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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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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랄라라라! 또 땅이 흔들린다

등록 2005-11-03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비야의 파키스탄 리포트 6일째]

아침에 일어나보니 고스란히 무너져있는 앞산, 걸어서 구호현장을 가다
서로 웃기는 ‘벌구클럽’의 팀워크로 만다쿠차 주민 200여명을 치료

잘랄라라라라라라(지진이다)!!!!

새벽녘 바깥에서 남자아이의 비명이 산골짜기를 울린다. 우리가 자고 있던 텐트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곤히 자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각자 여권을 주머니 속에 넣으세요.”

산길에 생긴 무덤, 흐느끼는 여인

튕기듯 천막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어젯밤까지 병영 앞에 있던 산이 고스란히 무너져 강을 메우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각자의 막사 밖으로 내민 군인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조금 있다가 또 한 번 흔들. 이건 여진이 아니라 또 다른 지진임이 틀림없다. 갑자기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야 긴급구호팀장이니 구호활동 하다가 현장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만 우리 의료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해야 한다. 아까 여권을 챙기라는 말은 사실 철수할 때를 대비한 것이 아니었다. 여권은 최악의 상황에서 주검 확인시 가장 정확한 신분증이 되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간호사 1명이 눈물을 보였다. 그래, 무섭기도 하겠지. 갑자기 이렇게 위험한 현장에 안전훈련을 받지 않은 의료진을 이끌고 온 것이 잘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까짓 일로 마을에서 철수하기는 싫었다. 단원들 앞에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머릿속과 뱃속은 내내 편치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때의 지진이 리히터 규모 6.0이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아침에 마실 따끈한 물을 준비해달라고 했더니 말을 잘못 알아듣고는 큰 물통 한가득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웬 호강이냐. 그 물로 세수도 하고 머리에 물도 묻히니 갑자기 모든 상황이 견딜 만해지는 것 같다.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도, 새벽의 여진도. 며칠째 신고 있는 양말도. 기름 범벅인 볶음밥도.

“아침의 강진으로 또 산사태가 나서 오늘 가려던 만다쿠차로 가는 길이 꽉 막혔습니다.”

우리 일행을 맡고 있는 잘생긴 장교가 아침을 먹고 헐레벌떡 우리 막사로 달려와 보고한다.

“언제쯤 길이 뚫릴 것 같아요?” “산 곳곳이 무너졌으니 오늘 중으로 복구하기가 힘들겠는데요.”

오늘 중으로 힘들다? 까짓것, 도로가 유실되어 차를 타고 갈 수 없다면 걸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나요?”

“걸어서요? 한 1시간은 넘게 걸릴걸요.”

겨우 1시간이라면 걸어서라도 가야지. 강진 이후 한 번도 의료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는데. 우리 약품과 텐트와 물자를 군인들이 운반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날 오전 8시, 우리 일행 8명과 통역 2명은 20명의 짐을 나르는 군인과 통신병, 장교 1명, 그리고 가면서 작은 다리도 놓고 길도 봐주는 공병 5명과 함께 대장정에 올랐다. 날씨는 청명하고 하늘은 맑아 마치 소풍가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만다쿠차로 가는 길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했다가 공병이 방금 만든 다리로 강을 건넜다가 또 산길을 오르기를 1시간45분. 마지막 15분은 아슬아슬 붙어 있는 길을 경운기를 타고 갔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산길에서 새로 생긴 무덤들을 많이 보았다. 흙냄새 가득한 무덤가에서 젊은 여인이 흐느끼는 것도 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헬기만 뜨면 이동병원은 무너지고

오늘의 이동병원 장소는 헬기장이 있는 군인 캠프였다. 헬기가 뜨고 내리는 근처에는 진료소를 설치할 수 없으나, 소대장교 말로는 지진이 난 뒤로 한 번도 헬기가 온 적이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어제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 덕에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100여 명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5동의 천막 병동과 약국을 만들고 진료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의료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심한 외상환자가 많았다. 후방 병원으로 후송해야 할 위급한 환자도 네댓 명 됐다. 애송이 장교에게 되든 안 되든 헬기를 불러달라고 부탁해놓았다.

‘뚜뚜뚜둑 뚜뚜뚝’

1시간쯤 지났을까,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났다. ‘아, 저 환자들은 살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헬리콥터가 착륙하면서 일으키는 바람에 우리 천막 병동들이 모두 날아갈 판이다. 민완한 장교가 천막 중앙에 있는 폴대를 일부러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약품이고 청진기고 몽땅 쓸려갔을 거다. 우리도 되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흙바람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중환자 4명을 실은 헬기는 또다시 굉음을 내며 하늘 저쪽으로 사라졌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조용하던 이동병원에 아까보다 더 큰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군인들의 물자수송 헬기. 어찌나 바람이 세던지 그 헬기가 떠난 뒤에는 완전 폐허가 된 천막 병원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 뒤에도 환자수송용 헬기가 한 번 더 떴고, 오후 늦게 산간지방에 고립된 주민을 위한 물자 배분 수송기가 왔다. 이 작은 마을에 하루에 4번이나 헬기가 오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우리는 헬기가 나타날 때마다 서류나 약품을 꼭 잡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헬기가 가고 나면 다시 텐트를 세우고 물건을 정리하면서 진료를 했다. 이런 영업방해가 없다.

아침에 지진 때문에 놀라고 걸어오느라 힘들고, 헬기가 하루 종일 무진장 바람을 일으켰는데도 의사와 간호사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많은 사람들의 진료를 잘도 해내고 있다. 오늘 하루 진료 환자 수가 200명도 훨씬 넘었다. 정말 자랑스럽다.

이번 긴급구호 의료활동은 반도 끝나지 않았지만 성공 예감이다. 왜냐하면 우리 팀원 간의 팀워크가 무진장 좋기 때문이다. 물론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실수를 계속해서 가끔씩 눈을 흘기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도 좋은 팀워크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우리 8명 팀워크의 핵심은 서로의 고유 영역에 대한 신뢰. 의료에 관한 판단에서 나는 전적으로 의료진의 의견을 따르고, 의료진은 그 외의 모든 내 판단을 믿고 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뭉갠 것처럼 흔적 없는 마을들

세상에는 ‘미간클럽’과 ‘벌구클럽’이라는 게 있다지? 어떤 일을 할 때 너무나 심각해서 양미간을 찌푸리며 일하는 사람들, 반면 입만 벌리면 우스갯소리(구라)를 하여 서로 웃고 웃기며 일하는 사람들. 경험상 나중에 보면 일의 결과는 두 클럽이 거의 비슷하다. 긴급구호 현장은 애초에 미간클럽이 되기 쉬운 조건이지만 이번에는 많은 ‘벌구’들을 만나 이렇게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거다. 정말 고맙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다가 잠깐 눈이 마주친 헬기 조종사에게 우리를 나와자바드까지 태워다줄 수 없냐고 물으니, 7분 안에 준비하면 그렇게 해주겠단다. 재빠르기로는 한국인 따라갈 사람들 없지. 6분45초 내로 준비하고 헬기에 올랐다. 우리 약품과 천막은 군인들이 가져오기로 했다. 헬기에서 내려다보니 자바 마을의 95%가 파괴됐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마을들은 누군가 일부러 뭉갠 것처럼 흔적이 없고, 무너져내린 산은 거대한 흙무더기가 되어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었다. 산골마을로 향할 때마다 우리 발목을 잡았던 산사태가 곳곳의 길을 막고 있는 것도 한눈에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는 하얀 눈을 머리에 인 5천m급의 잘생긴 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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