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동안 42개의 별 떨어뜨린 YS… DJ는 군 눈치 살피며 복지개선에 아낌없는 투자
▣ 김성걸 기자/ 한겨레 정치부 skkim@hani.co.kr
과거 민간 정권과 군과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 정권 초기에는 ‘숙정’ ‘숙군’이라는 단어들이 돌아다녔으며, 이에 대해 ‘군심’을 앞세운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취임 이전 30여년간의 군부 정권을 막내린 김영삼 대통령의 군부 다루기는 “모두 깜짝 놀랐제?”라는 말로 압축된다. 취임 뒤 보름도 안 돼 김 대통령은 하나회 출신의 군부 실세였던 김진영(육사 17기) 육군 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다. 김 대통령의 이 말에 이경재 당시 공보수석(현 한나라당 의원)은 다음날 1993년 3월8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그분들 어떨떨하겠네요”라고 거들었다. 그러나 이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00일 동안 김 대통령은 대장 7명을 포함해 19명의 장성을 전역 조처했다. 42개의 별을 떨어뜨렸다. 또 수많은 장성들이 보직을 옮기거나, 진급 경쟁에서 탈락됐다.
몇명의 장성들이 반발했지만, 그 정도로는 미약했다. 당시 합참 작전부장이던 이충석 소장(육사 21기)이 회식 자리에서 “이게 군 개혁이야!”라며 물컵을 탁자에 쳤지만 곧바로 보직 해임됐다. 오형근 소장(육사 22기)도 3사관학교 이임사에서 국가정책, 상급제대, 정치권, 언론보도 등에 대해 비판했다가 육군의 조사을 받은 뒤 옷을 벗었다.
역대 군부 정권의 산실로 알려졌던 군 ‘하나회’의 척결은 김영삼 정권에 국민적 지지를 안겨주었다. 정부 지지율이 한때 기록적인 90%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의 군 인사 개입 의혹과 함께 하나회 자리를 새 군부 실세들이 대물림해 장악하자 비난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김종필씨와의 연합으로 어렵게 탄생한 김대중 정권은 소수 정권이라는 한계 때문에 군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오히려 눈치를 살폈다는 평가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조성태 의원(열린우리당)은 “김 대통령은 국방부의 인사안을 변경하거나 사전 지침을 내린 적이 없다”며 “인사는 물론 군 사업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천용택 국방장관 시절 군 개혁안으로 육군 1·3군사령부를 통폐합하고 지상작전사령부를 설치하는 등의 안이 마련됐지만, 군 지휘통제 시스템의 발전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서류함에 던져졌다. 실제로는 군 내부의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노후된 군 간부들의 숙소 개선에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당시 군 간부들은 숙소 크기가 국민주택 규모에 못 미치는 15평형대가 많고, 30년이 지난 노후 건물이 많다는 불평이 많았다. 이에 정상적 국고 지원만으로는 ‘숙소 노후화’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고 하여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전투 대비 태세’ 차원의 특단의 조처로 1조1041억원을 들여 1만4123세대의 관사와 1만8476실의 독신자 숙소를 개선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이런 구애에도 불구하고 군 예비역 장교들의 반응은 차가왔다. 야당 지도자 시절 심지어 ‘빨갱이’로 매도되던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뒤 몸조심을 했지만, 재임 기간중에 추구하던 대북화해 정책인 ‘햇볕 정책’으로 미움을 받았다. 매년 국방백서 발간 시기마다 제기되는 주적 논쟁과, 금강산 관광사업 등 북한 경제 지원에 대한 ‘대북 퍼주기’ 비난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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