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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제야 철들었구먼”

등록 2004-09-16 00:00 수정 2020-05-03 04:23

‘원로인사’들의 불안감 씻어줄 만한 박근혜 행보… 극우적 영남 중진들 당내 주류로 부상하나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4·15 총선거 결과의 충격적 특징은 소위 진보의 가면을 쓴 친북·좌경·반미 세력의 대대적인 국회 진출이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과거 유산의 덫에 걸려 4·15 총선거에서 원내 제1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도 당내 좌경 세력과의 갈등으로 정체성이 모호해졌다는 사실이다.”

쏟아지는 강성, 강성 발언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은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지난 4·15 이후 새로운 한나라당으로 변화하려는 몸부림이 이들에게는 몹시 불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수구보수 세력의 정치적 대변자로 남길 원했던 한나라당이 전향적인 대북 정책 등을 언급하고 나서는가 하면 국가보안법 개정에 찬성하는 의원이 90%를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연장선 위에서 보면 국가 정체성을 놓고 전면전을 벌이고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는 데 모든 것을 걸겠다는 박근혜 대표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 ‘이제야 한나라당이 제대로 가는구나’ 하고 맘을 놓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우선 정체성 얘기가 나온 만큼 지난 4·15 총선 전후로 변화를 외쳐온 한나라당이 무엇을 바꾸려 했고 얼마만큼 바뀌었는지 복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총선 전후 한나라당의 화두는 부정부패와의 단절과 냉전수구 이미지 탈피였다. 지난 3월 탄핵 정국에서 ‘창당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던 한나라호의 임시선장으로 박근혜 대표를 선출했다. 2002년 대선 전후로 핵심 지도부에서 비켜서 있던 박 대표는 두 과제를 이룰 적임자로 평가받은 것이다. 그가 ‘차떼기’로 상징되는 부정부패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다 국가보안법 개정을 줄곧 주장해왔고,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등의 행보가 두 가지의 과제를 이룰 적임자로 평가받게 했다.

두 화두 가운데 전자는 성공한 듯하다. 대표 취임 이후 번듯한 당사를 버리고 천막 당사에서 총선을 이끌면서 대선자금 비리는 이전 지도부의 몫으로 넘겨졌다. 후자 역시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총선 직후 한나라당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취지로 연 당선자 연찬회에서 그들은 재창당 수준의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며 ‘따뜻한 대북 정책’을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했다.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찍힌 이유는 여전히 반공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반공보수가 국시였으나, 반공이 국가 안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시대는 지났다”(박진 의원)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박 대표 자신도 총선 직전 외신기자클럽 초청 회견에서 “남북 문제에서는 초당적으로 참여할 의사가 있다”며 당시에 불거졌던 대북특사설에 적극적인 기대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개정 내용 대폭 후퇴

그랬던 한나라당이, 아니 좀더 분명히 얘기하자면 박 대표가 7월 전당대회에서 다시 대표로 선출된 이후 안보 분야와 관련해 강성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절제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당시까지 상생과 화합을 강조해온 박 대표는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민주화 운동 인정 △북한 경비정의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을 둘러싼 청와대의 태도 △열린우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등 일련의 사안에 대해 “대한민국 정통성을 훼손하고 나라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규정하면서 ‘전면전’을 언급했다. 여기에 과거사 진상 규명과 국가보안법 논란이 더해지면서 “대표직 등 모든 것을 걸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겠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국가보안법 개정과 폐지의 핵심 쟁점이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이고 한나라당이 냉전 시대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한 만큼,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의 논리가 달라질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보안법 폐지는 곧 친북 활동 합법화를 의미하고 대낮에 광화문에서 인공기를 흔들고 북한을 찬양해도 처벌할 수 없다는 과거 냉전 시대의 반대 논리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혁명적인 변화’를 천명한 지 5개월 만에 ‘도로 한나라당’이라는 비판이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소장개혁파의 리더 격인 원희룡 최고위원은 최근 한나라당의 움직임과 관련해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논쟁을 제기한 이후 새로운 한나라당으로 변화해야 한다며 쌓아왔던 성과를 많이 잃어버렸다”며 “외연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핵심지지층을 향해 축소 지향, 강성 지향으로만 가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자신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경력이 있는 고진화 의원도 “전향적 남북 관계를 천명해놓고 단 한번도 이를 실천한 적이 없다. 과거 냉전의 잣대로 사고하면서 진정으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지 의문이 든다. 한나라당의 사고 변화의 정도는 시대의 변화를 못 따라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법을 한나라당과 대한민국의 존립 기반으로 받들고 있는 박근혜 대표의 태도가 과거의 언행과 비춰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음미해볼 대목이다.

박 대표의 보안법에 대한 입장이 변화 조짐을 보인 시기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였다. 박 대표는 2001년 1월 와의 인터뷰에서 “근본적으로 폐지는 반대한다. 하지만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는 등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에 문제 있는 부분은 수정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조항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보안법에 대한 입장 변화가 남북 관계의 변화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정치권 안팎에서는 북한을 ‘정부를 참칭(제멋대로 스스로 일컬음)’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2조의 개정 필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2조 반국가단체 조항을 유지한 채 6조(잠입·탈출), 7조(찬양·고무), 8조(회합·통신) 조항의 일부 문구를 고친 한나라당의 보안법 개정안(9월10일 주요당직자회의 확정)은 ‘폐지 반대, 개정 가능’이라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되, 개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최근 보안법 논란 과정을 거치면서 대폭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나라당 내의 세력 관계에 미묘한 변화 조짐이 일고 있다. 박근혜 대표 체제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던 소장개혁파가 박 대표와 거리를 두려는 반면, 총선 이후 비주류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극우 성향의 영남 중진들은 목소리를 키우며 주류로 편입되고 있다.

이 산이 아닌가벼, 나폴레옹이 아닌가벼

소장개혁파의 한 핵심 의원은 “수요모임 내부에서 전략적 협조 관계에 회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모임 내에 박 대표에 관해서는 온도차가 있었다. 나처럼 필요에 의한 결합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박 대표를 궁극적인 대안으로 여기는 의원들도 있다. 그런데 후자쪽 의원들이 (박 대표가) ‘나폴레옹이 아닌가 보다’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박 대표와의 관계가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동지적 결합은 아니지 않나.” 경우에 따라서는 박근혜 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소장개혁파의 지지 철회 시점이 빨라질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소장개혁파의 모임인 수요모임쪽이 앞으로의 관계 설정을 두고 고민에 들어간 정도인 반면, 최근 연찬회에서 박 대표와 날선 공방을 주고받은 국가발전전략연구회의 김문수·이재오 의원 등은 한나라당의 정체성과 관련해 본격적인 노선 투쟁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나섰다.

이 의원은 보안법 논쟁이 본격화되기 전인 9월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A4지 10여장 분량의 글에서, 한나라당 내에 수구보수적 흐름(위헌세력)과 민주개혁적 흐름(합헌세력)이 있는데 민주개혁 세력이 중심이 될 때 당을 바꿀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의원의 주장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신한국당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합친 것이고, 그 뒤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친 한나라당은 유신은 물론 5·6공 세력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국민들은 독재 시절 막걸리 반공법 등 과잉 인권 탄압 수사로 오히려 신원(伸寃)을 해줘야 할 판에 친북용공으로 공격하겠다는 수구적 냉전 논리에 놀라고 있다. 반헌법적인 5·16 쿠데타, 10월 유신, 5·17 쿠데타를 엄호하며 3·5공을 당의 뿌리로 간주하는 데 놀라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반해 그동안 몸을 한껏 낮춰왔던 영남 중진들은 국가보안법 정국을 디딤돌로 삼아 당내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정형근 의원이 중앙위 의장과 당연직 상임운영위원에 출마해 지도부 진입을 노리고 있고, 주요 당직에서 소외됐다는 불만을 피력해온 극우 성향의 영남 중진들은 새로 만들어진 ‘국가수호비상대책위’(위원장 이규택 의원)를 무대로 본격적인 활동을 예고하고 있다.

단기간 내에 쉽게 끝나지 않을 국가보안법 정국은 결국 한나라당에 득이 될까 독이 될까.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열린우리당이 어차피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한다. 폐지되지 않을 경우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데미지를 입게 될 테고, 폐지될 경우엔 보수세력 결집과 폐지에 반대했던 여론이 한나라당쪽으로 쏠려 우리에게 나쁠 것이 없다”라고 전망했다.

보안법 정국, 득이 될까 독이 될까

그러나 김형준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2002년 대선과 탄핵, 그리고 총선이라는 큰 싸움에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착시현상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테제는 ‘한국 사회는 변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국민들의 70~80%는 여기에 동의한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과격하거나 투박해 반대 여론이 높은 것을 한나라당은 번번이 테제를 부정하다 보니 거기에 동의하는 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작은 전투에 이길지라도 테제를 부정하다 보면 결국 차기 정권 창출이라는 큰 목표에서는 계속 멀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분석했다. 국가보안법도 여기에 해당하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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