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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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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 강자 보호 원칙?

등록 2005-08-03 00:00 수정 2020-05-03 04:24

SDI 노동자 위치추적 처벌받지 않은 삼성이 X파일에선 피해자를 자처
기업이나 국가기관의 위반에만 관대한 통신비밀보호법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삼성SDI 노동자 위치추적 사건. 지난해 7월 삼성의 하청업체 전·현직 노동자 등 6명은 “누군가 휴대전화를 불법 복제해 (개인의 프라이버시인)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며 그 ‘누군가’를 찾아달라며 서울 중앙지검에 고소했다. 당시 그 ‘누군가’와 함께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고소된 사람은 이건희 삼성 회장 등 임원 6명. 삼성쪽은 “사실무근”이라며 펄쩍 뛰었고, 검찰도 기술적으로 진범을 밝히기 힘들다며 수사를 중단했지만, 새삼 국가정보원을 능가한다는 삼성의 정보력이 입길에 올랐다.

딱 1년 만에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학수 삼성 구조본부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이 통신비밀보호법을 들고 ‘피해자’연하면서 법원에 달려간 것이다. 이들은 1992년 대선자금 지원 의혹이 담긴 도청 테이프를 방송해서는 안 된다며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또한 도청 내용을 보도한 언론사에도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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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복국집 사건의 피해자는 김영삼?

통신비밀보호법은 강자를 보호하고 있을까? 아니면 약자를 보호하고 있을까? 적어도 지난 10여년 동안 그 쓰임새를 봤을 때, 이 법은 상당히 편향적으로 운용됐다. 태생부터 ‘권력을 가진 자’의 의지로 출발했다는 점도 아이로니컬하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 김기춘 전 법무장관과 부산 지역 지검장, 경찰청장 등 기관장 8명이 여당인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기로 모의했다가, 이것이 국민당 정주영 후보쪽에 도청돼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의 초점은 엉뚱하게도 ‘관권선거 모의’에서 도청으로 이동했고, 김영삼 후보는 되레 “이번 사건에서 내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김 후보는 ‘낙선’을 우려한 영남표의 결집 덕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도·감청을 규제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은 초원복집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 12월에 제정됐다. 이 법은 도·감청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이를 배포하거나 누설한 사람도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삼성이 언론에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밖에 이 법은 수사기관이 도·감청을 할 경우 법원의 영장을 받도록 하는 등 인권보호 장치도 마련해놨다.

통신비밀보호법으로 처벌을 받는 사람은 대부분 ‘민생 도청사범’들이다. 경찰 관계자는 “의뢰인의 요구로 사생활을 캐는 심부름센터의 직원들이 통신비밀보호법의 주요 처벌 대상”이라고 말했다. 좀더 ‘직업적으로’ 도청을 일상화하는 곳은 차량 견인업체들이다. 이들은 광대역 수신기로 경찰의 무전을 도청해 교통사고 현장에 순찰차보다 빨리 출동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도청이 일상화된 걸까? 도청방지 전문회사인 한국통신보안의 안교승 대표는 “남의 정보를 몰래 빼내고 이를 막는 실랑이는 기업이나 국가기관 등 고급정보를 다루는 곳에 한정돼 이뤄진다”며 “도청이 평범한 시민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라고 말했다.

되레 도청과 같은 프라이버시 침해 행위가 일상화된 건 국가의 손길이 미치는 영역에서다. 2003년 SK텔레콤 통계를 보면, 국정원·검찰 등 수사기관이 요청해 이뤄진 통신자료 및 통신사실확인자료 제출 건수는 61만3794건이다. 가입자 25명당 1명꼴로 자신도 모르게 통신자료가 조회당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수능부정 사태 때에는 경찰이 수능 당일 전송된 25만여건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가입자로부터 아무런 동의도 받지 않고 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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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일벌백계’ 받는 민생 도청사범과 달리 기업이나 국가기관의 프라이버시 침해 행위의 적발과 처벌의 그물코는 성글기 그지없다. 아직까지 시민단체와 피해자들은 삼성SDI 위치추적 사건에 대해 검찰의 ‘봐주기 수사’를 거론하고 있다. 정·관계 주요 인사를 도청한 국정원 미림팀 요원들은 아무런 사법처리 없이 면직되는 것으로 끝났다.

최근 법무부가 마련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시행령도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시민단체는 비판하고 있다. 이 시행령은 통신사업자가 만에 하나 있을 수사자료 제출을 위해 통신사실확인자료(수·발신자 정보, 시간 등)를 6개월~1년 동안 보관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사업자조차 뚜렷이 보관할 의사가 없는데도, 이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도청 공포증’에 시달리는 노동자를 보라

7월27일 검찰의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수사 도중에 274개의 테이프가 추가로 발견됐다. 삼성-중앙일보-정치권의 추악한 뒷거래 의혹보다 더 큰 충격이 테이프 속에 잠복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앞서 삼성은 대국민 사과문에서 “불법 도청과 무책임한 공개 및 유포는 개인의 인권 확보와 우리 사회의 민주 발전을 위해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며 자신들이 ‘피해자’임을 상기시켰다. 274개의 도청 테이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치·경제·언론 권력은 삼성이 보여준 이런 모범을 따르려 할 것이다.

삼성SDI 해고 노동자들은 아직도 ‘도청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SDI 해고 노동자인 송수근(42)씨의 부인 박미경(37)씨는 한때 우울증까지 앓았다.

“삼성이 발표한 사과문을 보면서 웃기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지금도 집안에 구멍이 있으면 몰카가 있을까봐 막아놓아요. 집 밖에 어슬렁거리는 사람을 보면 삼성에서 보낸 사람인가 싶고….”

검찰은 다시 통신비밀보호법을 들고 시험대에 올랐다. 강한 자의 프라이버시는 중요하고, 약한 자의 프라이버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닐까. 프라이버시 약자들은 검찰이 공명정대한 수사로 대답할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론 윤리가 법을 앞선다

공익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면 도·감청 내용이라도 보도해야

실정법의 윤리와 언론 윤리는 다르다.
대부분의 언론학자들은 문화방송이 비록 실정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국정원 도청 테이프를 보도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공익적 가치가 앞선다면, 때론 법을 어기면서도 국민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이 도청 테이프를 보도하지 않는다면, 어떤 단체와 수사기관이 이런 사실을 찾아내고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감청 문제나 정치권·재벌·언론사주의 추악한 뒷거래는 시민의 시야에 잡힐 수 없습니다.”
장호순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이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특수한 지위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역할을 잘 보여주는 예다. 장 교수는 “실정법을 어기더라도 당연히 보도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정보인권 단체의 시각은 어떨까.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선과 강화를 위해 운동해온 진보네트워크의 오병일 사무국장은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로 “불법 도청을 해서 안 된다는 건 당연하지만, 언론이 일단 내용이 공익에 부합된다고 판단한 이상 보도해야 옳다”고 말했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 전 사장과 이학수 구조본부장의 프라이버시의 가치보다 공익적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이다.
현행 형법은 명예훼손의 경우 위법성 조각 사유를 들고 있다.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보도 내용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면 그 책임이 면제된다. 그러나 통신비밀보호법에서 도·감청 누설에 대한 위법성 조각 사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알 권리’를 규정한 헌법을 제외하고 통신비밀보호법만으로 판단한다면, 언론이 재판에서 패소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법학자들은 홍석현 전 사장과 이학수 구조본부장이 공인인 점과 이들의 대화 내용이 사회 질서를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재판 결과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삼성은 최근 문화방송 등 일부 언론사에 대해 소송을 내기로 잠정 결정한 상태다.
도청 테이프가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언론의 취재 경쟁도 거세졌다. 검찰은 테이프를 공개한다면 검찰 스스로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하는 꼴이 되므로 ‘절대 불가’ 방침을 고수할 것으로 보이지만, 수사 과정에 따라 혐의가 입증되면 언론을 통해 보도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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