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박세일 사단’ 중심으로 ‘선진화’를 향한 당 비전과 이념 정립에 나서다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열린우리당에서는 4·15 총선이 끝난 뒤 당의 정체성 논쟁이 잠깐 벌어졌다. 총선 승리 뒤 당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이냐, 즉 당의 기본 이념을 무엇으로 잡을 것이냐라는 게 논쟁의 주제였다.
그러나 논쟁은 논쟁답게 발전하지 못하고 유야무야됐다. 정동영 당시 의장은 “지금은 진보·보수를 논할 때가 아니다”라며 ‘실용주의’를 주장했지만, 당내 반대세력은 “언론개혁 외면하는 게 실용주의 맞냐”고 반격했다.
당시 보수 성향 언론들은 “지금 웬 이념 논쟁이냐”며 논쟁의 발전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 그 기세에 눌린 탓인지 열린우리당에서는 당의 비전에 관한 체계적인 논의 자체가 실종됐다.
대권 향한 3개년 계획 착수
반면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총선 전 3·23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의 중장기적 발전 비전을 총선 뒤 정식으로 다시 치를 전당대회를 통해 제시하겠다”고 공언했다. 박 대표는 총선 뒤 몇 차례의 의원총회에서도 “2007년 대선까지 한나라당이 가야 할 길을 다음 전당대회를 통해 밝히겠다”며 ‘로드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 대표의 말은 실행에 옮겨졌다. 총선 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박세일 의원과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낸 윤여준 의원이 프로젝트 총괄 책임을 맡았다. 여기에 ‘한나라당 발전 3개년 계획’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나라당이 2007년 대선에서 51%를 득표하자는 목표와 결부시켜, 이 계획을 속칭 ‘5107 프로젝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이 프로젝트는 철저하게 물밑으로 들어간다. 박 대표가 7월19일 전당대회를 통해 대표로 재선임될 것은 거의 확실시되지만, 형식상으로는 그 지위가 과도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발전 3개년 계획’은 현재 ‘박근혜 개인의 대권 프로젝트’ 성격도 불가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프로젝트가 추진될 경우 당내 ‘정적’들의 견제를 받을 여지도 다분하다.
그 뒤 윤여준 의원이 16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정계를 은퇴하는 사정 변화가 생겼다. 이에 따라 ‘3개년 계획’ 팀이 새로 꾸려졌다. 총괄 책임은 박세일 의원이 맡아 박 대표와 교감을 나누고, 실무 작업조로 박형준·박재완·윤건영·원희룡 의원 등이 참여하게 됐다.
이들 가운데 원 의원을 제외한 4명은 17대 총선에서 각계 전문가 그룹 성격으로 영입한 초선 의원들이다. 따라서 부패와 기득권 세력을 옹호한다는 이미지로 얼룩졌던 한나라당의 과거 유산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성향으로는 박세일 의원 중심으로 진작부터 인간관계를 맺었기에 ‘박세일 사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 의원은 한나라당 내 개혁 성향 386 의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부정적 유산 털어버리자
윤건영 의원은 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의 한나라당은 정책을 정책으로 보지 않고 당리당략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았다”고 서슴없이 비판했다. 그는 “지난해 말 신행정수도 특별법을 한나라당이 찬성 당론으로 통과시킬 때만 해도 조목조목 타당성을 따지기보다는 ‘눈앞의 총선에서 우선 충청권의 반발을 막자. 어차피 우리가 다수당이 될 터이니 그때 가서 행정수도가 안 되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판단이 우세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며 어이없어했다. 연세대 교수로 재정학 및 정부개혁 전문가인 그는 “나는 정책을 하러 국회에 들어온 것이지, 정치를 하러 온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이들 ‘뉴한나라당 5인방’은 그 뒤 박세일 의원을 좌장으로 해서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모여 토론을 거듭한다. 이들 외에 외부 전문가 10여명도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외부 전문가들은 개별 주제를 의뢰받아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는 형식으로 가세하고 있다.
박 대표는 이들의 첫 회동 때 참석해 기본 방향을 주문했으며, 6월28일 중간보고서 독회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박 대표는 첫 모임에서 “정당이 국민에게 뭣 하나 도움이 되는 게 있어야지, 지금처럼 부담만 되어갖고 설 자리가 있겠느냐. 근본적으로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작업은 과거 한나라당의 부정적 유산을 털어버리자는 데서 출발한다. 박형준 의원은 에 “한나라당은 YS 시절의 문민개혁 등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긍정적인 역할도 일부 했지만 부정적인 얼룩이 훨씬 많다”며 “그것을 지우고 당을 현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의 유산으로 △기득권 수호 이미지 △특권정당 △영남정당 △젊은 층에 외면당하는 노인정당 등을 꼽았다.
이들의 작업은 다음 단계로 당의 이념적 기초를 새로 정립하는 과제로 옮겨간다. 박재완 의원은 에 “다른 정당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동안 한나라당에 이념이라고 할 게 있었는지조차 의문”이라며 “정치이념보다는 그저 ‘영남 기반이니까’라는 식의 지역주의 요소가 더 강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당의 새 이념 ‘공동체 자유주의’
이에 따라 이들은 최근 마련한 중간 보고서에 당의 최고 비전을 ‘선진화’라는 키워드로 요약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를 거쳐서 이제는 각 사회 시스템을 선진화해야 할 단계로 진입했다는 인식을 토대로, 분야별 선진화 계획을 한나라당의 최우선 과제로 정리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7월2일 박근혜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박 대표는 선진화라는 상위 슬로건 아래 △민생경제 △경쟁력과 교육 △사회복지 △외교안보 등 4개 부문의 선진화 프로그램을 연설을 통해 제시했다. ‘뉴한나라당 5인방’이 당의 신진 실세 그룹으로서 박 대표의 연설문 작성 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동시에, 이들의 프로젝트가 탁상공론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들은 선진화라는 상위 슬로건 아래에 ‘공동체 자유주의’를 당의 새 이념으로 배치했다. 이들은 국가 개입을 확대해 사회적 형평을 달성하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모델보다는, 정부의 몸집을 되도록 줄인다는 미국의 공화당 정부 모델을 대체로 바람직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유주의 개념은 이런 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자유주의’ 앞에 ‘공동체’를 붙인 것도 흥미롭다. 박재완 의원은 “시장과 민간의 역할 확대를 강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특권·기득권층 정당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는 과거 한나라당에 대한 반성이 강하게 작용한 듯하다.
1년 변신, 2년 지식 강화, 3년 수권 능력
이들이 ‘로드맵’의 서두에 이념을 강조한 것은 다음 대선을 위해서라도 사상전(思想戰)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세일 의원은 지난 4월29일 한나라당 당선자 연찬회에서 “정치 투쟁에선 사상전이 중요하다. 우리 당의 이념적 정체성을 확실히 한 다음에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온갖 잘못된 사상 내지 생각들과의 싸움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는 2002년 대선 실패 원인을 노무현 후보 진영과의 사상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으로 보는 인식이 담겨있다. 실제로 노 후보 진영은 당시 ‘새로운 정치세력 대 낡은 정치세력의 대결’ 구도를 짜면서, ‘당당한 대한민국’으로 표현되는 자주외교 노선,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로 요약되는 경제정책 패러다임의 변화 등을 선보인 바 있다.
이들의 작업 결과는 세부적으로 △원내정당화 △정책정당화 △디지털정당화 등으로 이어진다. 이 가운데 예를 들어 원내정당화 대목에선 중앙당을 미국 민주당의 전국위원회 모델로 개편하되, 사무총장을 원외 인사가 맡도록 하자는 제안 등이 눈길을 끈다.
박재완 의원은 “과거 중진실세 현역 의원이 당 사무총장을 맡은 이유는 사무총장이 자금과 조직, 공천 업무 등을 장악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이제 중앙당은 선거 캠페인과 당원 관리 등에 주력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유능한 원외 인사가 이를 관장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역 의원은 원내에서 정책을 입법으로 연결하는 데 주력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이들은 7월19일 전당대회를 통해 당명도 바꾸도록 제안하고 있다. 개정 방향은 ‘선진화’라는 상위 슬로건을 반영하자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대안으로의 당명까지 보고서에 넣진 않았는데, 당 안팎에서 선진한국당 등이 거명되는 게 이런 맥락이다.
정책정당화 차원에선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를 확대 강화한다는 게 뼈대이다. 이들은 여의도연구소를 당 정책위원회에서 독립시키며, 외부 지식사회와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마침 박세일 의원은 여의도연구소장에, 박형준 박재완 의원은 부소장에 내정된 상태다.
이들이 마련한 최종 보고서 초안은 ‘당의 변신’ 1년차의 목표로 ‘비전 정립’을 내세우고 있다. 당의 이념과 정체성을 세우되, 그것을 의원 연찬회와 전국의 당원 순회교육 등을 통해 당내에 확산시킨다는 계획이다. 당명 변경도 1년차 계획에 포함된다.
2년차 목표는 ‘당의 지식기반 강화’에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 여의도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외부 학계·시민사회 등과 정책 네트워킹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박재완 의원은 “야당의 정책 입안 과정에도 관련 학계와 시민사회를 두루 참여시켜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한 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당대회 전후로 공개되면…
3년차 목표는 ‘수권 능력’을 완성하고 집권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으로 잡고 있다. 박재완 의원은 “집권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책을 통해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다가 그 결과로 다행스럽게 집권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이들이 마련한 로드맵은 7월19일 전당대회를 전후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비록 박 대표가 직접 챙기는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당내 공감대를 충분히 얻었다고 보긴 어렵다. 한나라당 내의 복잡한 역학관계로 볼 때 이들의 로드맵이 새로운 당내 분란의 씨앗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이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현대정당다운 첫 정체성 확립 작업이라는 의의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 같다. 반대쪽에선 평민당→신민당→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의 흐름 속에서 수차례 비슷한 작업이 이어지다가 열린우리당에 이르러 중단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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