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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왜 터프해졌는가

등록 2005-08-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개정 공정거래법 헌법소원과 X파일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 등 “법대로” 외쳐
구조본 내부에서 재무팀과 ‘기싸움’ 벌이는 법무실이 주도한다는 지적 많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삼성이 좀 이상해졌다. 지난해 공정거래법 개정 작업에 대한 극렬한 반대에서부터 올해 4월 시행된 개정 공정거래법에 대한 헌법소원 제기, 옛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X파일) 관련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에 이르기까지 주요 현안을 다루는 삼성의 요즘 태도를 보면, 전통적인 ‘삼성 방식’과 크게 다르다. 밖으로 잡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대응하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법대로 하자’는 강경 기류가 흐른다.

“변호사들, 일하는 것 하고는…”

삼성이 얽힌 송사가 이전부터 여럿 있긴 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를 둘러싼 변칙 증여 관련 소송 등 적잖은 법적 다툼을 오래전부터 벌여오고 있는 터다. 그렇지만 이들 사건에서 삼성은 외부의 문제 제기에 마지못해 나선 수세적인 처지였다. 요즘 불거진 법적 다툼은 다분히 삼성쪽의 공세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드러낸다.

삼성이 이렇게 변한 건 무엇 때문일까? 바깥의 따가운 눈길을 염두에 둘 겨를이 없을 정도로 삼성에 절박한 사안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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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현안에 맞닥뜨려 나타난 삼성의 강경 드라이브 가운데 특히 의문투성이인 건 삼성생명 등 삼성계열 3사가 개정 공정거래법 11조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일이다. 개정 공정거래법은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재벌개혁 방안이어서 이에 대한 헌소 제기는 곧 정부와 정면 대립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여겨진다. 당연히 삼성쪽에 부담을 안기는 대목이다. 법 개정 과정에서 헌법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한데다 재계와 합의까지 거쳤던 사정을 감안할 때 여론의 따가운 질책도 감수해야 했다.

일각에선 삼성의 헌소 제기 시점이 법 시행 뒤 3개월에 이르는 6월28일이었다는 점을 들어 90일 안에 헌소를 제기하도록 한 규정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시한에 맞닥뜨려 곧 물건너갈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어쩔 수 없이 행사한 것이란 풀이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개정 공정거래법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삼성으로선 기간 제한 없이 언제든 헌소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으로선 서둘러 헌법소원을 제기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재계 안팎에서는 삼성의 두뇌 조직인 ‘구조조정본부’(구조본·본부장 이학수 부회장) 내부의 ‘파워 게임’(힘 겨루기)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판·검사 출신 중심의 외인부대로 이뤄진 법무실(실장 이종왕 사장)이 지금의 강경 대응을 주도함으로써 전통적인 주류인 재무팀(팀장 최광해 부사장)과 마찰음을 빚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답지 않은’ 대응 방식은 그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헌법소원 제기 당시 “변호사들(법무실을 지칭), 일하는 것 하고는… 쯧쯧”이라며 못마땅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문제의 공정거래법 11조는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기업집단에 소속된 금융·보험사가 보유한 계열회사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법 개정 전에는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포함해 30%까지 의결권 행사를 할 수 있던 것을 법 개정으로 내년 4월1일부터 3년간 해마다 5%씩 줄여 2008년까지 15%로 낮추도록 돼 있다. 삼성생명과 삼성카드를 매개로 그룹 전체를 통솔하는 삼성의 지배구도로 보아 간단치 않은 사안이긴 해도 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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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규에서 정한 최종 목표선인 15%까지 떨어지더라도 당장 사단이 벌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2008년까지 가는 동안에는 갖가지 정치·사회적인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삼성이 그렇게 서둘 일은 아닌 듯하다. 2007년에 이르면, 정부의 ‘시장개혁 로드맵 3개년 계획’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 작업이 이뤄지게 돼 있어 이때 다시 공정거래법은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때쯤이면 참여정부의 임기가 끝나 다음 정권의 향배나 이와 연계된 개정 공정거래법의 운명이 불투명하다.

지난해 법무실 규모 크게 늘렸다

삼성으로선 불투명한 막이 걷힌 뒤 개정 공정거래법을 논란거리로 부각시키는 선택을 하는 게 더 유리해 보인다. 개정 법이 실제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조그마한 것이라도 부작용은 빚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사 2007년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내년 4월부터 5%씩 줄이도록 돼 있으므로, 그 시기를 앞뒤로 이슈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개정 공정거래법에 대한 삼성의 지난번 헌법소원 제기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성급하고 뭔가 결여된 선택으로 여겨진다. 치밀하고 매끄러운 일처리를 자랑하는 ‘삼성 방식’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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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 사태에 대한 대응도 자연스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삼성쪽은 방송에 앞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7월21일 방송을 통해 본격적으로 불거진 뒤에는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임을 강조하며 이를 보도하는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며 결기를 내보였다. 모든 언론을 적으로 삼겠다는, 적정 수위를 넘어선 대응이었다. 나흘 뒤 구조본 팀장 회의를 연 뒤 미약하나마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사실을 떠올려보자. 법무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삼성의 ‘법대로’ 태도는 별로 실익을 거두지 못했다.

삼성그룹을 움직이는 핵심인 구조본 안에서 법무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은 지난해부터다. 삼성은 ‘예방 경영’을 명분으로 내세워 법무실 규모를 지난해에 크게 늘렸다. 그해 8월 대검 수사기획관을 지낸 이종왕 변호사를 사장급 법무실장으로 영입한 것은 ‘법무실 키우기’의 결정판이었다. 현재 구조본 법무팀에만 판·검사 출신 15명가량이 포진해 있고, 그룹 전체로는 무려 100명을 웃도는 변호사가 활동 중이다. 초대형 로펌(법무법인)을 꾸린 셈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삼성이 법무실 규모를 키운 게 그룹 차원의 ‘법률 서비스 수요’를 채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1차적인 이유고, 뒷면에는 구조본 재무팀의 몇몇 결정적인 실책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에버랜드 문제에서 실책 저지른 재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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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팀의 실책은 ‘금융자회사와 비금융자회사를 동시에 지배할 수 없도록 한’ 금융지주회사법, ‘재벌 계열 금융사의 타회사 주식 소유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금융산업구조개선법과 관련돼 있다. 삼성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가 2003년 말 보고서상 금융지주회사법을 위반한 상태였고, 삼성생명·삼성카드는 금융산업구조개선법을 위반한 상태라는 사실을 재무팀이 제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정설로 돼 있다. 지난해 4월 참여연대쪽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 뒤 삼성에서 설득력 있는 해명과 대책을 내지 못한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삼성쪽은 금융지주회사법 위반에 대해선 보유지분 평가 방식을 바꾸는 ‘꼼수’로 법망을 빠져나가려 했고, 금융산업구조개선법 위반과 관련해선 “의결권 행사 의지가 없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법 위반 상태를 해소하는 노력과 계획은 전혀 없었다. 구조본 차원의 치밀한 대응 전략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삼성 최고위층은 이 때문에 구조본 운영의 주축을 재무팀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음직하다. 두 가지 법이 모두 이건희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삼성의 권력 구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법 위반 시비에 대응해 법무실을 키우는 선택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룹 차원의 법률 수요 증가와 재무팀의 실책을 발판으로 덩치를 키운 구조본 법무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건 이종왕 실장 영입 직후인 지난해 9월이었다. 삼성이 주요 현안에 대한 대응에서 유례없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게 이때였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삼성은 전경련을 전면에 내세워 개정안을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 전경련을 실질적으로 이끈 현명관 부회장(현재 삼성물산 회장)은 삼성 비서실장 출신이다. 애초 개정안은 이미 재계와 합의를 거친 것이어서 삼성쪽의 강경한 반대 표시는 매우 의아스럽다는 반응을 낳았다. 결국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개정 공정거래법은 삼성쪽의 의도가 반영돼 애초 안보다 크게 후퇴한 채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렇게 후퇴한 개정 법에 대해서까지 헌법소원을 제기한 삼성의 강경 대응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재계 일각에선 그룹 차원의 종합적인 이익을 고려하는 것에 앞서 외인부대로 이뤄진 법무실의 ‘존재 과시’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법무실·재무팀 파열음 터져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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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를 외치는 법무실 주도의 강경 드라이브가 삼성그룹에 얼마나 이득이 될지는 의문이다. X파일 등 삼성 관련 각종 송사에서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하면서 ‘법적 실익’을 챙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반적인 정치·사회적 맥락을 따지는 과정 없이 법리 논쟁으로 이끌고 가는 게 전반적으로는 잃는 게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무팀과 달리 법무실은 구조본 차원에서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판·검사 출신이 즐비한 외인부대 성격이어서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X파일에서 드러난 불법 로비 당사자로 등장한 이학수 본부장을 비롯한 최상층부에 유고가 생길 경우 법무실·재무팀을 중심으로 한 파열음이 터져나올 수 있다는 관측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이는 삼성그룹 상층부의 권력 지도 변화로 연결될 수 있는 폭발력을 띤 사안으로 여겨진다.



구조본 1인자의 역사

전략 ·기획쪽에서 외환위기 뒤 재무팀이 등극했으나 최근 법무실 급부상

삼성그룹의 두뇌조직으로 일컫는 구조조정본부가 탄생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이었다.
구조본은 그룹 회장을 보좌하며 계열사를 통제해온 비서실 기능을 이어받은 조직으로, 계열사 사업 및 인력 구조조정을 수행하기 위해 생겨났다. 금융감독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 당국에서 재벌그룹 ‘황제경영’의 산실인 비서실을 해체할 것을 은근히 주문한 데 따른 대응이기도 했다.
구조본은 예전의 비서실과 다를 바 없이 그룹 권력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옛 비서실 출신이 그랬듯이 구조본 출신이 중용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구조본의 꼭대기 자리는 이건희 회장에 이어 삼성의 2인자로 꼽히는 이학수 부회장이 차지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1997년 비서실장을 맡은 뒤 지금까지 8년째 구조본을 이끌고 있다. 이 부회장 아래 차장 자리는 김인주 사장이다. 이 부회장, 김 사장을 중심으로 한 구조본은 법무실, 재무팀, 경영진단팀, 기획팀, 인사팀, 홍보팀, 비서팀 등 7개 부문으로 이뤄져 있다. 구조본의 실·팀에는 각 계열사 인력들이 파견돼 그룹 전체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삼성 구조본(비서실 시절 포함)의 주도 세력은 지금까지 대략 두번에 걸친 변화를 겪었다. 외환위기 때까지는 지승림 알티캐스트 사장(전 삼성중공업 부사장) 등 전략·기획쪽 인사들이 비교적 강한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다가 외환위기 뒤에는 재무팀이 득세하게 된다.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것도 전략·기획팀의 힘을 뺀 요인인 것으로 풀이된다. 재무팀은 외환위기 뒤 그룹의 내실을 다지고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현재 구조본의 핵심인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모두 재무팀 출신이다.
지금도 재무팀의 득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부터 판·검사 출신의 외인 부대로 짜인 법무실이 급부상하고 있다. 2세 승계 문제 등 삼성에 얽힌 법적 다툼이 많은데다 비중 있는 법조계 인사들이 영입돼 만만치 않은 권한을 누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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