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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재규에게 빚을 졌다”

등록 2004-08-11 00:00 수정 2020-05-02 04:23

구명운동으로 시작해 줄기차게 이어진 재평가 작업… 경기도 광주에 추모비도 건립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은 지난 2001년 민주화운동보상심의 신청을 계기로 물꼬를 텄지만, 그 기원은 198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10·26’ 직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중심이 된 ‘김재규 구명운동’이 신군부의 탄압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전개되다 김 전 부장의 사형이 집행된 뒤 재평가 작업으로 이어졌다.

변호인들, 사제단을 설득하다

사제단은 당시 김 전 부장의 변호인으로 활동하던 이돈명, 강신옥 등 인권변호사들의 요청으로 구명운동에 나서게 됐다. 사제단 활동을 주도했던 함세웅 신부는 “79년 12월 말 김 전 부장에 대한 군사재판이 진행될 때 변론을 맡은 이 변호사 등이 구명운동을 제안했다”며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변호인들의 설명을 듣고 나니 김 전 부장을 꼭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사제단은 김 전 부장이 유신독재 정권의 버팀목 구실을 했던 중앙정보부의 수장이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함 신부를 비롯한 상당수 사제들은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직접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몇몇 사제들은 “어떻게 ‘인권변호사’들이 김재규의 변론을 맡을 수 있는가”라며 오히려 이 변호사 등을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호인들의 설명을 들은 뒤 사제단은 천주교 인사들과 함께 김 전 부장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김 전 부장이 법정에서 10·26의 동기와 목적을 밝힌 진술 내용과 김수환 추기경, 이해학 목사의 증언 등이 사제단을 움직인 것이다. 김 추기경과 이 목사는 김 전 부장이 장준하 선생과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등 민주화 인사들과 ‘물밑 교류’를 해온 사실들을 증언했다.

구명운동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지 주교와 함 신부 등 중앙정보부의 탄압을 받았던 인사들이 앞장섰다. 사제단은 보통, 고등군법회의가 끝난 직후인 1980년 2월5일 대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김 전 부장은 1, 2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서울대교구 오태순 신부와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 등 14개 교구 대표와 사제단은 청원서에서 “후대에 10·26의 의미와 교훈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김 전 부장의 극형만은 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제단의 청원서를 시작으로 사회 각계 인사들의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사제단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구명위원회를 결성한 뒤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서명운동은 ‘뜻밖의’ 호응 속에 진행됐다. 1980년 3월26일 구명위원회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서명운동에는 함석헌·윤보선·김승훈·문익환·박형규·안병무·송건호·고은·백낙청·박현채·박영숙 등 재야인사들이 대거 참여했고, 1천여명의 일반 시민들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구명운동의 반응은 뜨거웠다. 뉴욕 교민단체인 ‘유지회’를 비롯해 해외 교민단체들의 성명서 발표가 이어졌고, 모린 R. 버만 인권국제연맹사무총장 등 국제인권운동가와 학자들도 구명운동에 동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당시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결집체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공동의장 자격으로 대법원에 제출한 청원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구명운동에도 김 전 부장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전원합의체 15명 중 6명이 소수의견 냄)돼 1980년 5월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구명위원회의 활동은 10·26과 김 전 부장 재평가 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민중항쟁의 강제 진압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구명운동에 앞장선 사제단과 재야인사들을 대거 구속시킴으로써 김 전 부장과 10·26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했다.

“재평가는 역사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혹독한 군사정권 아래에서도 김 전 부장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은 명맥을 유지했다. 광주·전남 지역 재야인사들의 모임인 ‘송죽회’가 1989년 2월24일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삼성공원에 김 전 부장 추모비를 건립한 것이다. 추모비는 비문이 훼손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10·26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 전 부장에 대한 재평가 운동은 ‘국민의 정부’출범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YS 정권 때인 1994년 명예회복추진위원회 결성을 시도하다 실패한 사제단과 재야인사들은 2000년 10월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이하 명예회복추진위)를 결성했다. 명예회복추진위는 김 전 부장의 재평가를 위해 2001년 10월26일 김 전 부장의 5촌 인척 명의로 민주화운동보상심의를 신청했다.

김 전 부장에 대한 심의는 DJ 정권 아래서 차일피일 미뤄지다 참여정부 출범 뒤 급물살을 탔다. 명예회복추진위는 지난 6월 신청인 자격 조건이 4촌 이내로 바뀌어 절차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각하되자, 7월12일 부인 김영희씨 명의로 재신청해 심사가 진행중이다. 하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명예회복추진위 집행위원인 함 신부는 “10·26과 김 전 부장에 대한 재평가는 역사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참여정부에서도 정치적인 고려를 하는 것 같다”며 “김 전 부장을 복권시키지 못하면 10·26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때아닌 ‘박정희 신드롬’과 유신독재 논쟁이 불붙고 있는 최근의 상황도 김 전 부장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명예회복추진위의 생각이다. 함 신부는 “10·26은 유신독재 정권의 역사적 죄과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준 거사였다“며 “국민들 모두 김재규 장군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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