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17대 국회에서 의미 있는 소수에 머물 것인가 수권정당의 면모를 보여줄 것인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민주노동당은 4·15 총선 이후 언론의 조명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다른 정당들의 변화가 흥망성쇠 수준인 데 비해,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의 영역이 새로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 여야의 틈에 낀 3당에 불과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보다는 열린우리당과 공조?
권영길 대표를 비롯한 민주노동당 10명의 당선자들은, 총선 다음날인 4월16일부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철회를 위한 3당 대표회담을 제안했고, 17대 개원 이전에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지 않으면 국회 문을 연 첫날 파병철회 동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총선 이후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될 사안들에 대해 이슈 선점을 시도하고 나선 것이다. 양강 구도의 틈바구니에서 정치적 위상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의 첫선을 보인 셈이다. 이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탄핵 정국 해소를 위한 한나라당과의 ‘양자회담’을 제안했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면 될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날 한나절 동안 벌어진 정치권의 풍경은 ‘민주노동당 정치’와 관련해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선, 민주노동당이 야당을 표방하면서도 같은 야당인 한나라당보다는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공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4월16일 회견에서 “필요하면 어느 당과도 정책공조를 할 수 있다”며 원칙적인 입장을 밝혔지만, 국가보안법·정기간행물등록법·방송법 등 여러 정책면에서 극단에 서 있는 한나라당과의 공조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분석이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정치권 판갈이’에 이어 ‘야당교체론’을 주장하면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당들은 야당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민주노동당이야말로 정부·여당을 제대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왔다.
한나라당과의 관계가 비교적 명쾌한 반면 열린우리당과는 함수관계가 복잡하다.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보수정당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고 특히 노무현 정권의 집권 이후와 정동영 의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 보수화 정도가 심화됐다고 보고 있다. 김종철 선대위 대변인은 “열린우리당 내 개혁그룹으로 불리는 인사들도 과거 민주화운동의 명성이 있고 양심적인 삶을 살아왔을지는 몰라도 국회 내에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치를 해왔다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정책과 사안에 따른 협조 이외에는 고려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열린우리당도 표현만 다를 뿐 유사한 입장이다. 김근태 원내대표는 “민주노동당과 노선이 다르다”며 “책임 있는 여당으로서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의 현실성을 깎아내린 것이다. 권영길 대표의 3자회담 제안에 정동영 의장이 한나라당과의 양자회담으로 응수한 것처럼,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보일 듯 말 듯한 긴장관계는 당장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둘러싼 이견으로 표출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17대 국회를 “수권정당으로서 지지기반을 마련하느냐 아니면 양당 구조의 보수 정치판에서 액세서리 진보정당으로 존재하느냐”는 중대한 갈림길로 보고 있다. 그러려면 국회 내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해야 하고, 국회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교섭단체가 되는 것이 지름길이다. 교섭단체와 비교섭단체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상임위 배분, 회의 일정, 의안 상정 등 국회 내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이 의장(혹은 상임위원장)과 교섭단체 대표(상임위 간사)의 협의에 따라 진행된다. 16대 초반 국회에서 민주당이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국회법 날치기를 시도하고, 이마저도 불가능해지자 의원 5명을 꿔주며 무리수를 뒀던 것을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열린우리당과의 복잡한 함수관계
그런데 열린우리당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교섭단체 요건 같은 문제를 상황에 따라 원칙 없이 바꿀 수 없다”며 “필요하면 17대에서 관련 규정을 바꾼 뒤 18대부터 적용하는 것이 정도”라고 말했다. 내부에서는 9석을 확보한 민주당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총선 결과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 입장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의 급속한 성장은 썩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다. 4·15 총선 결과 양당의 지역구 후보와 정당투표 득표율을 분석해보면 지지층이 일부 겹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종로와 용산 등지의 민주노동당 정당득표율은 12%에 가까웠으나 후보들의 득표율은 각각 3.4%와 4.9%였다. 이곳의 열린우리당 정당득표율은 후보 개인 득표율에 비해 5~6% 정도 낮았다. 울산과 창원 등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된 지역에는 이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진보적 가치를 일정 부분 대변해온 것으로 평가받는 열린우리당(옛 민주당 포함)으로서는, 민주노동당이 여당의 독주 이미지를 희석해주거나 ‘불안한 과반’을 보완해주는 정도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멀리 내다보면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의 지지층을 잠식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셈이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의 고민이 있다. 노동자·농민·서민·사회적 약자 등 계급·계층의 정치적 대변자를 표방하고 있지만, 냉정하게 보면 의회 내에서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법안이나 결의안, 동의안 제출을 위해서는 다른 정당 의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고, 교섭단체 중심으로 진행되는 국회에서의 발언권도 넉넉히 보장받기 힘들다.
민주노동당은 이런 한계를 국회 바깥에서 충원하려는 것 같다. 노회찬 사무총장은 “실현 가능한 정책 제시로 다른 정당들이 뒤쫓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겠다”고 밝혔다. 의원 개개인에 대한 설득 작업과 함께 시민사회의 압박을 병행하겠다는 뜻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지난 3월9일 ‘의정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공청회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이런 의지를 분명히 했다. “소수파 원내정당으로서 보수정당과의 정책적 차별화 경쟁과 사회적 여론의 정치 쟁점화에 주력해야 한다. 즉, 계급·계층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의제를 설정하고 토론회·캠페인·집회 등 다양한 형태를 동원한 사회적 여론의 형성을 통해 정치적 명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박창규 정책위원회 의정대책팀장의 발제문)
상가임대차보호법 · 학교급식조례의 경험
민주노동당의 이런 자신감은 원외정당에 머물던 시절 ‘민주노동당식 정치’를 맛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6대 국회에서 제정된 상가임대차보호법과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미 제정했거나 제정 중인 학교급식조례가 좋은 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의 경우, 민주노동당이 임대 상인들의 피해 사례를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이 문제를 공론화한 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중심이 돼 법 제정에 성공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지원을 핵심으로 한 학급급식조례는, 한두명만의 광역 의원으로 제정이 힘들자 민주노동당 당원과 이에 동의하는 시민단체들이 나서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발의에 성공한 경우다.
독일과 브라질 등 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진보정당의 의회 입성은 국회의 오랜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정치권이 외면해온 의제에 대한 관심을 넓힘으로써 사회의 건강성에 기여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특권 폐지 △이라크 파병 철회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해소 등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내걸었다. 민주노동당이 17대 국회에서 의미 있는 소수에 머물지, 수권정당으로서 면모를 보여줄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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