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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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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알도 파헤치는 학문

등록 2005-06-29 00:00 수정 2020-05-02 04:24

효율적 검시제도를 위해 다양한 직종의 전문가들이 협력해야
법의학 관련 강의도 별로 없는 한국 의대의 현실도 개혁을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법의병리학 전문의사들이나 강력사건의 초동수사를 맡는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못 볼 것’을 많이 보고 다닌다. 오죽하면 외국의 한 법의학 전문가는 법의학 관련 책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주검의 팔뚝에 쳐놓은 거미줄이 아침 이슬에 영롱하게 맺히는 것을 무심하게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의 동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성형외과·치과의사에게도 물어야 한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의 한 관계자는 “산에서 이뤄진 자살의 경우 자살자의 다리가 땅에서 높지 않으면 들짐승들이 다리 아래쪽만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다”고 일러줬다. 그러나 주검과 관련한 변화 하나하나는 이들에게는 모두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주검과 곤충과의 관계를 파는 법의학 분야도 있다. 법 곤충학이다. 미국의 어느 해변에서 숨진 30대 여성이 있었다. 주검에 제일 먼저 달려드는 곤충은 파리로 알려져 있다. 파리는 알을 낳고 알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보고 숨진 시점을 알아낼 수 있었고 곧 범인이 붙잡혔다. 검시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다양한 직종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가장 많이 필요한 분야는 법의병리학 전문의사지만, 법치의학·법정신의학·법인류학·법독물학·법유전학 등도 앞으로는 점점 수요가 많아질 것이다. 이 밖에도 현장 감식에 필요한 탄도·지문·미세증거·섬유·모발·음성·화재·교통공학 등 감식학 전 분야에 걸쳐 전문가가 필요하다.

관련 분야 사이의 협업이 유난히 필요한 점은 현장에서도 확인된다. 토막시체 한 구를 부검하게 된 한 법의병리학 전공의사의 얘기다. “얼굴에서 코를 높이는 수술을 한 흔적이 나오면 성형외과 의사를 불러서 이런 재질은 언제부터 쓴 거냐, 돌팔이가 한 것이냐 아니면 제대로 한 것이냐를 묻는다. 치과치료를 받은 흔적 나오면 치과의사한테 또 물어야 한다. 비싸게 한 것이냐 싸게 한 것이냐부터 단서가 될 만한 여러 가지를 캐묻게 되면 실타래가 풀리게 된다.”

법의학 교실, 법으로 규정할 수 없나

제대로 된 법의학 체계를 세우려면 세분화된 법의학 분야에도 전문가들이 생겨야 하지만 현실은 무척 열악하다. 검시 전문의를 양성하는 제도가 전무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의과대학생이 졸업 뒤에 검시를 평생의 업으로 하기에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의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봉급 수준이나 사회적 처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10명 중 9명이 포기하고 마는 실정”이라고 한 법의학 전문가는 귀띔했다.

전국 41개 의과대학 중에 법의학 교실이 있는 곳은 10곳을 넘지 못한다. 법의학 관련 강의도 1~2학점이 대부분이고, 0.5학점인 대학도 있다. 게다가 실제 부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다. 법의학 수준의 후진성을 탓하기 전에 일본처럼 모든 의과대학에 법의학 교실을 개설하도록 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독립적인 검시 전담 기관의 설립은 법의병리학을 전공하는 의과대학생들의 가시적인 진로를 확보하는 의미도 있다. 전문가들은 검시 전담 기관이 중심이 되어 현재 30명 안팎인 전문가 수를 앞으로 10년 안에 200명 안팎 수준으로 늘려야 법의학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죽음·주검의 존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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