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축구’는 이미 먼 옛날 이야기… 압박축구는 이제 한국팀의 트레이드 마크

과거 한국축구를 얘기할 때마다 반드시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축구는 ‘로봇축구’라는 것이다. 체력과 주력으로 무조건 뛰는 것으로, 조직력에 의한 약속된 플레이에는 강하지만 창조적이고 유연한 플레이는 전혀 하지 못하는 점을 꼬집는 말이다. 사실 한국은 지난 수십년 동안 이런 로봇 같은 축구로 아시아 정상권을 맴돌았다. 과거에는 국가대표라 하더라도 드리블·패스·볼트래핑 등 모든 면에서 축구의 기본기조차 제대로 못해내는 선수들이 많았다. 주위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자기 발끝과 공만 보며 무턱대고 드리블하는 선수, 속공 찬스에서 달려가는 동료선수 뒤에다 패스해서 동료가 뒤돌아가서 공을 받게 하는 선수….
미드필더의 힘이 빛났다
그러나 로봇축구라던 한국축구는 어느새 월드컵 정상을 다툴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월드컵 대표선수들의 기본기가 세계정상급 선수들에게 접근하고 있는 점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우리 대표팀의 기본기 성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선수가 박지성이다. 박지성은 지난 6월14일 벌어진 포르투갈전에서 세계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고난도 슛을 터뜨렸다. 포르투갈 골마우스 앞에서 어시스트를 받은 박지성은 일단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한 뒤 오른발로 가볍에 차올려 앞쪽 수비수를 따돌렸다. 그러고는 짧은 바운드로 튀는 공을 왼발로 차 골로 연결했다. 완벽한 기본기에 의한 결승골이었다. 박지성은 22일 스페인전에서 골키퍼 선방에 막혀 득점하지 못했지만, 포르투갈전 때와 똑같은 멋진 슈팅을 날려 자신의 실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18일 이탈리아와 벌인 16강전에서 후반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차두리 선수가 골대를 향해 그림 같은 오버헤드킥을 날린 장면도 유럽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사기에 충분했다. 골키퍼 정면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그물을 흔들지는 못했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나온 오버헤드킥 가운데 가장 정확한 슛으로 꼽힐 만하다. 이 밖에 모든 경기 때마다 보여준 이영표나 설기현 선수 등의 드리블 실력은 유럽선수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선수들이 밀집한 미드필드에서 주고받는 짧은 패스 연결도 한국팀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되었다. 이런 플레이는 기본기는 물론 잘 다져진 팀워크와 함께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감각이 없으면 해내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 선수들의 기본기가 잘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제는 한국축구를 보고 ‘골 결정력 부족’이라든지 ‘후반에 체력이 떨어져 역전골을 내줬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그물망처럼 촘촘해진 수비 덕분에 적어도 “수비진의 어이없는 실수로 골을 내줬다”는 소리를 더는 듣지 않아도 좋게 만들었다. 세계 최강팀을 상대로 경기당 평균 0.4점을 실점한 홍명보·김태영·최진철 등의 중앙수비는 어느 팀 못지않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제는 야신상 후보로 당당히 거론되는 이운재 골키퍼도 이들 수비수와 함께 4강 진출국 가운데 독일에 이어 수비가 두 번째로 좋은 팀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한국팀을 압박축구를 잘 구사하는 팀으로 거듭나게 한 것은 미드필더들이다. 김남일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대 이상의 수비력을 보여주었고, 유상철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그만이다. 김남일은 처음에는 축구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샀다. 특히 지난해 체코와의 원정경기에서 0 대 5로 패할 때는 대패의 원흉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월 벌어진 북·중미 축구선수권대회인 골드컵대회 때 김남일의 플레이는 발군이었다. 이제 김남일이 빠지면 중앙 미드필드는 수비력과 전체적인 조직력, 주도권 싸움에서 상대에게 밀릴 만큼 대표팀에서 그의 역할은 커졌다.
승리를 낚은 ‘파워 프로그램’
지난 22일 벌어진 스페인과의 8강전을 보자. 팽팽한 중원싸움을 벌이던 한국팀은 전반 중반 이후 갑자기 스페인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탈리아와 연장전까지 치르고 충분한 휴식시간을 갖지 못해 나타난 피로현상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은 김남일이 부상당한 발목을 상대선수에게 다시 밟힌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 수비의 스토퍼 역할을 해주던 김남일이 발목 부상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지자 스페인의 공격이 살아나 한국이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이다. 다행히 교체 투입된 이을용이 김남일의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는 바람에 한국팀은 후반에 본격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한국축구의 수비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건 수비수들만 잘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다. 이른바 압박수비, 즉 미드필드에서의 주도권 싸움도 잘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팀의 수준에 따라 들쭉날쭉하던 경기 운영이 어느 정도 우리 팀의 주도 아래 진행되는 것은 매우 큰 발전이다. 중원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은 역시 강인한 체력이다. 골드컵 당시 우리 팀은 예선 기간 동안 극심한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특히 순간적인 판단과 고도의 집중력, 냉철함, 그리고 감각적인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스트라이커들이 유독 무거운 모습을 보였다. 당시는 히딩크 감독이 체력훈련을 겸했다. 히딩크의 고집스런 ‘파워 프로그램’ 적용은 한국팀을 이번 대회에 출전한 32개팀 가운데 가장 체력이 좋은 팀으로 바꿔놓았다. 오죽하면 한국선수들이 약물을 먹고 뛰는 걸로 오해받을까.
히딩크 감독은 한국팀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팀은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문제다”라고 진단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의 평가에 대다수 축구인들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축구의 기술이 유럽에 별로 뒤지지 않고, 오히려 체력이 문제라니? 그러나 히딩크의 진단은 정확했다. 이번 월드컵 때도 드러났지만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도 앞에 있는 선수를 가볍게 제칠 수 있는 기술이 있는 선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브라질의 호나우두, 프랑스의 지단, 포르투갈의 피구 등 몇몇 선수들 정도였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선수가 패싱 게임을 한다.
그러나 체력은 거의 모든 선수들이 후반 중반 이후 급격히 떨어졌다. 아마 한국이 체력훈련을 해오지 않았다면 전반전부터 자신 있게 압박수비를 할 수 없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전반부터 몰리다가 선취골을 내주는 악순환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은 달랐다. 특히 폴란드·미국·포르투갈과의 D조 예선에서는 모든 경기에서 엄청난 체력으로 상대팀을 압도해 결국은 경기를 지배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후반에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연장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드컵 성과, 어떻게 발전시키나

사실 그동안 한국축구는 10년이나 20년을 내다보지 못한 채 1년 남짓한 기간 안에 성과를 노리는 다급한 투자를 거듭해왔다. 1년여의 시간은 고단하면서도 흥분과 기대, 그리고 실망이 교차하는 힘든 기간임이 분명했다. 특히 히딩크 감독은 그를 시기하는 축구인들로부터 사생활까지 침해당하는 등의 구설수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월드컵이라는 엄청난 무대에서 꽃을 피웠다. 이번 월드컵 대표팀은 어느 때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경기력 향상과 함께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한국축구는 이제 이번 월드컵대회에서 얻은 성과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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