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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분배를 다 잡아라”

등록 2004-05-20 00:00 수정 2020-05-03 04:23

[표지이야기 | 노무현 집권 2기]

노무현의 경제 브레인그룹… 개혁 인사들이 주도권 장악하고 ‘2만달러 시대론’자들 퇴진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너무 조급해서는 안 된다. 급한 나머지 원칙을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이미 세운 계획에 따라 착실하게 우리의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 있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도록 기초체력을 다지겠다.”

탄핵 위기를 넘어 64일 만에 업무에 복귀해 ‘집권 2기’를 위한 체제 정비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은 15일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국민적 관심사인 민생·경제 분야에 국가적 에너지를 결집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보수언론의 공세에 ‘노’라고 말하다

노 대통령이 제시한 해법은 일단 ‘경제회생을 위해 분배나 개혁보다 성장을 선택하라’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와 보수언론의 전방위 공세에 대한 거부의 뜻이 담겨 있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최근 재계와 보수언론이 경제위기를 과장하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장’과 ‘분배’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재벌지배 체제 해소 정책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해왔다”면서 “노 대통령은 이들의 논리를 ‘투자할 테니, 개혁을 포기하라’는 이데올로기적 항복 요구로 판단하고 단호히 거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오히려 그들의 바람과 달리 “지속적 개혁을 통한 성장잠재력 향상”이라는 장기적이고 원칙적인 민생·경제 해법을 선택했다. 노 대통령은 “공공부문을 혁신하고, 더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우리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혁신주도형 경제로 발전”이라는 말로 자신의 구상을 개념화했다.

노 대통령의 ‘개혁을 통한 성장’을 집권 2기의 경제·민생 해법으로 설정한 것은 지난 2002년 대선 당시부터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 확립’을 역설해온 여권 내부 개혁성향 인사들의 주도권 강화라는 의미도 있다.

이정우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겸 경제특보, 정태인 동북아시대추진위 기획실장, 김수현 빈부격차·차별시정위 팀장 등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 줄곧 부동산경기 활성화 등 인위적 경기부양책이나 대기업 주도 경제성장 정책의 한계와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소비침체와 빈부격차 심화가 경제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현 상황은 공정한 부의 분배, 복지예산 확대 등 교육·노동·복지·환경 등 사회정책을 경제정책과 통합 운영하는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제안은 경제부처와 청와대 내부에서 대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를 통한 ‘재벌투자 유인’과 단기적 경기부양의 필요성을 제시해온 ‘성장우선론자’들의 목소리에 가로막혀 전면화되지는 못했다. 여권의 다른 고위 인사는 “강도 높은 부동산 투기 억제정책 등 일부에서만 선순환론이 반영됐을 뿐, 경제부처에서는 여전히 성장우선론이 압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정우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겸 경제특보(이용호기자), 정태인 동북아시대추진위 기획실장(이정용기자), 김수현 빈부격차·차별시정위 팀장(김태형기자).(왼쪽부터) 이들 개혁적 인사는 탄핵 이후에도 노 대통령과 지속적인 토론과 교감을 통해 경제정책 발상의 전환을 주도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탄핵 사태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지난해 12월 청와대 국민참여수석실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등에 포진한 개혁성향 인사들은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합성을 높여 경쟁력을 강화하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 확립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과 경제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워크숍을 열어 이를 공론화하는 단계까지 전진했다. 물론 당장의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워크숍에 참석했던 한 고위인사는 “경제부처 장관들의 태도는 무반응에 가까웠다”면서 “‘너희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정책 집행은 우리가 한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고 말했다.

권오규 정책수석이 물러나기까지…

그러나 이들 개혁적 인사는 탄핵 이후에도 노 대통령과 지속적인 토론과 교감을 통해 이런 발상의 전환을 주도할 사회정책수석실 신설과 청와대 내부의 개혁인사 확충 필요성 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과 사퇴를 결심한 박주현 전 국민참여수석 등은 사회정책수석실 신설이 확정된 5월 초 노 대통령에게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실행할 수 있는 인사의 수석 기용을 요청하는 등 전방위 공세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집무 복귀 이틀째인 15일 대국민 담화와 16일 청와대 2기 조직개편 및 인사는 개혁세력의 이런 요구가 상당 부문 반영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단 노 대통령이 재경부와 기업의 성장논리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아온 권오규 정책수석을 물러나게 하고 정책조정 기능에 능통한 김영주 비서관을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수석에 승진·임명한 것은, 노 대통령 집권 1기 경제정책의 핵심 지표이던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실현’을 주도한 핵심 세력의 퇴진을 의미한다.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첫선을 보인 ‘2만달러 시대’는 “마의 1만달러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분배보다는 파이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성장우선주의 논리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초반부터 논란이 됐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핵심 실세인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과 정만호 전 정책상황 비서관이 권오규 전 정책수석과 함께 ‘2만달러 시대 드라이브’를 주도했다.

한편, 사회정책·교육문화·노동 등을 총괄하는 사회정책수석실이 신설된 것도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에 시동을 걸어보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청와대 안팎의 개혁세력으로부터 사회정책수석 적임자 1순위로 강력히 천거됐던 김용익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 위원장 대신 이원덕 한국노동연구원장을 기용한 것은 전면 도입보다는 어느 정도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사회정책 수석 인선에 대한 참모들의 주문이 잇따르자 “경제를 잘 알면서 사회통합 정책을 지향할 수 있는 인물을 기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성장-개혁-분배의 3각 체제 구체화”

김용익 위원장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주창한 대표적 인사로 지난해 12월 청와대 워크숍에서 이런 방안을 기조발제했다. 그러나 경제계 일각에서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반면, 이원덕 노동연구원장은 노동계의 입장을 이해하는 온건합리론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경쟁력 확보에 입각한 노사관계를 주창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9월 노동부가 내놓은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노사관계 로드맵) 작성을 주도했으나, 사용자의 대항권만 강화했다는 노동계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 두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제 성장을 위해 개혁하고 성장을 위해 분배하는 ‘성장-개혁-분배의 3각 체제’가 구체화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귀환한 노 대통령’은 과연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라는 새로운 성장모델을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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