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죽지 않은 ‘국가 균형발전’의 화두… 각 당마다 머리 싸매고 행정수도 해법 고심</font>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신행정수도 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수도 이전을 둘러싼 법적 논란의 큰 축은 일단 정리된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10월25일 이해찬 국무총리가 대신 읽은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헌법재판소 결론의 법적 효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법리적으로 판정패당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고민과 논쟁은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여야 모두 헌재 판결로 사산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대체할 만한 대안 논쟁을 화두로 정국 주도권과 충청권 민심 잡기 경쟁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자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일단 헌재 판결의 법적 효력만 인정하겠다는 태도다. 국가 균형발전 전략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만큼 지속적인 논쟁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청와대 한 핵심 인사는 “행정수도 이전 계획 차질에 따른 충청권의 좌절과 국가정책의 안정성에 대한 국민 불신을 해소하는 조치는 필요하다”면서도 “한나라당과 헌법재판소를 중심으로 한 낡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굴복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당분간 국가 균형발전 전략의 중단 없는 지속 원칙과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여론의 변화 추이를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대책을 확정하는 데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권의 이런 태도는 헌법기관의 판결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대의 명분을 근거로 장기적인 논쟁을 벌일 경우 정치적으로 크게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단 ‘관습 헌법’에 근거한 헌재의 위헌 결정에 대한 비판 및 반성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충청권의 격앙된 민심이 헌재와 한나라당에 집중되고 있는 만큼 섣부른 대책을 내놓아 정치적 논란을 자초할 이유도 없다.
실제 헌재 판결 직후 열린우리당에서는 헌법재판관에 대한 탄핵추진론과 헌재 결정 승복론이 마구 터져나오는 등 혼란스런 상황이 지속됐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핵심 인사들은 10월23일께 현실적 무리가 따르는 대응책을 제시해 여론을 자극하기보다는 지역 균형발전 의지와 원칙을 강조하면서 상황이 호전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청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열린우리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헌재 판결에 승복할 경우 국가 균형발전 전략 자체가 좌절돼 참여정부의 국정수행 기반이 붕괴되고, 헌재 결정에 불복하거나 재판관에 대한 탄핵을 추진할 경우 여권 스스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을 뒤집어쓸 수 있다”면서 “정면돌파 원칙은 지켜나가되, 구체적 방안은 여론의 향배를 보며 장기적으로 결정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25일 청와대의 이런 ‘지공전략’에 따라 별도의 대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헌재 결정에 따라 활동이 중단된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의 기능을 대신할 ‘당정청 특별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 협의체를 통해 △청와대와 국회, 대법원 등 헌법기관을 제외한 행정부처와 산하 공공기관을 모두 옮기는 ‘행정특별시’ 건설 △과천과 같은 중소규모의 ‘행정타운’ 건설 △기업도시 유치 등 다양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지도부 역시 당장 결론이 날 문제는 아니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25일 상임중앙위원회에서 “11월2일까지 대정부 질의를 통해 헌재의 위헌 결정에 따른 후속대책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밝혔을 뿐, 결정 시기를 못박지는 않았다.
한나라당, 백화점식 대책은 많은데…
청와대의 다른 한 핵심 관계자는 향후 대응과 관련해 “충청권의 민심 이반 현상이 거세질 경우 한나라당이 청와대를 제외한 국회까지 충청권으로 옮기자고 애걸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며 “최대한 논쟁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헌재 판결에 환호했던 한나라당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해온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일시적으로 좌절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수도권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혜택을 독식하는 구도를 방치하고 과연 한국의 미래가 있느냐”는 근본적 의문에 대해 구체적 답변을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여권이 행정수도 이전 좌절의 책임을 한나라당에 떠넘기면서 충청권의 민심 이반을 자극할 가능성을 경계하며, 대안을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박근혜 대표와 가까운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추진해온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네커티브 전술로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 전략을 구체적 정책 대안으로 제시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고 말했다.
정치공학적 측면의 손익계산을 고려하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충청권의 상실감을 적절히 보상하지 못할 경우 2006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또다시 한나라당이 외면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표 등 한나라당 핵심 인사들은 일단 노무현 대통령의 성급한 행정수도 이전 추진이 문제의 핵심이라며 ‘여당 원죄론’을 제기하고 있다. “여권이 헌재 결정에 승복하지 않으면 나라가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헌재 결정에 대한 승복도 거듭 요구했다. 하지만 정책위원회에서는 충청권의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대책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10월24일 과학기술부를 포함해 과학 관련 부처와 산하기관을 충청권으로 이전해 ‘과학기술 행정도시’로 육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나라당은 또 △대덕밸리를 ‘연구개발 특구’로 지정하고 △아산·천안은 ‘기업도시와 대학도시’ △오송·오창·청주는 ‘생명공학도시’ △아산·당진·장항은 ‘물류기지’로 발전시키겠다고도 밝혔다. 충청권 경제활력 회복을 위해 첨단자유기업도시를 건설하고, 청주국제공항을 활성화하는 대책도 제시했다. 그러나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이런 대책의 실효성 논란과 함께 더욱 근본적인 처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특별행정시’ 방안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인 박형준 의원은 “광역 단위별로 특성화해 지방 분권을 이룬다는 게 한나라당의 핵심 전략”이라며 “당에 설치될 충청권 발전대책 테스크포스 등의 논의를 거쳐 오는 12월께 더 근본적인 대안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도 혼란스런 모습이다.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왔다. 2002년 대선 때는 파주에 통일수도를 건설하는 대안을 제시했고, 지난 총선 때는 친환경적이고 지역통합적인 형태의 수도 이전은 찬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난 8월 현 정부의 이벤트성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한다는 당론을 최종 확정했다. 하지만 이 결정에 대해 일부 의원들은 “2007년 대선까지 지속될 주제에 대해 성급히 당론을 정해 퇴로를 봉쇄하는 것은 문제”라며 반론을 제기하는 등 내부 갈등을 겪어왔다.
민주노동당은 반대 당론 결정 이후에도 수도권 과밀과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과제를 외면할 수 없다며 당 안팎의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충남 중산 지역에 행정기관을 대규모로 이전하는 ‘특별행정시’ 방안을 대안으로 마련했다. 주대환 정책위의장은 “행정수도 이전 논쟁이 국회 안에서 정리될 것으로 예상하고, 대전 중산 일대에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주요기관들이 옮겨가는 특별행정시를 대안으로 모색했었다”면서 “헌재 판결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균형발전은 포기할 수 없는 만큼 이 방안을 계속 밀고 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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