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행보 끝 당직 사퇴… 탄핵효과에 안이해져 이슈 선점 실패하고 정체성 혼란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노무현 대통령도 선거전 양상을 보고 답답해하는 것으로 안다.” 열린우리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 대통령은 그럴 만하다. 총선 선거운동 개시 직전까지 열린우리당이 200석에 육박하는 압승을 내다보다가 한나라당과 1당을 다퉈야 하는 기이한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 본다면 탄핵으로 청와대 관저에 유폐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몸을 던져 만들어준 ‘200석’이 무너지는 것에 기가 막힐 듯하다. 게다가 총선결과 여야 의석이 엇비슷하게 무승부로 끝나면 헌법재판소가 노 대통령의 탄핵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단할 틈새가 생기는 것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노인폄하 발언에 거품 빠진 야당 심판
탄핵을 반대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추운 날씨에 떨면서 촛불집회에 참석함으로써 만들어준 판이 뒤바뀌는 것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김원기 열린우리당 고문은 4월8일 “국민들이 군사정권의 후예인 한나라당을 청산하겠다고 작심했는데도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 잘못으로 그들이 다시 주도권을 잡을 여지를 줬기 때문에 할 말이 없고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고 개탄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일차적으로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뭘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선거운동에서 죽을 쑨 탓”으로 볼 수 있다. 한길리서치(대표 홍형식)가 선거운동 개시 직전과 종반 시점에서 실시한 국민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3월31일 “지지하는 정당에 관계없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가운데 누가 선거캠페인을 잘한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정 의장 47.2%, 박 대표 30.9%가 나왔다.
그러나 4월9일 같은 조사에서는 정 의장 28.6%, 박 대표 49.5%로 평가가 역전됐다. 홍 대표는 “50대 이상은 물론이고 20~30대를 비롯한 전 연령층, 심지어 열린우리당 지지자가 많은 대졸 이상 응답층에서도 박 대표가 잘한다는 응답이 우세했다”고 밝혔다.
이런 평가가 나온 까닭은 그동안의 선거운동 과정을 되짚어보면 자명하게 드러난다. 정 의장은 3월31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 참석해 “이번 총선의 본질은 민심을 거스르고 대통령을 탄핵한 의원 193명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며 ‘거야 심판론’을 총선의 의미로 제시했다. 탄핵규탄 여론을 굳혀나가겠다는 선거전략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4월1일 정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이 불거지면서 페이스를 잃기 시작한다. 정 의장은 선거 유세를 중단하고 노인단체 따위를 찾아다니며 사죄 행보를 하기에 바빴다. 당내에선 정 의장의 선대위원장 사퇴론도 제기됐다.
정 의장쪽 사람들은 이 무렵 “60~70대 노인들은 어차피 우리당을 찍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정 의장은 노인 발언의 파문이 그리 큰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다, “전쟁 중에 장수를 바꿔선 안 된다”는 주장에 힘입어 선거운동을 재개했다.
정 의장은 이런 가운데 4월6일 탄핵 철회와 대선자금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의 회담을 제의한다. 그러나 박 대표는 “만나서 뭘 하자는 건지 알 수 없다”며 거절했으며, 정 의장은 사흘 동안이나 이 이슈에 매달리다가 결국 “경제 해법을 찾기 위해 총선 뒤에 만나자”는 박 대표의 역제의를 받아들인다.
탄핵 철회를 위한 대표회담은 기본적으로 노인폄하 발언을 물타기해보겠다는 ‘꼼수’로 비쳤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우리로선 탄핵 문제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만큼 맞았는데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해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고위당직자도 “회담 성사를 기대한다기보다 어떻게든 탄핵 문제가 다시 거론되도록 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대표회담 카드는 또 “어제까지 심판을 외치다 오늘은 만나서 대화하자고 하니…”라는 이미지의 혼선도 초래했다. 국회 탄핵안 의결 장면을 보여주며 “숫자가 적어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열린우리당의 텔레비전광고와도 엇박자가 났다. 열린우리당의 한 상임중앙위원은 “나도 그런 측면 때문에 대표회담 카드에 반대했다. 하지만 정 의장이 대화나 안정 이미지 등을 좋아해서…”라며 내부 이견을 비쳤다.
김형준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다. “선거전 첫 닷새 동안 이슈를 선점하는 게 중요한데 열린우리당은 이에 실패했다. 선거운동 기간 전에 탄핵 문제로 여론이 좋아지니까 압승하리라는 판단에 따라 민생과 안정 위주로 돌아선 것이 문제였다. 박근혜 대표가 여당 견제론으로 파고들 틈새를 허용한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이슈인 탄핵심판론을 스스로 무장해제해버렸다.”
열린우리당은 ‘박근혜 효과’를 차단하는 방법을 두고도 중구난방식 혼란상을 드러냈다.
정 의장은 3월9일 한국 CEO포럼 초청 연설에서 “박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3년 전에 전자통신연구원(ETRI)을 만들고 10년, 20년 뒤 우리가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를 준비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내가 가졌던 ‘박통’에 대한 평가가 일방적이었음을 알고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박정희는 알고 보니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뜻으로, 보수층에 대한 구애의 손짓도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반면에 당내 다른 인사들은 시각이 달랐다. 3월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통해 박근혜 체제가 출범한 다음날 열린우리당 회의에서 신기남 상임중앙위원은 “군사쿠데타의 창시자이자 유신독재의 주역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은 “일본군 관동군 중위 친일파의 딸”이라며 ‘박정희와의 전면전’ 입장을 취했다. 당대변인실도 연일 ‘유신독재’ ‘친일파의 딸’ 등의 개념으로 전면적 입장에서 대박근혜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대변인실이나 다른 당직자보다는 역시 당의장의 발언이 좀더 무게를 갖게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 정 의장은 4월9일 강원도 인제 유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독재를 했지만 국회의석 과반수, 3분의 2를 갖고 경제를 만들어냈다”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의석을 많이 주면 ‘인제’가 살고 경제가 산다”고 주장했다. 정 의장 특유의 ‘박정희 칭찬’이 다시 나온 것이다.
홍형식 대표는 “한나라당의 반격 한복판에 ‘박정희 신드롬’이 자리잡고 있음에도 열린우리당은 대처전략을 연구해놓지 않은 듯하다”며 “그나마 지도부 가운데 어떤 사람은 박정희를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극렬하게 비판함으로써 정체성 혼란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무장해제된 ‘탄핵심판론’ 추슬러보지만…
정 의장은 선거전 종반인 4월11일에 들어서야 부활론을 제기하며 ‘부패·탄핵 세력에 대한 심판’으로 초점 환원을 꾀했다. 오락가락 행보 끝에 뒤늦게나마 제자리 찾기를 꾀한 것이다. 반면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선거기간 내내 거여견제론과 국정심판론이라는 단일한 메시지를 꾸준히 반복적으로 밀고 나갔다.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혼란상은 기본적으로 ‘탄핵반대 열풍’에 얹혀 ‘부자 몸조심’하면 되리라던 안이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노란 점퍼 입기’ 등 이미지 정치 감각은 발달하되, 큰 일을 차분히 풀어본 적이 없는 한계도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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