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의 파키스탄 리포트 9~10일째]
도떼기 시장 같았던 마지막 진료, 겨울이 닥쳐와도 국제사회 관심은 못 미쳐
한국에 돌아와 보니 파키스탄 지진은 까마득한 옛일…그러나 국민 여러분!
마지막 이틀간의 이동진료소는 만세라 근처의 말라크푸르에 차렸다. 여기는 우리의 현지 파트너인 KBDO가 추천한 곳으로 아주 시골도 그렇다고 도시도 아닌, 그래서 의료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도 지진을 피해갈 수 없었는지, 마을 전체가 텐트촌이다. 무너지지 않은 버젓한 집을 놔두고도 또 지진이 올까봐 바로 집 앞에 텐트를 쳐놓고 사는 사람들이 1만여 명, 마을 주민 대부분이란다.
만성질환자 80%의 딜레마
우리는 마을회관을 내과와 약국으로 쓰고 텐트를 2동 쳐서 외과와 한의과 병동으로 썼다. 여기는 산골마을과는 전혀 다른 말을 쓰고(아프가니스탄에서 쓰는 파슈툰어) 아주 보수적인 동네라 여자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절대로 남자들과 줄을 같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접수대를 두 개 만들어 여자와 남자 줄을 따로 따로 했다. 그런데 여자들은 아예 줄을 서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탓일까. 웃는 얼굴로도, 심각한 얼굴로도 한 줄로 서라는 말은 죽어도 안 듣는다. 특히 동네 할머니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동안 애써 만들어놓았던 줄이 엉망이 되며 할머니가 무조건 맨 앞이 된다. 노인 공경하는 마음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질서 잡기는 정말 어려웠다.
마지막 날은 환자들로 도떼기시장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진료한 환자가 500명이 넘는다. 환자 수로 보면 대박이지만 달리 말하면 한 환자당 시간이 별로 들지 않는 만성 환자들이라는 얘기다. 나도 통역의 도움으로 여자 접수를 보면서 일손을 거들었다. 의료보조 일주일이 넘어가니까 말이 필요 없이 얼굴 표정과 제스처만 보아도 어디가 아프다는 걸 알아낼 수 있을 정도다. 역시 훈련과 실전은 무서운 거다.
내가 접수한 300여 명의 여자와 아이들 중에 제일 많은 것은 만성설사, 지진이 났을 때 깔려 있어서 생긴 타박상이나 근육통, 위염(스트레스로 인한) 등이다. 특히 설사는 고질병인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계속 설사를 했으니 병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고 했다. 내가 하도 의심스러워 이 동네 식수원이 어디냐고 하니까 강물을 파이프로 끌어다가 쓴단다. 그리고 마실 물이 나온다는 모스크를 따라가 보았다. 약 100m 깊이의 우물에서 길어다 먹는데 지진 뒤 그 물이 흙탕물로 변해버렸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물을 마신다고 했다. 이런 곳은 긴급구호가 지나 재난 복구사업 단계로 들어가면 반드시 펌프나 우물 등 상수도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환자가 많아서 힘은 들지만 신나고 좋은데,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간 설사약, 안약 등이 오후가 되니 동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몇 시간씩 걸어와서 마당 가득 모여 있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고, 병대로 약을 주자니 약이 없고. 그나마 CJ제약에서 협찬받은 비타민제가 많이 있어 아이들에게는 처방약과 함께 나눠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치료약은 아니지만 영양이 부족한 이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사실 진료소에 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특별히 아프거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구하기 힘든 약품을 얻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것이 긴급구호 의료진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떠날 때는 긴급구호를 한다고 하지만 막상 현지에 와보면 정작 긴급한 환자는 전체 환자의 20%나 될까, 나머지는 만성 질환환자를 돌보게 된다. 우리 팀처럼 차도 다니지 않는 산골에 들어가서 진료한다 해도 긴급한 환자는 총 환자 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찾아온 환자에게 ‘당신은 이번 지진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니 돌아가시오’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산속 마을과 도시 외곽 등 네 군데에서 9일간 우리가 치료한 환자는 모두 1550여 명, 이 가운데 몇십 명은 우리 의료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을 뻔했거나 심한 외상으로 팔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해냈다는 것이 매우 뿌듯하고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하지만 부상자들의 치료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데, 그들을 돌볼 다른 의료진을 확보해놓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부디 우리가 떠난 다음에도 다른 의료진이 이들을 계속 도왔으면 좋겠다.
제2차 대량 사망 사태의 경고음
재난 현장에 파견된 각국의 의료진들도 대부분 방송이나 언론에 노출되기 쉬운 대도시에 몰리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의료진들이 계획을 세울 때는 대도시뿐만 아니라 신골이나 소외된 지역의 환자들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인도적 구호가 아니겠는가. 하여간 월드비전은 앞으로 6개월간 이재민 겨울나기 프로그램 지원에 집중해 산골마을 아이들에게 영원무역에서 제공하는 모자 달린 어린이 방한복 5만 벌을 비롯한 2차 긴급구호 지원을 할 예정이다.
이번 파키스탄 대지진은 조류독감, 허리케인 등 다른 재난에 묻혀 마땅히 받아야 할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국제사회의 지원도 저조해서 꼭 필요한 구호자금의 8%도 모금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솔직히 쓰나미와 비교해보면 사망자 수는 8만여 명(어린이 사망자 3만2천여 명)으로 적지만 이재민 수는 총 400만 명으로 쓰나미 때를 능가한다. 게다가 살아남은 이재민들이 앞으로 닥칠 겨울에 대비하지 않으면 제2차 대량 사망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경고도 있었다.
그러나 약 2주일 만에 한국에 돌아와보니 파키스탄 지진은 언제 있었냐는 듯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돼버린 듯했다. 아, 이 일을 어쩐다. 한 달 안에 파키스탄 산악지방에는 눈이 올 것이고, 산골마을의 허름한 텐트 안에 비닐 한 장을 깔고 자는 아이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곧 폐렴과 저체온증에 시달릴 것이다. 식량도 턱없이 부족할 것이 뻔하다. 강진에서 겨우 살아난 목숨, 애써 살려놓은 목숨이 이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면…. 이래서 파키스탄 지진 긴급구호는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
3만원: 4인 기준 한가족의 1주일분 식량세트 3개, 기초의약품
5만원: 4인 기준 한가족의 긴급구호물품 1세트 10만원: 4인 기준 한가족의 긴급구호물품 2세트
* 긴급구호물품 세트의 구성: 식량세트, 식수, 담요, 비누, 의류, 비상약품, 세면도구, 조리도구
△ 가장 시급히 필요한 물자: 방한·방수용 텐트, 담요, 아동용 방한복 등
* 일교차가 심하고 곧 닥쳐올 겨울에 대한 대비가 시급히 필요하다. 특히 4백만 이재민들에게 필요한 텐트는 60만 개 정도로 추정된다.
* 현물을 보낼 경우 운송비용이 많이 듭니다. 파키스탄 내 혹은 주변국에서 물건을 사서 운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업에서 대량의 물자를 지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현금 지원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 후원방법: 월드비전 02-784-2004, www.worldvision.or.kr, 신한은행 296-05-010260(예금주: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새해 벌 많이 받으세요”…국힘 외면하는 설 민심
‘윤석열 친구’ 선관위 사무총장도 “부정 선거, 신이 아니고선 불가능”
이재명 vs 국힘 대선주자 초박빙…박근혜 탄핵 때와 다른 판세, 왜
전도사 “빨갱이 잡으러 법원 침투”…‘전광훈 영향’ 광폭 수사
윤석열 재판 최대 쟁점은 ‘그날의 지시’…수사 적법성도 다툴 듯
“내일 가족 보러 간댔는데…” 22살의 꿈, 컨베이어벨트에 끼였다
‘정년 이후 노동’에 임금삭감은 당연한가
법원 방화까지 시도한 10대 구속, 누구의 책임인가 [사설]
한반도 상공 ‘폭설 소용돌이’…설 연휴 30㎝ 쌓인다
경호처 직원들에 ‘윤석열 찬양’ 노래 시킨 건 “직장 내 괴롭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