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교사가 태극기세대 학생들에게…너희들의 쿨함으로 감정적 민족주의를 벗어나라
▣ 이성호/ 서울 배명중 역사교사
승일아, 잘 지내니? 고3이라 힘들지?
오늘 옆자리 선생님이 화를 좀 내시더구나. 독도 문제에 대해 수업을 했는데 아이들이 진지하지 못하다면서. 일본에 대해 욕은 쉽게 하면서도 정작 독도에 대해 조사하고 발표하는 수업을 시켰더니 준비를 안 해온 학생이 태반이었다나. 나도 수업 시간에 슬쩍 독도 이야기를 꺼내봤단다. 예상했던 반응들이 나왔지. ‘대마도도 우리 거래요’ ‘일본으로 쳐들어가요’ ‘테러해요’, 심지어 ‘원자폭탄 터트려요’까지. 어때? 2001년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졌을 때 너희들이 한 얘기랑 똑같지? 하긴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던 것 같아. 일본에 대한 이런 감정적 대응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그렇지만 어떤 때는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단다. 아직도 ‘질서, 효도, 충성’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애국조회’ 훈화를 즐~’ 해버리는 거야 그렇다 쳐도, 애국가를 록이나 동요 버전으로 바꿔 부르는 데는 솔직히 좀 ‘깬단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나라 잃은 설움’ ‘국가의 소중함’을 줄기차게 배워야 했던 우리 세대는 ‘신성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무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아. 대학에 들어와 우리 사회의 모순에 눈뜨면서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건 ‘잘못된’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지 ‘국가 자체’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어. 오히려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아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나름의 ‘애국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아. 그러니 ‘조국통일’이니 ‘민족해방’이니 하는 단어에 가슴이 뭉클했겠지.
너희들은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아. 나라 잃은 설움이나 독재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국사책에나 나오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니까. 언젠가 내가 6월항쟁에 대해 감격해서 막 떠들어댔더니, 너희들은 ‘저게 언젯적 얘기야?’라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다봤지? 그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이놈들에겐 87년 6월항쟁이나 일제하 독립운동이나 비슷비슷한 옛날 일이겠구나’ 싶었단다.
두려움의 기억이 없고 오히려 성취의 기억이 강하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도 굉장히 밝고 낙관적이더구나.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앞으로의 발전도 당연하게 생각하더라. 자기 앞날에 대해서는 굉장히 불안해하면서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렇게 낙관하는 게 우스울 정도였단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바라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예전 어른들이 그리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못내 아쉬워. 별 생각 없이 ‘힘을 길러 일본에 복수하자’고 말하는 너희들을 보면 걱정스럽기까지 하단다. 미선이, 효순이를 죽인 미군의 만행에 분노하면서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면서, 그 결론이 ‘힘을 길러 우리도 그들처럼 되자’는 것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니?
정말 한국 대 일본의 문제일까
우리 세대가 ‘광장’을 되찾기 위해 비장해져야 했던 세대라면, 너희들은 그 ‘광장’을 자연스럽게 즐기게 된 첫 번째 세대라고 봐. 어쩌면 당당하게 국가나 민족보다 개인이나 가족, 이웃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세대인 것도 같아. 그런 너희들이 이제 감정적 민족주의나 배타적 애국심을 뛰어넘어 인권, 자유, 평등, 연대, 환경 같은 보편적 가치에 충실한 첫 번째 세대가 되었으면 좋겠어. 독도나 역사 교과서 문제는 정말 ‘한국 대 일본’의 문제겠니? 오히려 과거 침략 사실을 은폐하고 재무장을 추진하려는 전쟁 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아시아 평화 세력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너희들의 그 발랄한 상상력으로 국가나 민족을 뛰어넘었으면 해. 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갖지 못한 유연함과 ‘쿨함’을 너희들은 가졌으니까. 건강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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