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노 대통령 ‘대국민 설득’ 혼선… “내가 해결하겠다” 며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 </font>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참여정부 출범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소장 김헌태)가 여론조사전문기관 TNS에 의뢰해 전국의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11월9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잘하고 있다’ 22.4%, ‘잘못하고 있다’ 71.0%로 나타났다. 이는 KSOI-TNS의 3주 전 조사(10월19일)와 비교할 때 부정적 평가가 6.6%포인트나 급증한 것이며, 참여정부 출범 이래 최저 수치이기도 하다.
서민들의 아우성, 달랠 수 있을까
경제와 민생 문제가 지지도 저하의 으뜸 원인이라는 점에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한다. 중소기업, 비정규직, 저소득층에다 음식점 경영 자영업자들마저 “더 이상 장사를 못해먹겠다”며 ‘솥단지 시위’에 나서는 마당에 대통령의 지지도가 유지될 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과연 대통령은 민생의 어려움을 알기나 아는 거냐?” “대통령은 경제의 실상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라는 아우성도 쏟아져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 문제에 관한 대통령의 리더십에 일대 의구심이 일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대선을 치를 당시 ‘서민 후보’를 표방해 중산층과 서민 일각에서 열광적 지지를 얻었던 데 비하면, 이런 상황은 기이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이 경제와 민심의 실상을 모를 리 있겠느냐? 여러 사람들을 자주 만날 뿐 아니라 숱한 언론 보도를 접하는데…”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와 민생, 특히 경제 양극화 문제가 요즘 대통령의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라고 전했다.
노 대통령 자신도 11월5일 문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경제 양극화에 관한 인식을 근래 드물게 상세히 밝혔다. “지금 경제가 안 돌아가는 것이 문제지 전체적으로 우리 경제가 건강은 좋다. 튼튼하다, 그러니까 좋아질 겁니다. 이제 남은 일은 결국은 격차, 흔히 양극화라고 얘기하는 이 차이를 어떻게 줄여주느냐… 여러분 해보시듯이 배 아프면 이게 병원에 가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또 응급실에 가도 기다려야 되고 주사 맞는다고 벌떡 일어납니까? 그런 것 아니고 하니까 어떻든 열심히 할게요. 저를 믿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하십시다.”
노 대통령은 또 11월13일 로스앤젤레스 동포간담회에서도 “우리 경제의 고민은 양극화 문제”라며 “양극화가 일어나면 사회 곳곳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그 투쟁으로 인해 경제 메커니즘이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양극화 문제와 관련해 기존 경제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도록 최근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에게 지시한 것도 이런 인식의 산물로 해석된다. 대통령이 한편으로는 악화한 민심 다잡기에 공개적으로 나서고, 다른 한편 내부적으로는 정책 기조를 수정하려는 ‘큰 변화’가 엿보인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른 정책 기조의 실제 수정 여부, 실효성 따위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최소한 여기에 오기까지에도 노 대통령은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온 것 같다. 또 그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듯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확고한 경제 리더십을 세우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1930년대 미국 공황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제 지도자’로서 국민의 구심점 노릇을 한 데 비해, 노 대통령의 대국민 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고칠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대국민 커뮤니케이션 혼선
되돌아보면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2003년 2월13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잇달아 방문해 “언론 논조나 (발행) 부수 등 여론의 장을 지배하는 사회적 힘의 균형에서 경제계와 경제성장의 목소리가 더 세다”며 “5년간 사회적 불균형이나 가치 주장자간 힘의 불균형을 시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에 대해 대화와 타협, 양보 필요성도 함께 강조했지만 어쨌든 노동계를 사회적 약자로 보고 ‘가능하면 키워주겠다’는 뜻으로 읽힐 대목이었다.
그러다가 취임 뒤 화물연대와 철도 파업 등이 발생하자 노 대통령의 메시지는 ‘엄격한 법집행’으로 옮아갔다. 또 민주노총 지도부를 겨냥해 ‘대공장 노동운동의 이기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노-정간 갈등이 깊어졌다. 노 대통령의 메시지 이동은 당시의 파업에 실제 불법 요소가 섞인 점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경위와 관계없이 참여정부 첫해 노 대통령은 노사 양쪽에서 “도대체 어느 편이냐?”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다.
노 대통령은 2003년 8·15 경축사를 통해 국정과제로 ‘2만달러 시대를 열어가자’고 선언했다. 새 정부의 국정목표로 애초 ‘동북아 경제중심 전략을 통한 번영’ 개념을 만지작거리다가 구체화가 잘되지 않자, 2만달러 개념을 새로 채택한 것이다. ‘2만달러 시대론’은 애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제창한 것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세련화했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대기업 중심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담길 수밖에 없었다.
경제부처들은 ‘2만달러 시대 달성 후속대책’을 마련하느라 한동안 부산을 떨었다.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가 총괄 작업을 맡아 같은 해 10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360쪽짜리 두툼한 정책보고서도 제출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경제부처의 한 중견 공무원은 “요즘은 장관 연설문을 작성할 때 간혹 2만달러 시대라는 용어를 활용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연설에서 그 용어를 쓰는 빈도도 확 줄었다. 국민들 사이에 당장 죽겠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오는 마당에 ‘2만달러’라는 꿈을 거론하기 어려운 탓이다.
노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대국민 커뮤니케이션에 혼선이 생긴 데는 여러 상황적 악조건이 있는 것 같다. 첫째로, 청와대의 항변처럼 언론환경이 극도로 나쁜 것은 분명하다. 정부 정책이 조금이라도 사회통합 또는 사회적 약자 배려쪽으로 기울 기미만 보여도 보수 성향 신문들이 “그러니까 좌파 정부”라며 맹공격을 해댔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비전을 제시하면서 국민을 설득하기 이전에, 보수 정치·사회 세력과의 말싸움에 정력을 소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시행착오 인정하기 싫어해
두 번째로는 정부는 물론이며 민간 연구기관 누구도 경기침체 장기화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국내 대부분의 경제연구소들은 “지금은 어렵지만 2004년 상반기에 들어서면 경기가 나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노 대통령이 “일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인위적 부양책을 쓰기보다는 구조와 성장동력을 탄탄히 하는 쪽으로”라고 기조를 잡은 데는 이런 예측도 한몫한 것 같다. 그러나 낙관적 예측은 대부분 빗나갔으며, 요즘 국내 경제연구소들은 모두 앞으로의 경기 전망 자체를 꺼리고 있다.
그러나 상황 요인 외에 노 대통령 자신의 문제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노 대통령의 설득 논리를 뜯어보면 ‘자신을 스스로 시험대에 올려놓는 리더십’의 위험성이 발견된다. 이를테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구제금융 위기 속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며 “국민들이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1998년의 금모으기 국민운동이 대표적 예이다. 반면에 노 대통령은 “어떻든 열심히 할 게요. 저를 믿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하십시다”(문화방송 ), “경제 걱정은 말라. 내가 책임지겠다”(11월13일 로스앤젤레스 동포간담회)라고 말한 것처럼, 대체로 ‘내가 해결할 터이니 지켜봐 달라’는 이야기를 주로 해왔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실상을 설명하면서 국민들이 제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 잘할 터이니 기다려달라’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끌어안는 모양”이라며 “이 경우 국민들은 ‘그래 잘하는지 보자’라고 하다가 결국은 인색하게 성적을 매기기 일쑤”라고 지적한다. 명연설로 꼽히는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도 “미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기대하지 말고 당신이 미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달라”는 호소가 기조를 이뤘다.
두 번째로, 노 대통령은 경제정책에 관한 한 의아할 정도로 시행착오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정치 현안이나 측근 비리가 불거졌을 때 툭 터놓고 솔직하게 나가는 것과도 영 딴판이다.
이를테면 노 대통령은 취임 이래 “인위적 경기부양책은 쓰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선 “꼭 필요한 경기조절 수단도 안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경기조절 수단은 재정경제부가 추진 중인 ‘한국형 뉴딜’, 즉 건설업 활성화 방안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한국형 뉴딜’은 누가 봐도 인위적 경기부양책이 분명하고, 또 필요할 경우 경기부양책을 쓰는 게 잘못도 아니다. 따라서 경기부양책을 쓸 만한 상황과 필요성을 정면으로 주장하며 국민의 이해를 구할 법도 한데, 그는 말을 빙빙 돌리며 궁색한 방어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사회적 대타협, 이룰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스타일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 루스벨트는 새로운 실험적 정책을 많이 시도한 탓에 실수할 여지도 많았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재정지출을 줄여 균형예산을 이루겠다고 약속했지만 취임 뒤 약속이 어그러져 공격을 받게 됐다. 그러자 그는 “정부도 실수할 수 있고 대통령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3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얼음 같은 무관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부보다는 따뜻한 자비심으로 가끔 잘못하는 정부가 낫습니다”라는 인간미 담긴 연설로 정면돌파했다
노 대통령이 양극화 문제와 관련해 경제정책 기조를 재검토하도록 한 것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라는 대선후보 시절의 ‘초심’으로 되돌아가는 의미도 담긴 것 같다. 중산층과 서민의 지지로 대통령이 탄생했는데도 왜 서민층의 어려움은 더한가라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측면도 엿보인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완강한 시장논리, 약육강식의 법칙 때문에 정부가 기존 정책을 재검토하더라도 상황을 획기적으로 반전시킬 실제 정책수단은 적을 것이라고 한다. 대신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조, 소비자 등 각 경제주체들이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는 방안을 일부 전문가들은 유력한 대안으로 꼽고 있다.(박태주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등) 이를테면 대통령이 경제·사회지도자 회의를 열어 좀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한 걸음씩 양보하도록 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국가 지도자가 대단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대통령이 선두에 나서 여론을 일으키며, 각 경제주체들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기존 경제정책을 재검토하는 것과 함께, 내년 초부터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루스벨트는 이런 일을 잘해 “관객인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20세기 최고의 배우”(미국 정치학자 게리 윌스)라는 평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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