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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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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1 - 국민교육헌장] 졸업한 건지, 제대한 건지…

등록 2005-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민교육헌장으로 상징되는 병영같은 학교…박 대통령 아들과 같은 나이여서 더욱 파란만장했다

▣ 김윤태/ 한신대 연구교수·국문학 windor2@hanmail.net

전무후무하게 박정희 시절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 국가 시책들이 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정책들은 다양한 구호와 슬로건으로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인구 절반 이상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채 공적·사적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해야 했던’ 시절의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 현상을 여덟 가지 열쇳말로 복기해봤다. 편집자

역대 대통령 공적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면 늘 1위를 차지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과 흠모의 대상이 돼온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은 제대로 안 된 모양이다. ‘마음으로만 존경하고 돈은 못 낸다’는 심산인가 보다.

깃발을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나야 그분을 그다지 존경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기념관 건립도 찬성하지 않으니 돈을 낼 리 없지만.

오히려 나는 그의 통치 시절 유·소·청년기를 보내면서 불편하고 귀찮았던 기억이 더 많은 편이다. 나는 그분의 아들과 동갑이다. 아니 동갑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학령이었다. 그의 아들과 같은 나이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상급학교를 진급할 적마다 변하는 입시제도의 희생물까지는 아닐지라도 동반 적용 대상이 됐던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 병영에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잘 안 됐던 것 같다.

우선 떠오르는 기억 하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반포됐다면서, 무조건 그걸 외우란다. 다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엄포 속에서. 덧붙여 그분의 아들은 30분 만에 다 외웠다는 비교를 당하면서, 몇몇 아이는 머리 나쁜 놈이라는 난데없는 비난을 감수해가며, 밤늦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어려운 말들을 외워야 했다. 그 뒤로도 ‘헌장’은 각종 시험의 단골 메뉴가 돼 우리를 지치게 했다. 삼백 몇자나 된다는 ‘헌장’의 나머지는 제대로 암송되지 않지만, 첫머리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구절은 아직도 생생하다. 참으로 우린 대단했다. 날 때부터 그런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었다니. 그럼에도 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인가 보다. 나이 50이 다 되도록 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기억 둘. 초등학교 6학년 때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합창단을 급조하더니 노래 연습으로 수업도 모조리 폐지했다. 합창단에 못 낀 대부분의 아이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연일 운동장에서 환영 연습을 했다. 역사적 개통식날 대통령께서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까지 간다고 하여 연변으로 몰려나가 깃발을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나는 행여 대통령의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잔뜩 기대했으나 순진한 시골 소년의 꿈은 까만 승용차 몇대가 휑하니 스쳐지나가는 걸로 끝나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탈했다. 뭐하자고 어른들은 우릴 고속도로가로 내몰았을까. 귓가엔 라디오만 틀면 나오는 수많은 유사 ‘경부고속도로가’들의 멜로디만 웅웅거렸다. 그래도 최안순인가 하는 여가수가 부르던 경부고속도로의 노래는 차분한 목소리 때문인지 오래도록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모습은 그로부터 6년 뒤 전혀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만나게 됐다. 역시 고속도로에서다. 고교 친구들 몇명과 어울려 추풍령 휴게소에 놀러갔다가 식당가 근처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껴 쳐다보니, 문 앞에 새까맣고 다부지게 생긴 차지철 경호실장의 모습이 보였고, 곧이어 한 외국인의 박수소리(웬 박수?)가 들렸다. 식당 문 앞으로 대통령이 나오고 있었다. 그분을 실제로 본 게 뭔 대수라고, 우리들은 경호원들로부터 공연히 험악한 위협만 받았다.

기억 셋. 중학교 시절이다. 퇴비증산운동이라든가 유실수심기운동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한창이었다. 가을도 아닌 봄철에 느닷없이 알밤을 구해 학교로 가져가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밤나무 묘목을 조성한다는 건데, 우리들은 돈을 구해 종묘상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 짓을 하지 않으면 비국민으로 몰릴 분위기였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더 괴롭힌 것은 퇴비증산운동이다. 여름이 가까워오면 해마다 산과 들로 나가 풀을 베어와야 했다.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소도시의 까까머리 중학생이 얼마나 낫질을 잘하겠는가. 하루 1인당 할당량이 5kg인가 그랬는데, 낫질이 서툰 나로서는 엄청난 고역이었다. 팔과 다리를 온통 풀에, 낫에 베여가며 우리 몸피보다 더 많은 양의 건초를 장만해야만 귀가가 허락됐다.

날마다 제식훈련과 총검술

기억 넷. 역시 중학생 때다. ‘자유교양대회’란 게 있었다. 고전이나 양서를 정해 모든 학생들이 그걸 읽고 시험을 보고 독후감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하면 상을 주던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행됐는데, 내가 두각을 나타낸 건 중학교 때였다. 나는 학교 선발로 뽑혀 몇주간 수업도 빠지고 책들만 내리 읽어야 했다. 당시 난 그 지루하고 엄청나게 긴 소설 <로빈슨 크루소>나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을 무려 5번인가 읽었다. 덕분에 시 대회에서 1등을 해서 도 대회까지 나가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5번은 어림도 없었다. 도 대회나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30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지쳐버렸다. 우리는 그걸 ‘강제교양’이라고 불렀다. 그 짓은 고교 시절까지도 이어졌는데, 언제쯤 그 대회가 없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기억 다섯.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학도호국단이란 게 생겼다. 의무적으로 교련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우리는 학생이면서 동시에 군인이었다. 교장은 연대장이었고, 교사들은 교관이었다. 3개 학급씩 하나의 중대가 됐고, 한 학년은 하나의 대대였다. 전교생은 연대 병력을 이루었고, 덩치 좋고 목청 큰 학생들은 학생 연대장-대대장-중대장으로 뽑혔다. 문약했던 나는 문화부장인지 뭔지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정받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했다. 우리는 3년간 거의 날마다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익혀야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운수 사납게도 난 각개전투 훈련 시범단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차출돼,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위장막을 덮어쓰고 먼지 풀풀 이는 운동장을 박박 기며 필승의 의기를 다져야 했다. 시내 공설운동장에서 시범을 보이며 제법 우쭐하기도 했던 그 일 덕에 그해만은 교련 성적이 좋게 나왔다.

기억 여섯. 대학교에 들어가서다. 여전히 학교는 병영이었다. 대학 교련은 1주일에 4시간씩 필수과목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간신히 길렀던 머리를 박박 밀고 문무대라는 곳으로 군사훈련을 가야 했다. 거부하면 곧바로 학적이 변동돼 군대로 끌려가야 하는 의무사항이었다. 그 과정을 마치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온 어느 날 고향 친구랑 서울의 시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훈련 때문에 아주 단발이었으나 친구는 당시 유행대로 장발이었다. 친구가 갑자기 내 옆에서 사라졌다. 그는 파출소 2층으로 끌려가 머리를 잘렸다. 친구는 쥐 뜯어먹은 듯한 머리 모양새를 하고서야 구금에서 풀려났다. 친구가 풀려나던 저녁 6시, 거리엔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멈추어 선 채 소리 나는 곳을 응시했다.

추억의 앨범을 뒤져보는 것은 행복한 일에 속하리라. 그러나 나는 지금 별로 행복하질 못하다. 저 씁쓸한 기억들 속에서 나의 소년·청년기를 회상하고 싶지는 않다. 허나 어쩌랴. 지워지지 않는 것인데. 60∼70년대의 웃지 못할 풍경들이 내겐 무수히 각인돼 있다.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는 정말 저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주요 사건 당시 박지만과 동갑이던 김윤태씨의 개인사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베트남 파병 결정
초등학교 시절 맹호부대 노래며 청룡부대 노래를 엄청나게 듣고 신나게 불렀다. 1960년대 말 고종사촌형이 참전하고 돌아와 가져온 여러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맛도 보았다. TV수상기를 처음 보았다. 덕분에 가난하던 고모네 살림은 많이 폈고 집도 새로 지었다.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한전 다니던 정씨 아저씨는 술만 취하면 골목 어귀에서부터 “맹호는 간다 간다 간다아~”를 불러제꼈다.
1967년/ 대통령 재선
선거운동 기간에 나붙은 벽보를 보며 대통령이 왜 기호 1번 ‘후보’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대통령은 왕이나 종신 총통 정도로 여겨지던 때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수업도 없이 학교만 가면 목이 쉬어라 <경부고속도로가>를 연습, 또 연습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중학교 2학년 때 사회 수업에서 3공화국 헌법을 다 배웠는데,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면서 새 헌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 뒤에 태어난 72년생들의 이름에 ‘유신’이 많다는 보도가 나왔다.
1974년/ 긴급조치 발동·육영수 여사 사망
고교 1학년 여름방학이라 집에서 우연히 TV로 8·15 경축식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더니 꺼졌다. 몇분 뒤 다시 화면이 나오면서 영부인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그날 저녁 까불고 웃다가 작은형에게 혼났다. 국모가 죽었는데 뭐가 그리 신나느냐며. 슬픔에 젖은 형은 그날 밤 착한 백성답게 육 여사를 추모하는 제법 긴 시를 한편 썼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 전격 사형 집행
집에서 <동아일보>를 구독했기 때문에 동아일보 광고 사태를 목격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피살
대학 2학년 때다. 고교 시절까지는 ‘역사적 사명을 잘 아는’ 모범생이었으나 대학에 들어와 다른 세상을 배웠다.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쓴 사건도 들었고,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여공이 추락사하는 것도 보았다. 그해 가을 영등포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어느 날 아침 구치소 안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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