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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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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등록 2005-01-11 00:00 수정 2020-05-02 04:23

경영권 대물림을 둘러싼 논란들… 한국 상황에서 가족재벌 해체되기 어렵고 후계자 시장 검증도 힘들어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월가의 전설적인 주식투자가로 불리는 워렌 버핏은 “경영권 세습은 2020년 올림픽 대표팀을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식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한국은 경영권을 자식들한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발표가 늘 ‘신선한 충격’으로 대서특필되는 나라다. 미래산업 정문술 회장이 기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때도 그랬고, 중견 기업인 (주)KSS해운 박종규 전 회장이 1995년 은퇴하면서 세명의 아들을 두고도 전문경영인한테 사장 자리를 물려준 일화도 큰 화제가 됐다. 박 전 회장은 KSS해운 사사(社史)에서 “기업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다. 재산 상속은 가치가 낮은 것이고 그보다 더 못한 것이 기업의 경영권 상속이다. 기업은 경영자와 종업원의 합동 작품이지 자식이 기업 발전에 무슨 공헌을 했는가?”라고 말했다. 현재 세 아들은 KSS해운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경영 실패 때 교체 시스템 없어

재벌가의 3세 후계 경영 체제 구축이 본격화되면서 재벌 오너의 경영권 대물림이 다시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재벌 경영권이 창업 세대에서 2세로 넘어간 과거에 비해 3세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은 주주 등 이해당사자들의 통제를 받는데다 기업 지배구조도 개선됐기 때문에 세습경영을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 되며 ‘시각 교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전문경영인이 기업 발전을 위해 효율적인지, 창업 가문의 대주주 경영자가 더 나은지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울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가족기업을 옹호하는 쪽은 “전문경영인은 단기 실적에 집착해 장기적 성장을 위한 투자를 꺼리기 때문에 기업 성장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대주주 오너가 재산 대부분이 기업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책임경영에 나서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족기업은 2, 3세 경영자의 능력이 부족해 경영 실패를 겪었을 때 경영진을 교체할 시스템이 없다. 특히 재산이야 자신들이 번 것이라서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세습을 용인할 수 있지만, 경영권은 경영 실패가 그룹을 위기로 몰아넣고 종업원들의 실업을 초래할 뿐 아니라 국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부의 승계와 경영권 승계는 명백히 구분돼야 한다. 구멍가게를 경영하다가 망하면 자기 혼자 고달프고 말지만 재벌기업 경영에 실패하면 그룹 차원에 머물지 않고 경제 전체가 결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영철 국회 산업예산분석팀장은 “지배주주 가족은 투자 시계가 길기 때문에 기업의 장기 성과를 높인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해외 실증연구를 보면 창업자 기업은 연구개발(R&D) 투자에 적극적이지만 경영권 세습기업은 전문경영자 기업보다 R&D 투자에 소극적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재벌 오너의 긍정적 구실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을 때 가능할 뿐”이라며 “지배주주가 순환출자를 통해 소유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의결·통제권을 행사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족기업이 경영 실패 및 오류에 대한 비판을 막는 참호벽 구실만 한다”고 말했다.

“그룹 전체가 도와줘 성과 낸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개혁 조처로 차입경영 해소, 핵심역량 집중 등은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경영권 세습에 대한 개혁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물론 재벌의 모든 경영권 승계가 무조건 비판받을 대상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로열 패밀리라는 이유만으로 입사에서 승진까지 특혜를 받으며 후계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며 ‘핏줄 세습’을 비판하지만, 체계적인 경영수업을 쌓고 경영 능력을 철저하게 검증받은 후계자한테 경영권이 세습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좋은기업지배연구소 김선웅 소장은 “재벌그룹마다 후계자에 대해 경영수업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기업의 성과는 그룹 전체가 도와줘서 총수 후계자의 몫으로 넘겨주고, 반대로 실패한 사례는 전문경영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식으로 경영 능력을 왜곡할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재계쪽은 “시간이 흐르면 재벌의 경영권 상속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며 “인위적으로 세습경영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는 간단하다. 재벌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막대한 상속·증여세 부담을 지게 되는데, 현금이 없으면 주식으로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재벌 일가의 지분이 줄어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또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주식 수가 늘어 지분이 분산되는 등 주식 분포가 확산돼 오너의 소유지분도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물론 논리적으로 볼 때 재벌 일가가 지분을 천년만년 들고 갈 수 없다는 말은 맞다. ‘대기업 집단 소유지분 구조’를 보면 국내 재벌의 총수 개인 지분(평균 1.95%)과 직계·친인척의 지분을 합친 총수 일가 전체 지분은 4.61%인데, 상속·증여 세율은 최고 50%다. 따라서 세금을 제대로 물리면 다음 세대의 경영으로 넘어갈 때 후계자의 지분은 2.3%로 줄어들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경영권이 몇대 내려가다 보면 오너의 소유지분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조세연구원 관계자는 “상속·증여세 최고세율 50%하에서 세금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해 긴 시간으로 볼 경우 경영권을 계속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미국에서도 1930, 40년대 대기업의 경영권 상속을 막기 위해 상속·증여 세율을 높이는 조처가 이뤄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계열사 분리해 여러 자녀에게 경영권을

이런 논리는 창업주에서 2세로 경영권이 넘어갈 때도 이미 등장했다. 세습경영에 대한 비판이 일자 당시 재벌총수들은 “세대가 교체되면서 4대도 못 가 경영권 대물림은 해소될 것”이라고 반박했었다. 과연 재벌기업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가족재벌은 해체되는 것일까? 선진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뚜렷해 가족경영 기업 중 100년 이상 된 장수 기업은 드물다. 그러나 재벌 오너들 사이에 교묘하게 불법·편법적 상속·증여세 회피를 안 하면 오히려 바보인 것처럼 생각하는 한국에서 상속·증여세를 통한 소유 분산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재계는 요즘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를 위해 차등의결권주(1주1표가 아니라 1주10표, 100표 등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주식)를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보유 지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의결권을 확보하는 소유·통제 괴리가 더 커질 수 있다. 주식 분포가 넓어져도 재벌 일가가 경영권을 여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재벌들은 기업 역사가 길어질수록 그룹 장악력이 떨어지기는커녕 기업 덩치가 커지면서 계열사를 분리해 여러 자녀들한테 소유권과 경영권을 물려주고 있다. 계열 분리를 통해 전문경영인 체제가 들어서기보다는 총수 가족들간의 중소 재벌로 세포분열을 하면서 혈족 지배가 오히려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5대에 걸쳐 가문 경영이 이뤄지는 스웨덴의 거대 재벌 발렌베리의 경우 경영은 전문경영자한테 맡기고 가족경영자는 지배주주로서 감시·통제 기능에만 주력하고 있다. ‘군림하되 직접 통치하지 않는’ 소유·경영의 분리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재벌 가운데 이런 자제력을 보여주는 기업은 매우 드물다. 대구대 홍덕률 교수는 “전문경영인보다 더 나은 능력과 애정을 갖고 있는 재벌 후계자가 없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대부분의 기업에서 여전히 자식, 손자 대대로 경영권을 물려받는 세습이 지속되고 있다”며 “몇 세대 지나면 자연스럽게 경영권 세습이 약화될 것이라는 주장은 논리가 빈약하다”고 말했다.

경영권 세습을 둘러싼 또 다른 논란은 ‘시장’에서 재벌 후계자에 대한 검증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느냐 여부다. 이른바 ‘시장통제론’인데, 재계에서는 경영 능력이 떨어지는 3세는 경영권을 아예 물려받을 수 없는 장치가 시장에 마련돼 있고 또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동우 과장(기업정책팀)은 “시장에서 재벌 총수 3세에 대해 ‘경영 능력이 없다더라’ 하는 루머가 돌면 주주들이 주식을 내다팔면서 주가가 하락함에 따라 제3자의 주식매집으로 적대적 M&A 위협을 받게 된다”며 “경영 능력이 없는 후계자에 대한 교체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주식시장의 감시가 있기 때문에 이해당사자들의 동의도 못 받고 경영 능력도 입증받지 못한 후계자한테 제멋대로 경영권을 물려줄 수 없다는 얘기다. 현대자동차 관계자도 “3세의 독단적 경영은 중소 규모 기업에서나 가능하지, 재벌의 경우 회장이 혼자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거대한 기업집단 시스템에서 주주와 노동조합 등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와 견제가 있기 때문에 회장이 전횡을 행사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오히려 전문경영인들이 회삿돈을 사적으로 쓰는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주가가 떨어져도 승계작업 할 것”

그러나 이런 시장통제론에 대해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선웅 소장은 “시장이 경영권 승계를 부정적으로 봐서 주가가 떨어진다 해도 재벌총수로서는 미실현 주식평가액만 변동하는 것일 뿐”이라며 “경영권 상속을 밀어붙이는 게 더 이익이 크다고 판단해 주가에 개의치 않고 승계작업에 나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재벌총수가 상호 순환출자로 강고한 지배권을 장악한 한국에서는 주식시장을 통한 경영권 교체도 한계를 안고 있다.

물론 실력이 있든 없든 핏줄한테 지분은 물론 경영권까지 물려주는 재벌총수들도 시장이라는 외부적 감시 체제를 신경쓰고 있기는 하다. 또 재벌 오너의 황제식 경영이 당연시되던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져서 시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후계자를 정했더라도 경영권을 물려주기까지는 여러 장애물들을 넘어야 한다. 재벌들이 경영권 이양 작업을 ‘지분이전’과 ‘경영수업’ 두 갈래로 나눠서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패의 길, 2세 컴플렉스

무리한 외형 위주의 사업확장을 추구하다 무너지고 만 2세 경영인들 재벌그룹의 3세 경영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가운데 창업자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은 2세 경영인들은 경영 능력에 대해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진로·동아건설·해태·쌍용·삼미 등 쓰러진 재벌기업 대부분은 가족기업의 실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젊은 황태자 그룹’으로 불리던 실패한 2세들은 과감한 투자와 외형 위주의 사업확장을 추구하다 무너지고 말았다. 재벌 2세들은 경영 자질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 젊은 나이에 경영권을 쥔 뒤 계열사를 늘려가다 좌초하고 만 것이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선웅 소장은 “아버지한테서 주식을 공짜로 물려받고 특별한 기여 없이 핏줄이란 이유만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 경영권을 떠맡은 재벌 2세들의 경우 기업총수로서 정당성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를 떨쳐버리기 위해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충동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망한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창업주의 후광을 입고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자신만의 사업을 일으켜 능력을 과시하려다가 ‘실패한 경영인’으로 남고 말았다는 얘기다.
역시 2세 경영자인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반도체 등 과감한 투자에 성공해 그룹의 성장을 지속시키는 등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자식과 마누라를 빼고 모두 바꿔라”는 이 회장의 신경영은 기업경영의 모델로 인정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쌍용 2세인 김석원 회장이 자동차사업에 진출했다가 그룹 해체를 겪었듯, 자동차 취미를 가진 이 회장도 자신의 잘못된 독단으로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반도체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자동차사업에 쏟아부어 삼성전자의 경쟁력도 약화시켰다. ‘물려받은 황태자’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삼성그룹 오너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고 자동차사업에 진출했는데, 이런 2세 콤플렉스와 오너의 취미가 한 차례 경영실패를 낳은 것이다. 조영철 국회 산업예산분석팀장은 “이건희 회장을 뛰어난 경영자로 평가한다 해도 성과가 좋은 이런 몇몇 예외가 있다고 해서 ‘재벌 세습경영이 기업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전반적 경향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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