 지식이 축적돼 있고 인적 자원의 질도 높다. 그들이 잉여의 불평등한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 보호 장치를 무력화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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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차원에서 자유화는 함정과 힘에 의해 달성돼왔다. WTO와 IMF가 개방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국가들에 벌칙을 줄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면, 자율성과 합의를 강조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는 자유화에 대한 ‘함정’의 성격을 갖는다. APEC은 최근까지 자유화를 추진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지역 모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APEC의 약점은 강점이기도 하다. APEC은 WTO나 IMF가 떠안고 있는 규율의 임무를 맡을 필요가 없다. 자발적이고 합의로 일을 처리하는 APEC의 방식은 힘보다 설득으로 자유화를 추진하는 데 긍정적인 구실을 할 수 있다.
정부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와 리서치 기관, 싱크탱크, 언론 등을 골고루 활용한다. 그들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경제를 개방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설명하는 여러 경제모델을 개발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계무역분석프로젝트(GTAP)이다. 이 모델을 이용해 인도네시아의 두 신자유자의자(둘 중 한 명은 지금의 통상성 장관이다)는 WTO와 APEC의 계획에 따라 추진하는 무역 자유화 정책을 따를 경우 인도네시아가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을 분석했다.
지역적 리더십 고민 않는 중국
저명한 인도네시아의 학술지 <인도네시아 경제연구 공보>(journal of Bulletin of Indonesian Economic Studies) 2003년 4월호에 실린 논문에서 그들은 “인도네시아가 추진한 무역 자유화 정책으로 더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인도네시아의 자본과 노동이 섬유와 의류 산업으로 집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모델은 정치를 계산에 넣지 않는 오류를 범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정치·경제적인 기득권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다. 2005년 세계 시장에서 인도네시아의 경쟁력은 강화되지 못했고, 중국과 베트남 같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도전에 밀려 직물·의류 산업은 황폐화될 위기에 놓였다. 이들 산업의 몰락은 안 그래도 스태그플레이션에 고통받고 있는 국가 경제에 엄청난 부담이 됐다. 2005년 경제는 6% 이하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정도로는 섬유산업의 몰락으로 쏟아진 실업자들을 감당할 수 없다. 올해 10월 현재 물가상승률도 이미 15% 수준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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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경제의 자유화를 추진하는 옛 질서를 계속 따라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그를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그들의 경제 모델은 자유화가 세계 경제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렇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잉여 이익은 여전히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로 흘러들고 있다. 불평등한 잉여 이익의 흐름을 완화하기 위해 ‘아시아 경제 블록’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돼왔다. 이 계획이 구체화되려면, 인구가 많은 중국·인도·인도네시아 등 세 나라를 포함해야 한다. 블록의 목적은 지역적 노동 분업과 시장의 공유를 통해 빈곤을 해소하고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 세 나라의 빈곤층들은 정치적 안정을 해칠 수 있는 위험 요인이기도 하지만, 꾸준한 교육과 의료 프로그램을 통해 뛰어난 인적 자원의 공급원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인도·인도네시아를 포괄하는 아시아 경제의 지역연합이 탄생할 수 있을까? 현재 이들 나라에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인도의 네루 같은 리더십을 갖추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가 없다. 중국은 지금까지 지역적인 리더십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급속한 경제 발전을 통해 수많은 인구를 먹여살리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들은 미래에 중국이 할 수 있는 구실을 고민하기보다는, 경제 발전을 위한 자원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실질적인 문제들에 매달려 있다. 비전과 리더십 없이 전환기를 살다 보면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피라미드 구조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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