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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놀라워라 ‘대물림 비법’

등록 2005-01-11 00:00 수정 2020-05-02 04:23

증여세 피해 재벌 2·3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과정…최근에는 비상장사 이용하는 방식 유행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재벌총수가 2, 3세한테 그룹 지배권을 물려주는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재벌 일가의 변칙적 상속·증여를 차단하고 소유권을 약화시킴으로써 경영권 대물림을 막기 위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가 도입되고, 주식시장 침체가 지속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로 한꺼번에 대량 지분을 넘기는 데 큰 부담이 따르자 재벌총수들이 세금계획(Tax Plan)을 길게 잡아 증여 개시 시점을 앞당기는가 하면, 주가가 낮을 때 지분을 증여하면 세금을 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금 계획 길게 잡아 증여세 줄인다

지난해 8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보유 중인 지분 21%를 외아들 남호(31)씨에게 증여했다. 남호씨는 동부정밀화학의 최대주주로 부상해 그룹 지배구조를 장악했다. 동부그룹은 이미 1994년부터 지분 승계작업에 나섰는데, 이에 따라 증여세가 합산 과세되는 기간(10년)을 넘었다. 세금계획을 길게 잡았기 때문에 증여세를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도 지난해 말 아들 정지선 부회장에게 지분 9.58%를 증여했고,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장남 동관(20)씨는 (주)한화 지분을 3.47%로 늘리며 김 회장(22.69%)에 이은 3대 주주로 등장했다. KCC(금강고려화학) 정상영 명예회장도 지난해 4월 장남 정몽진 회장 등 아들 삼형제에게 주식 지분 7.35%를 넘겼다. 정 회장은 총 17.62%의 지분을 확보해 KCC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현행법상 증여세 최고 세율은 50%(증여금액이 30억원을 초과할 때 적용)인데, 대주주가 2세한테 주식을 증여할 때는 증여 지분에 따라 과표가 다시 할증된다. 따라서 1천억원어치 주식을 증여할 경우 각종 세액공제를 감안하더라도 500억원가량의 세금을 내야 한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주식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세금낼 돈을 마련하려고 주식을 다시 내다팔기도 어려운데, 30대 초·중반의 재벌 오너 2, 3세들이 돈을 어떻게 조달해 수백억원의 증여세를 낼 것인지 궁금하다.

재벌총수가 2, 3세한테 경영권을 물려주는 과정에서는 여러 편법이 동원돼왔다. 지분 상속은 주로 비상장 계열사를 이용하는데, 공시 의무도 없는데다 다른 주주들의 경영권 간섭도 받지 않아 은밀하게 경영권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과 SK그룹이 각각 비상장사인 삼성에버랜드와 SKC&C를 사실상 지주회사로 삼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삼성그룹처럼 신주인수권부사채(BW)나 전환사채(CB)를 헐값에 발행해 지분을 넘겨주는 방식은 법적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제 어려워졌다. 우회적인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악용해온 해외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 역시 “경영권 특혜상속”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2003년에 두산과 효성 등 여러 재벌들이 중도에 포기한 바 있다. 재벌기업들은 해외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주가 하락시에만 신주 인수 가격을 낮추도록 옵션을 붙이는 방식으로 대주주 일가가 싼값에 지분을 인수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해왔다.

자녀에게 비상장사 주고 전폭 지원

대신 비상장사를 이용하는 것은 똑같지만, 그룹의 전폭적 지원으로 비상장사가 이익을 많이 남기게 해 2, 3세한테 현금을 몰아주는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이 대표적 사례다. 2001년에 설립된 현대차그룹의 비상장 물류 계열사인 글로비스와 건설회사 엠코, 카오디오업체 본텍은 현대차그룹 관련 사업을 독점하는 등 그룹 차원의 지원에 힘입어 매출액과 순이익 모두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글로비스·엠코·본텍 모두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 부사장이 최대주주다. 시장에서는 “정 부사장이 대주주인 비상장회사가 2세 경영권 승계를 위한 현금줄 기반이 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재벌총수들이 자식한테 편법으로 지분을 이동시키기 어려워지자 2, 3세들이 직접 시장에서 지주회사 지분을 매입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 드는 현금을 확보하고 나아가 상속·증여세 재원을 마련하는 창구로 비상장회사가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비상장회사는 사업 시작 초기에 일찌감치 재벌총수가 자녀들한테 물려주는데, 회사가 성장하거나 대규모 흑자를 낸 뒤에 증여하면 주식 수도 크게 늘고 주가도 크게 올라 증여세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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